법구경293 게송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그러나 잘 행하여 몸에 대해 항상 주의를 기울이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지 않고, 해야 할 일들을 끈기 있게 해나가는 이들에게는 주의 깊음’(sati)분명한 앎’(sampaja-na)의 이익으로 번뇌들은 사라져간다.

여기에는 사띠가 2번 나오는데 첫 번째는 몸에 대해 주의를 기울임이다. 이는 사념처(四念處)의 첫 번째 내용인 신념처(身念處)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경문의 끝부분에 사띠가 다시 등장하는데, 두 번째는 분명한 앎’(正知)과 짝을 이루고 있다. 북전 아함경에서 정념정지(正念正知)라는 술어로 등장하는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니까야에는 정념정지에 해당하는 구절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저 주의 깊음분명한 앎이 짝을 이루고 있지, 팔정도의 하나로서 바르고 적절하며 온전한 주의 깊음’(samma-sati)분명한 앎과 짝이 되는 것이 아님을 먼저 구분해야 한다. ‘정념이란 사띠의 완성이라는 의미가 되므로 이 구분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정지의 짝은 사띠에 내재된 많은 의미 전체를 온전하게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계열만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 그림 나은영.

하나의 계열이란 자신의 몸의 움직임을 간파해내는 인지에 초점이 있다. , ‘/정지의 결합은 염과 정지또는 염에 의한 정지라는 의미구조를 내재하고 있다. 이때의 사띠성취된 또는 완성된수행으로써의 위상이라기보다는 진행되고 있는것이다. 따라서 이때의 사띠는 사띠를 조건으로 하여 자신의 호흡과정을 비롯해 몸의 온갖 움직임을 미세한 양상에 이르기까지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음이 수행의 중심을 이룬다. 그러므로 사띠의 의미는 잊지 않기보다는 주의 기울이기또는 일으킨 주의력의 지속정도가 분명한 인지와 짝을 이루고 있다고 파악할 수 있다.

그는 나아갈 때에 물러날 때에 올바로 알아차리고, 관찰에 대해 관찰된 것에 대해 올바로 알아차리는 자로 머문다. 굽히고 폈을 때에 올바로 알아차리는 자로 머물고, 대의(大依), 발우(鉢盂), 법의(法衣)의 지님에서, 먹고 마시고 소화시키고 맛보았을 때에, 대소변 보는 일에서, 가고 머무르고 앉았을 때에, 잠들거나 깨어 있을 때에, 말하거나 침묵했을 때에 올바로 알아차리는 자로 머문다.

맛지마 니까야94 ‘고타무카경에 나오는 이 구절에 따르면 인지해야 할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 일상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몸의 움직임을 순간순간 그대로 인지하는 연습을 통해 분명한 앎’(正知)을 성취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때의 인지/알아차림/을 이끌어내는 토대는 몸의 움직임을 그대로 인지할 수 있는 주의력이니 바로 사띠이다. 보는 관점에 따라 주의력 대신 깨어있음, 마음챙김, 마음지킴, 주의집중, 지켜 섬등의 번역어를 채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번역어를 택하든 일상에서 생겨나는 갖가지 신체의 움직임을 분명하게 인지함을 이루어내기 위해서 사띠가 발생 조건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 ‘주의력을 발휘하여 몸의 움직임을 그대로 간파함으로써 인지능력을 닦아나가는 길은 곧바로 주의력향상의 길과 만나게 된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주의력/알아차림이 하나의 짝을 이루고 있는 닦음의 길은 남방불교에서 계승해온 하나의 수행법인데, ‘네 가지 대상에 대해 주의 깊음의 발휘와 지속’(四念處)이라는 체계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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