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포교 원력을 세우고 병원을 법당삼아 수행한지 올해로 30년이 됐다. 감회가 새롭지만 그 과정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기도 하다. 첫 시작은 작은 사명감 하나였다.

스님, 죄송합니다. 저는 더 이상 불자가 아닙니다.”

평생을 불자로 정진하시던 분이 어느 날 갑자기 병상에서 개종하는 모습을 목도했다. 자세한 이유는 묻지 않았다. 그분도 얼마큼 고심했겠는가. 아마도 불교가 싫어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내가 아플 때 그토록 믿어왔던 종교가 주변에 없다는 게 안타까워서가 아닐까 싶다. 이때 병상에 있는 불자들에게 하루바삐 부처님의 자비를 전해야겠다는 원력을 세웠다.

수많은 우여곡절의 한가운데서 예상할 수도, 종잡을 수도 없는 일이 있었지만 난감하면서도 감사한 기억은 첫 봉축법회 피아노 사건이다. 당시 병원에는 멋진 피아노가 있었는데 교회 소유라는 이유만으로 봉축법회에 사용할 수 없었다. 결국 합창단은 피아노 반주 없이 눈물로 봉축법회서 음성공양을 올렸다. 하지만 뜻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처럼 어느 불자님이 피아노를 기증해주셨고, 종교를 초월해 사용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하셨다. 그 피아노는 현재 병원 로비 한쪽에 자리 잡고 있다. 환우들을 위한 음악회 등 다양한 행사에서 그 위용을 뽐내며 사람들에게 감미로운 선율을 전해주고 있다.

▲ 그림 박구원.

달력 사건도 잊을 수 없는 기억 중 하나다. 법당에서 병실에 신년달력을 걸어놓으면 다음날 이웃종교 달력으로 바뀌는 등 종교간 갈등의 골이 깊었다. 특히 초파일을 맞아 문마다 연꽃을 만들어 붙였는데 누군가 찢어버리는 사건도 비일비재했다. 결국 병원장에게 각 종교가 모이는 자리를 부탁했고, 이를 바탕으로 달력에 대한 서로의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한 달력에 각 종교실 안내를 하고, 비용과 설치를 매년 돌아가며 책임제로 하자는 합의는 1999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돌이켜보면 가슴 설레고 소중한 기억들이 늘 나의 수행에너지가 됐다. 어느 날은 불서와 일반도서, 동화책, 시집 등 많은 책을 분류하고 대출카드를 만드는 작업을 했다. 그날은 작업이 늦어져 상좌 무관과 함께 병원법당에서 잠을 잤다. 방석을 깔고 이불도 없이 잠을 청했는데 다음날 일어나보니 얼굴이 퉁퉁 부었다. 웃지 못할 이 일화는 지금도 병원법당 후배스님들에게 가끔씩 들려주곤 한다. 그 시절 이런 열정이 이어져 지금까지 병원법당을 수행처로 삼아 포교할 수 있도록 이끌었기 때문이다.

병원법당을 지키며 만난 인연 중에는 가족 간 신행활동 방법을 두고 갈등을 빚는 일이 꽤 많았다. 그럴 때마다 환자 본인은 주변인들의 서로 다른 주장에 더 혼란스럽다는 탄식을 내뱉곤 했다.

이럴 때는 환자에게 부처님 가르침을 얘기했다. 환자 스스로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노력이 따르면 본인의 신행활동을 결정하는 데 혼란을 느끼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부처님 가르침을 통해 불자들이 심신의 안정을 찾고, 무종교인이 불교에 관심을 갖게 하는 데 병원지도법사의 역할은 작지 않다.

그동안 불교계는 포교방법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해왔지만 정작 병원포교에 대한 연구는 아직까지 활발하지 못한 편이다. 병원법당을 수행처로 삼았던 내가 책임감을 느끼는 부분이기도 하다. 현재 전국에는 40개가 넘는 병원법당에서 활동하고 있는 분들이 있다. 그분들을 중심으로 병원포교에 적용 가능한 포교방법론과 서비스 프로그램 연구가 시작되길 발원해본다.

-성범 스님(서울 경찰병원 경승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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