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 포교원장 지홍 스님

조계사 일요법회부처님처럼 살자

사실은 하나지만 대중은 서로 다른 견해로 늘 부딪힌다. 각자의 입장 때문에 갈등의 골이 깊어지다 마음의 상처를 입거나 연을 끊기도 한다. 무엇이 문제일까. 조계종 포교원장 지홍 스님은 724일 서울 조계사 일요법회서 부처님처럼 살자라는 주제로 법문했다. 스님은 상대방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그들의 입장에서 이해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화가 난 나를 먼저 돌아보고 여유를 찾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정리=이승희 수습기자

▲ 지홍 스님은… 광덕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석암 스님을 계사로 1970년 범어사서 사미계, 1975년 쌍계사서 구족계를 수지했다. 2004년 서울 불광사 회주 소임을 맡아 불광사를 대표적인 도심포교도량으로 일궜고, 월간 〈불광〉 발간 등으로 문서포교에도 앞장섰다. 2014년에는 포교대상을 수상했다. 조계종 총무원 기획실장과 민족공동체추진본부장, 제11~16대 중앙종회의원 등을 역임했다. 〈현대불교 자료사진〉

부처님이 깨닫고 본 중생
미혹한 존재 아닌 여래
아상 탓에 참상 못 볼 뿐
욕심 지울 때 고통 사라져

부처님의 깨달음
오늘 여러분과 부처님처럼 살자라는 주제로 함께 공부하겠습니다. 화엄경에는 부처님이 깨달은 직후 느낀 바를 적어놓은 부분이 있습니다. 보리수 아래서 막 깨달음을 얻은 후 부처님은 기이하도다, 참으로 기이하도다. 일체중생 모두가 여래의 지혜와 덕성을 원만히 갖추고 있으면서도 어찌 이리 어리석고 미혹하여 알지 못하는가. 내가 마땅히 성스러운 진리로써 그들을 가르쳐 잘못된 생각과 집착을 영원히 버리게 하리라. 그래서 자기가 갖고 있는 광대한 지혜가 부처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보게 하리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얼핏 우리는 부처님께서 깨달은 이후 지혜의 눈을 뜨고 본 세상은 분명 이전의 세상과 많이 다르게 느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깨달음의 세계는 뭔가 신비해서 이전과는 확실히 다를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지혜의 눈을 뜨고 본 세상은 이전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주변의 숲, , , 짐승은 그대로였고 상황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던 겁니다. 부처님은 지혜의 눈을 뜨고 나서 가장 먼저 중생을 떠올렸습니다. 이전엔 중생이 무명에 휩싸여 아무것도 모르는 어리석은 존재인줄로만 알았는데 깨닫고 보니 중생은 무명의 존재가 아닌, 깨달은 당신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부처님처럼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이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우리 중생이 부처님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존재로, 이미 지혜의 덕성이 원만히 갖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들이 어리석어 그 점을 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 주머니 속 보석
법화경에 재밌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자와 거지 친구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거지가 구걸을 떠났다가 부자 친구를 만났습니다. 어린 시절 수준이 비슷했던 둘은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부자 친구는 장사와 모임으로 바빠 외국을 다니는 성공한 사람이 되었고, 거지 친구는 구걸해 먹고 사는 처지가 됐습니다.

몸에 뼈와 가죽만 남은 초라한 행색으로 하룻밤 묵길 청하는 거지 친구를 본 부자 친구는 측은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를 후하게 대접했습니다. 모처럼 편하게 먹고 마신 거지는 깊은 잠에 들었습니다. 부자 친구가 약속이 생겨 외출하려는데 이 모습을 봤습니다. 안쓰럽게 잠든 친구를 위해 부자 친구는 거지 친구가 평생 여유롭게 먹고 살만큼의 보석을 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혹시 술에 취해 잃어버릴까 염려해 윗옷 주머니에 보석을 넣고 바느질로 잘 꿰매놓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술에서 깨 부자 친구 집을 나온 거지 친구는 이 사실을 까마득히 모른 채 계속 구걸을 하며 살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우연히 부자 친구와 마주쳤을 때, 부자 친구는 여전히 거지꼴인 친구를 보며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내가 보석을 줬는데 왜 여전히 구걸하며 살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부자 친구의 물음에 안주머니를 뒤져보니 거기엔 보물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 속 거지는 충분히 보석을 발견하고 부자로 살 수 있었지만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무관심으로 일관해 구걸 이외의 삶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눈치 챘겠지만 거지 친구는 중생을, 부자 친구는 부처님을 비유한 존재입니다.

어렸을 땐 똑같은 환경에서 자랐는데 부자는 열심히 인생을 개척해서 잘 살게 됐습니다. 부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졌습니다. 단지 열심히 능력을 개발한 사람만이 훌륭한 결과를 얻습니다. 이 가능성을 불성이라고 일컫습니다. 우리들 안주머니에 값진 보물이 들어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위의 이야기처럼 우리에겐 부처님의 덕성이 이미 갖춰져 있습니다. 어린이들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어디로 방향을 잡고 공부하느냐에 따라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의 논리도 통합니다. 어느 분야라도 노력하지 않고 전문가가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뭐든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졌다면, 우리의 일은 무엇을 할지 결정하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결정한 일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이 몫을 다하지 못하면 우리가 가진 보물을 그대로 썩히는 꼴이 됩니다.

