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혁파’ 상소 올렸지만 유불교유는 지속

문학적 천재성 일찍 드러나
병조좌랑 등 여러 관직 거쳐
고승과의 담소·차 즐기고
승려와 창수한 시만 수만 편

 

▲ 황준량의 문집 <금계집>.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중기의 문신(文臣) 금계 황준량(錦溪 黃俊良, 1517~1563)은 퇴계 이황(1501~1570)의 학풍을 따랐던 인물이다. 그의 자는 중거(仲擧), 호는 금계(錦溪)이다.

세상에 그의 문명(文名)이 알려진 것은 18세 때의 일이다. 당시 남성(南省)의 시험에 응시했던 그가 지은 책문(策文)은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명문이었던지 이를 본 고관(考官)은 무릎을 치며 칭찬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가 매번 시험에 응시할 때마다 앞자리를 차지했던 것은 우연한 일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어린 시절부터 문자를 이해했고 그가 말하면 다른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그의 천재성은 이미 천출로 타고난 것이었으니 이는 국조인물고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그의 환로는 비교적 순탄하였다. 1537년 생원시에 합격한 후 1540년 을과에 급제하여 권지성균관학유(權知成均館學諭)에 보임된 것을 필두로, 여러 관직을 거쳐 학록겸양현고봉사(學錄兼養賢庫奉事)로 승진, 1550년 병조좌랑으로 전임되는 등 여러 관직을 거쳤다. 더구나 그가 지방관으로 부임한 후에 보인 덕치(德治)는 명리(名利)를 멀리하고 의리를 존중했던 선비의 기상을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특히 퇴계의 학풍을 따랐던 그는 풍기군수를 지낸 주세붕과 왕래하며 서로 토론하는 일이 잦았다고 하는데 이 무렵 그의 학문적 식견은 이미 높은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리학의 연원에 깊이 마음을 두어 심경(心經)뿐 아니라 근사록(近思錄)등 여러 성리서(性理書)를 탐독했고, 주자서(朱子書)에도 크게 관심을 두었기에 공무의 여가를 틈타 주야로 공부에 매진했던 일은 국조인물고에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주위에서 누가 피로하면 병이 난다고 규계(規戒)하였다. 공이 대답하기를 글을 읽어 학문하는 것은 본래 마음을 다스리고 기()를 함양하는 것이니, 어찌 독서로 인하여 병이 날 수 있겠는가? 혹시라도 이와 반대되는 자가 있다면, (이는) 그 사람의 명운(命運)이지 글의 허물은 아니다고 하였다. 공이 혼자 지낼 때에는 쓸쓸한 방 안의 사방의 벽에 성현(聖賢)의 요훈(要訓)을 붙여두고서 스스로 깨우치고 반성하였으며, 주정지경(主靜持敬)의 말에 깊이 취함이 있었다.

공부에 열중했던 그의 의지는 이처럼 굳건했다. 그에게 학문은 본래 마음을 다스리고 기()를 함양하는 것이었으니 그가 학문하는 목적이나 가치는 이렇게 확실했던 것이다. 이뿐 아니라 그의 입각(立脚)주정지경(主靜持敬)’에 깊이 심취했다는 것이니 이는 주자학의 학문적 입장을 표방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더구나 그는 늘 청빈한 삶을 살고자 하였고 산수의 운치를 즐겼던 사람이었다. 간혹 부임지나 유람하던 지역에서 아름다운 풍광을 만나면 아는 사람을 초대하여 함께 즐기는 한편 어느 때는 홀로 운유의 풍경을 감상하며 돌아가는 것조차 잊었다고 하니 그의 산수벽(山水癖)은 이렇게 은근하였다.

