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왕산 관룡사

경남 창녕, 억새밭으로 유명한 화왕산 봉우리 중 하나인 관룡산 능선에는 너럭바위가 하나 있는데, 용선대(龍船臺)라고 한다. 그 이름은 반야용선서 비롯된 것으로, 허공을 향해 튀어나온 거대한 암반 모습이 바다로 향하는 뱃머리와 닮았고, 그 뱃머리에는 석조여래가 불국의 문을 바라보고 앉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석조여래의 시선 아래에는 반야의 길을 일러주는 도량이 하나 서있다. 신라시대 8대 사찰 중 하나인 관룡사(觀龍寺)이다.  글ㆍ사진=박재완 여행 작가

신라시대 8대 사찰 중 하나
원효, 중국 대중에 화엄경 설법
약사전서 ‘349년’ 글자 나와

가야 통한 남방전래설 뒷바침
대웅전, 약사전 등 보물 다수
서쪽 능선엔 반야용선이…

작은 석문, 관룡사 일주문 역할
폭염의 햇살 사이로 실바람이 불어온다. 바람 끝에는 향 내음이 묻어온다. 법당이 멀지 않았다. 석장승을 뒤로 하고 오솔길을 걸어 오르면 관룡사 일주문이라고 할 수 있는 작은 석문을 만나게 된다. 처음 돌이 다음 돌을 정하고 그 돌이 그 다음 돌을 정해서 돌담 하나를 쌓고, 한 발 건너 그 옆으로도 그렇게 다시 돌담 하나를 쌓고 나니 그 사이로 문이 하나 생겼다. 열고 닫을 것이 없는, 문 없는 문이다. 굳이 없어도 될 문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문 없이 문을 지나면 석문은 ‘있어야 할’ 문이 된다. 관룡사의 가람 구조는 여느 사찰과 조금 다르다. 일주문도 따로 없고 멀리서 보면 작은 성을 보는 듯하다. 석문을 지나 촉촉한 풀밭 길을 걸어 오르면 도량을 열어주는 천왕문을 만난다. 도량이다.

관룡사 일주문 역할을 하는 작은 석문
두 가지 창건설화 전해져
도량에 들어서면 “한 가지 소원은 꼭 이루어 준다는 관룡사”라며 안내문이 관룡사에 대해 이야기 해준다. 화왕산 꼭대기 연못에 용이 살고 있었는데 절을 창건할 때, 용이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여러 사람이 보았다고 해서 절의 이름이 관룡사가 되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며 도량의 모든 전각이 불에 타 사라졌는데, 오직 약사전만이 그 화를 피했다. 약사전에 영험한 기운이 있다고 생각한 영운 스님이 약사전을 유심히 살폈는데, 들보 끝에서 ‘영화5년기유, 349(永和5年己酉,349)’라는 글자를 발견했다. 이때부터 관룡사는 대중의 확실한 기도처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많은 이들의 수행처와 기도처가 되었다. 들보에서 발견된 글자로 관룡사를 보면 관룡사의 역사는 ‘372년(고구려 소수림왕 2)’이라는 한국 불교의 공인 된 연대를 앞선다. 들보에서 발견된 349라는 숫자가 관룡사의 창건을 증명하는 기록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 숫자의 존재는 ‘372’를 앞서는 많은 이야기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게 하는 대목이다. 아무튼 관룡사의 역사는 분명 가볍지 않은 역사의 한 쪽임을 알 수 있다.

관룡사의 창건 시기는 두 가지 설이 있다. 583년(진평왕 5) 증법(證法) 스님이 창건했다는 설과 앞서 말한 약사전의 연대를 근거로 349년(홀해왕 40)에 약사전이 먼저 건립됐다는 설이다. 후자는 가야를 통한 남방전래설의 예증이기도 하다. 삼국통일 후 원효 스님이 중국서 온 대중 1,000명에게 〈화엄경〉을 설법하면서 대도량을 이루었다. 임진왜란 때 도량의 당우 대부분이 소실되었다가 1617년(광해군 9)에 중창되었으며, 1712년과 1749년의 중수와 중건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관룡사 대웅전 전경
도량 곳곳에 설법의 향기가 은은히
도량에 들어서면 바로 대웅전이 보인다. 병풍바위를 배경으로 자리 잡은 대웅전은 보물(제212호)이다. 석가모니 삼존불을 모셨다. 대웅전 앞마당엔 백일홍 한 그루가 꽃을 피웠다. 등을 밝힌 듯 마당이 환하고, 꽃그늘엔 산새의 발자국이 남았다. 꽃은 붉고 새들은 노닐어 마당엔 이미 법으로 가득하다.
관룡사 가람배치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대웅전 서쪽 모서리에 비껴선 채 서있는 약사전(보물 제146호)이다. 약사전은 사방이 한 칸인 작은 당우인데, 바깥 뒷벽에는 산수화 네 폭이 그려져 있다. 약사전에는 석조여래좌상(보물 제519호)을 모셨다. 여래의 귀가 어깨까지 내려와 있다. 들어야 할 것이 그토록 많은 것이리라. 여래의 두 귀를 바라보며 조용히 여래를 불러본다.

약사전 앞에는 삼층석탑(경남 유형문화재 제11호)이 서있다. 통일신라 말기 또는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탑에는 상처가 많다. 이곳저곳이 많이도 깨져나갔다. 석탑의 깨져나간 빈자리를 보고 있으면 왠지 석탑은 돌로 보이지 않는다. 약사전 앞 돌담 위에는 담장 밖에서 핀 능소화가 월담을 하고 있다. 아침엔 햇살 쪽으로 꽃이 피고 저녁엔 부처님 쪽으로 꽃이 피고 있다.

화왕산서 내려다 본 관룡사 전경
용선대서 바라본 절경 일품
서쪽 산으로 약 500m 정도 오르면 용선대와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95호)을 만날 수 있다. 가파른 오솔길을 지나 마지막 바위를 짚고 배에 오르듯 용선대에 오르면 절벽 끝에서 여래가 멀리 정토의 언덕을 바라보고 있다. 뱃머리에 여래가 계시니 반야용선이 틀림없다.
세차고 사나운 바다를 건너려면 반드시 배를 타야한다. 마찬가지로 세간의 생사고해를 헤쳐 나가려면 반드시 반야를 얻어야 하고, 그 고해를 건널 수 있는 배가 바로 반야용선이다. 오랜 세월 이곳에서 여래는 중생 모두가 반야를 얻어 승선하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 아득한 시절, 뱃머리를 찾고 뱃머리에 여래를 모셔 용선을 띄운 이는 누구일까. 그 쉽지 않은 자리를 찾고 그 자리에 여래를 모셨으니 그이는 분명 정토에서 온 이가 맞을 것이다. 관룡사에 가면 그이의 간절한 불사를 볼 수 있다. 극락정토로 가는 승선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

두 아이들이 부모의 손을 잡고 용선에 올랐다.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용선대와 반야용선에 대해 이야기했다. 두 내외와 아이들이 부처님께 절을 올리고 멀리 여래의 시선을 따라가 본다. 그랬다. 오랜 세월 배는 중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 둘 배에 오르고 있었다. 언젠가 반야용선에 모두 오르는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여래의 시선을 따라 용선은 날아오를 것이다. 관룡산 능선에 정박해 있는 반야용선의 뱃머리는 오늘도 정토를 향하고 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