이기심 버리고, 세상과 함께
그런데 우리는 너무 쉽게 많은 일들을 포기해버립니다. ‘나는 못해’ ‘나는 능력이 없어’ ‘내 취향이 아니야등을 이유로 포기한 채 노력하지 않으면 이룰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그렇게 살다보면 미련으로 인해 번뇌가 많아집니다. 번뇌가 깊어지면 고민이 되고, 고민이 심해지면 고통이 됩니다. 이 고통을 해결하지 못하면 삶은 고통의 연속이 됩니다. 이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합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 우선 나에게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 다음에는 노력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부처님께선 깨달은 이후에 고뇌가 없는 삶을 사셨습니다. 오직 대자대비심(大慈大悲心)만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대자대비가 마음에 가득 찼기 때문에 고통과 번뇌가 들어올 공간이 없었습니다.

우리 마음속 고통을 버리려면 부처님처럼 대자대비의 배려심을 가져야 합니다. 상대를 인정하고, 상대 입장에서 이해해서 베풀어야 합니다. 또한 상대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한 태도가 바로 자비심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처럼 살지 못하는 이유는 상대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났단 생각에 나를 너무 앞세웁니다. ‘아상(我相)’ 때문입니다. 나란 존재를 내 마음 속에서 내려놓지 못하고, 나를 앞세우는 행동 때문에 내 마음의 중심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못합니다. 상대를 배려하고 사랑하려는 마음이 들어올 수 없는 이유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욕망에 가득 찬 탐욕스러운 를 내려놓는 수행을 하고자 합니다. 나를 내려놓고 경계를 받아들이는 수행법을 익히면 갑자기 경계가 풀리면서 모든 길이 열리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나를 내려놓는다는 것은 모든 경계, 상황, 상대방, 사건들을 다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이들을 다 받아들일 때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개인적이고 이기주의적인 아상이 마음속에 자리 잡으면 남편, 아내, 자식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내 주장만 생각하게 됩니다. 상대방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그들의 입장에서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상대방 입장에 서보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됩니다. 함께하려는 마음만 있다면 얼마든지 상대방과 함께 할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나의 판단을 내려놓으면 우리는 세상 누구와도 함께 지낼 수 있습니다. 자식이 우리 속을 썩이는 일도 없게 됩니다. 흔히 자식은 전생의 빚쟁이나 원수라고들 말합니다. 빚을 갚기 위해 부모 자식의 인연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인지 부모 마음에 드는 자식이 별로 없습니다. 자식 때문에 부모들은 일생을 고민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부모라는 생각을 먼저 내세웠기 때문에 고민하는 겁니다. ‘내 자식이 이렇게 해줬으면 좋겠다’ ‘이런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내 뜻대로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우리들을 괴롭힙니다.

그러나 자식은 본인 나름의 뜻과 인생의 방향이 있습니다. 부모 말을 안 들어주는 것이 오히려 정상입니다. 마음이 일치가 될 수 없는 것은 전혀 고민거리가 아닌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이 내 말을 들어주면 내 마음이 얼마나 편할지 생각만하고, 자식 입장에서 이해하고 그들을 인정하려는 생각을 절대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 자신을 내려놓지 않으니 자식들이 들어올 수 있는 틈이 없는 겁니다. 물론 이해가 돼도 실천이 어렵지요?

우리들 욕구를 채우고, 우리 욕망 중심으로 살아온 몇 십 년 세월이 한 번에 바뀌긴 힘듭니다. 업보가 몸으로 굳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업을 소멸하려면 굉장히 큰 깨우침과 수행을 실천해야 합니다. 큰 수행으로 전환이 없으면 인생은 죽는 순간까지 고통스럽습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마음이 편안하고 자유롭습니다. 자식이 원수로 보이지 않습니다. 예쁜 며느리를 그대로 예쁘게 볼 수 있는 시어머니가 될 수 있습니다.

금강경은 아상(我相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을 내려놔야 한다는 가르침을 전하는 경전입니다. 속는 셈 치고 믿어보십시오. 앞으로 모든 세상을 대할 때 우리 생각을 내려놓아보는 겁니다. 옳다 그르다 판단이 서도 일단 그 마음을 접고 오직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바라보는 겁니다.

만약 화가 나더라도, 그것은 라고 생각하는 존재가 화가 난 겁니다. 그러니 화가 난 를 바라봐야 합니다. ‘, 내가 지금 화가 났구나하고 여유롭게 바라보십시오. 성질이 급해 당장 화를 내고 마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자식이 잘못했다고 해서 뺨을 때리는 행동은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자식은 우리를 더욱 미워하고, 우리는 자식을 건방지다고 생각하게 만들 뿐입니다. 부처님의 덕성을 지닌 우리는 화를 가라앉히고 내 안의 양심을 발동해 화내는 가짜 나를 지켜볼 수 있습니다. 탐진치에 놀아나는 나를 내려놓고, ‘양심적 나가 활동할 수 있도록 연습해야 합니다. 양심의 내가 화내는 나를 제압해야 삶이 평화로워집니다. 이것은 마음 닦는 수행이라고 합니다. 자꾸 수행하면 이것이 습성이 되고, 선업으로 굳어져 어떤 상황이 일어나도 바라보는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가 도림선사에게 평생의 가르침으로 삼을 만한 법문을 요청했습니다. 도림선사는 작은 악업도 짓지 말고, 작은 선업이라도 행하라(諸惡莫作 衆善奉行)’고 대답했습니다. 백거이는 세 살 먹은 어린이도 다 아는 말이라며 실망했지만 도림선사는 비록 세 살배기가 알아도, 팔십 먹은 노인조차 행하기 어려운 말이라고 설명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상대방과 화합하려는 마음을 지키고, 수행을 통해 내려놓음을 실천해 부처님과 닮은 삶을 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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