특히 언 강물 위에서 썰매를 타며 겨울을 만끽했던 그의 기질은 국조인물고겨울철에 강물이 꽁꽁 얼자 중원(中原)으로부터 강을 따라 썰매를 타고 갔는데 앞에서 사람이 새끼줄로 당기게 하여 미끄러지며 올라갔다고 하였다. 이는 호방하고 활달한 그의 기질의 일면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 국보 제217호 정선의 <금강전도>(삼성 리움미술관 소장). 황준량은 법행 스님과 금강산에 다시 오르겠다는 약속을 담은 시를 썼다.
한편 그는 차를 즐겼던 선비로 그와 교유했던 승려들의 시축에 제발을 써 주었다. 그러나 한 때 불교를 배척하는 청혁양종소(請革兩宗疏)를 올린 적이 있었으니 이는 그가 병조좌랑(兵曹佐郞)에 전임된 1550년 겨울의 일이다. 그가 올린 소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근래에 승려들은 서로 축하하며 선종과 교종은 절대로 혁파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수개월 동안 지지부진한 어려움에 처하여 저들의 말처럼 되자 저들은 서로 함께 불경을 공부하고 범패를 낭송하며 더욱 위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심지어 나팔을 불며 망아지를 탄 채 백주에도 몰려다니고 있으니, 이 어찌 된 것이 전하의 금승령(禁僧令)이 도리어 저들의 기를 살려주는 데 알맞은 것이 되고 있단 말입니까. 천민으로서 노역을 싫어하는 무리나 사대부 자손으로서 무식한 자들이 다투어 영예롭게 여기고 부러워하고, 점차 그 흐름을 좇아 마침내 안락만 추구하고 고된 일은 회피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어른이나 어린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유행을 따라 숲으로 숨어들고 산으로 들어가고 있으니, 물고기처럼 모였다가 새처럼 흩어지는 무리들을 붙잡아 올 방법이 없어서 전하의 나라는 텅 비어가고 있습니다.(比者 緇流相慶 必謂兩宗之不革 及至留難數月 一如其言則相與治經誦唄 益張聲勢 甚至鳴螺擁騶 白日馳騁 是何殿下禁僧之令 適足以其氣耶 氓厭役之徒 衣冠無識之裔 爭榮慕之 漸已奔波 終至於趨樂避苦 大小從靡則潛林入山 魚聚鳥散之徒 無計禁刷 而殿下之國空矣)

그가 불교 혁파를 주장하는 소를 올린 연유는 분명했다. 바로 문정왕후의 비호아래 불교의 재건을 도모했던 불교계의 움직임을 비난했던 것이다. 이러한 현실 상황에 정치 관료의 입장에서 불교를 바라보는 그의 시각은 이처럼 분명했다. 하지만 그와 교유했던 승려들에게 보인 그의 태도는 유연했으니 이는 차증산인(次贈山人)에서 속내를 이렇게 읊었다.

내 생계 꾸림이 비둘기만도 못하여(治生我亦拙於鳩)
평생 한 구역의 꾀함도 이루지 못했네(未遂平生一壑謀)
도산에서 일 마치고 남은 힘이 있거든(辦了陶山餘刃在)
날 위해 가을에는 금계를 단장해주오(爲吾粧點錦溪秋)

산인(山人)이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퇴계선생의 서당을 지을 때 참여했던 승려로 추정되는데 승려들이 퇴계선생의 서당을 짓는 데 참여한 내력은 이렇다. 바로 1557년 퇴계선생은 공조참판에서 물러나 후학을 양성할 서당 터를 마련한 후 1558년 친히 옥사도자(屋舍圖子)를 그렸다고 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일종의 건축설계도인 셈이다. 당시 용수사(龍壽寺) 승려 법련(法蓮)이 공사를 시작했지만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자 그 뒤를 이어 서당을 완공(1561년 가을)한 승려는 정일(靜一) 스님이었다. 이러한 전말은 도산잡영(陶山雜詠)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결국 황준량이 도산의 서당을 지은 승려들과 교유했던 것은 그가 퇴계의 제자였기 때문이다. 훗날 그도 자신의 고향 풍기에 집을 짓고 정양(靜養)하려는 뜻을 세웠기에 날 위해 가을에는 금계를 단장해주오라고 청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의 아름다운 뜻은 병으로 인해 실현되지 못했으니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

이밖에도 그를 위해 천왕봉(天王峯)까지 안내해 주었던 법행 스님에게 준 증법행상인(贈法行上人)은 이들의 깊은 교유의 정을 짐작게 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밤중 절에서 종소리 들을 때(共聽金臺半夜鍾)
성긴 솔숲에선 청학이 자주 울었지(數聲靑鶴叫疏松)
삼천계의 풍월을 모두 읊었고(吟窮風月三千界)
일만 겹의 연하를 다 밟았네(踏盡煙霞一萬重)
물외의 인연 있어 함께 노니니(物外有緣聯杖)
인간 세상의 궁통 따지지 않누나(人間無意較窮通)
늦가을 풍악산이 비단처럼 붉어지면(秋深楓岳紅如錦)
다시 봉래산 최고봉을 밟으리라(
蓬萊最上峯)

가을이 오면 비단처럼 붉어지는금강산을 탐방하기로 약속했던 그들이다. 그러므로 다시 봉래산 최고봉을 밟으리라고 한 것이다. 풍악은 금강산의 이명(異名)이다. 이들의 물외의 교유는 이처럼 흔쾌하여 인간 세상의 궁통 따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구절에서도 황준량의 장부다움이 드러난다. 특히 그가 옥준 상인의 시권에 차운해 쓴 차옥준상인시권(次玉峻上人詩卷)에는 병중에 만났던 옥준 승려와의 화통한 교유의 일면을 나타냈는데 그 시는 이렇다.

병중에 선사 만나 파안대소하였는데(病裏逢師已破顔)
향 재료로 또 다시 자고반을 주네(香材又贈鷓鴣)
선사를 다시 만날 날이 어느 때인지를 알겠거니(重回碧眼知何日)
벼슬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때라(已決焚魚返故山) 

옥준 승려는 동화사의 승려로,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 1467~1555)의 영정을 그린 화승()이라 전해진다. 시에도 능했던 그였기에 병중의 황준량이 파안대소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 옥준 스님은 물외(物外)의 지음(知音)이었던 셈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가 번잡한 벼슬살이를 그만두고 소요와 정양(靜養)을 위해서라면 고향으로 돌아 가야한다는 의지를 밝힌 일이다. 속세란 고요함을 기르기에는 턱없이 소란한 곳, 은일과 소요를 위해 산림을 찾았던 선인들의 결단은 명백하고도 긴요한 의미를 지녔던 것이 분명하다.

또 다른 그의 시에서는 암자를 찾아 차를 즐긴 정황이 드러난다. 바로 우증우사(又贈牛師)에서 삼청계로 승경이 열려서(闡勝三淸界)/ 깊이 들자 오솔길이 그윽하네(尋幽一逕深)/ 구름 속 암자는 북두성에 닿았고(雲菴摩北斗)/ 빨리 흐르는 시냇물은 동쪽 숲을 씻어주네(飛澗漱東林)/ 학이 우는 큰 솔엔 이슬이 내렸고(孤松露)/ 산중턱은 차 연기로 자욱하네(茶煙半嶺陰)/ 고승은 속세의 근심이 끊어져(高僧灰世念)/ 장삼 하나로 추위를 견디네(一衲擁寒吟)”라고 노래했다. 실로 소나무의 맑은 기상 성성한 암자, 학이 우는 곳, 눈 푸른 납자가 머무는 곳이야말로 다삼매(茶三昧)를 현현할 수 있는 시공간일 것이다. 더구나 속기(俗氣)가 끊어진 고승과의 담소와 청량한 한 잔의 차는 청빈했던 그에게 편안한 즐거움을 주었을 터이다. 한때 그는 교종과 선종을 혁파하라는 상소를 올렸지만 인연 있는 승려들과 창수한 시만도 수편에 이른다. 실로 그는 유불교유를 실천했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의 저서로는 금계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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