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온 것이 바로 고(苦)입니다

과거에 입력된 것을 현실에 입력을 다시 한다면
과거의 업장이 다 무너져서 안팎을 잘 검토하고 파악할 수 있기에
실천을 해 나갈 수 있는 자유인이 된다.

마음을 밝히는 칠석, 은혜를 갚는 백중
질문 저는 지금까지 불법에 인연이 없어서인지는 몰라도 절에 다닐 생각을 못 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출근 할 때 선원 앞을 지나다가 선원 벽에 걸려 있는 현수막에 “마음을 밝히는 칠석, 은혜를 갚는 백중”이라고 쓰인 문구를 보고 의문이 생겨 질문을 드립니다. 그것을 보면서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었던 전통 풍습인 칠석이나 백중이 그토록 큰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번 참석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하는지요.

답변 칠성이라는 거는 내 몸과 더불어 같이 누구나가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칠성 부처님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산 사람들을 위한 거죠. 산 사람들을 위해서 하는 동시에 미래로 자꾸자꾸 가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과거, 현재, 미래를 둘로 보지 않는다면 칠석과 백중은 둘이 아닙니다.

그리고 백중은…, 우리가 죽으면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거니와 바뀌어서 짐승이 사람도 되고 사람이 짐승이 되기도 하는데, 우리가 생시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칼산지옥, 화탕지옥, 또 오무간지옥, 독사지옥 등 이러한 이름들이 허다하게 많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지옥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독사로 태어났다면 그게 독사지옥입니다. 허물을 입었으면 다시는 벗기가 힘들다 이겁니다. 그 독사의 모습을 벗기가 힘들어서 사람 되기가 어렵다는 얘기입니다.

화탕지옥이다 하는 것도 우리가 또 얼마 안 있어서 끓는 물로 들어가고, 불 속으로 들어가고, 수십 번 그냥 돌아가면서 들어가는데 그것이 어찌 화탕지옥이 아니겠습니까? 또 때로는 칼로 그냥 산 놈을 탁탁탁 쳐서 모두 먹죠? 그런 거를 볼 때 그게 어찌 칼산지옥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모두 칼산지옥이나 화탕지옥이 따로 있어서가 아니라 냉정하게 현실의 삶 그대로입니다. 현실 그대로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지옥도 하나하나, 화탕지옥이니 독사지옥이니 모두 보고 있습니다. 보면서 하고 있고 그럽니다.

나는 지금 현실을 얘기하는 겁니다. 무슨 옛날 얘기 하는 게 아니고 미래 얘기 하는 것도 아니고, 그대로 현실 얘기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이렇게 이렇게 되고, 또 사는 동안에도 이렇게 이렇게 해야 하고, 이렇게 이렇게 산다. 우리가 사는 동안에 이렇게 살면 다음 세상에 나올 때도 또 이렇게 살게 되니까 그거는 뭐, 독 안에 들어도 면치 못하는 거죠. 그러니까 마음공부를 열심히 해서 독 안에서 벗어나라 이 소립니다. 내 몸 통이 독이니까요. 내 몸 통이 독 안과 같아요. 통과 같아요. 이 몸 통 안에서 벗어나야 지구에서도 벗어나고, 지구에서 벗어나야 우주 세상에서도 벗어나고, 우주 세상에서 벗어나야 자유인인 것입니다.

그러니 왜 백중을 지내는지 아시겠죠? 예를 들어서 부모가 닭으로 화해서 이 세상 지옥고에 떨어졌다, 물고기로 태어나고 또 소로 태어나고 뭐, 독사로 태어나고 가지각색으로 태어나는 그런 틈에 끼었다 이런다면, 여러분이 천도재를 지극히 해서 그 몸을 벗게 해 주는 것이 바로 백중입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 나라에서 무슨 일이 있으면 그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감옥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나오죠? 그런 때 더러더러 나오죠. 그런 경우와 같이 백중 때는 남한테 모함 받아서 들어왔던 사람, 지극하게 다시 마음을 다잡은 사람,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백중 날 다 내보내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천도재를 세 번, 네 번 지내도 그거를 감당할 수 없으리만큼 된 집도 있습니다. 그런 집들은 자꾸자꾸, 그저 되는 대로 해야죠.

그렇다고 빚지고 하라는 건 아닙니다. 그저 내가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으면 자연적으로 좀 나아지게 됩니다. 나아지면서 마음먹은 대로 다 하게 되죠. 그러니까 그렇게 해 나가신다면 조상님들이 다시 모습이 변화돼서 인간으로 될 때에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리고 또 변화가 돼도 또다시 그러한 문제를 짊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요다음에 또 그와 같은 문제들을 끌고 가야 하니까요.

하여튼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살아가는 게 말입니다. 그냥 죽으면 고만이지 그러지만 그게 아니죠. 내가 콩씨 얘기도 가끔 하고 무씨 얘기도 가끔 합니다. 무 싹이 말입니다, 싹이 없어지면 그만이지 이러지마는 그 종자가 있어서 심으면 또 나오거든요. 그러니 ‘그만’이라는 말이 어디 있습니까? 영원토록 돌아가야죠. 그러나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콩씨가 팥씨가 될 수도 있고, 팥씨가 콩씨가 될 수도 있고, 또 아주 상승의 사람 종자가 될 수도 있고, 또 그냥 하(下)의 종자가 될 수도 있죠. 이런 자유자재권은 바로 여러분의 마음먹기에 달린 거죠.

그러니까 칠석이든 백중이든 그 의미를 가벼이 생각하지 마시고 정성을 기울이면서 열심히 노력하셔서 성취하십시오. 또 백중이 아니더라도 우리 사는 그대로가 백중입니다. 우리 자체가 그대로 무심(無心)세계, 유심(有心)세계 둘이 아니게 지금 돌아가고 있습니다. 무심세계 유심세계가 둘 아니게, 정신과 물질인 몸이 둘이 아니게 돌아가고 있으니 항상 하얀 백중이죠. 여러분이 다 그렇게만 하실 수 있다면 현실, 과거, 미래가 따로 없습니다. 그러니 항상 영원하게 자유자재권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그런 기회가 생기도록 노력하십시오.

사람의 육신이 떨어지면
질문 사람은 육신이 떨어지면 더 이상 공부할 수 없고, 그냥 몸 떨어질 때의 업식에 따라 윤회의 길에서 헤어나지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천도란 무엇인가요? 육신이 떨어진 중생을 어떻게 제도할 수 있는지 가르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변 마음이 보이지 않듯이 육신이 떨어진다고 해서 마음 자체의 그 근본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영원의 근본은 우리가 지금 살아나가는 데에 자동적으로 입력이 됩니다.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서 내세에 다시금 그 입력된 게 나오는 것이고 과거에 입력된 것이 현실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공부를 하는 것은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현재도 공(空)했다는 사실을, 여러분에게 그 길을 인도하는 겁니다. 그것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는가. 여러분 몸속에 악업, 선업이 모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악업, 선업의 그 의식들은 잘되고 못되고를 모릅니다. 사람의 생각이, 거기까지 다스리는 생각이 미쳐야만이 그게 따라 줍니다. 그러기 때문에 과거에 입력된 것을 현실에 입력을 다시 한다면 과거의 업장이 다 무너져서 안팎을 잘 검토하고 파악할 수 있어서 실천을 해 나갈 수 있는 자유인이 된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체가 없는 마음의 의식은 이 물질계의 관습에 의해서 죽어도 자기가 몸뚱이가 있는 줄 알고 있기 때문에, 또 체가 없으면 공부를 못 하기 때문에 체가 없어진 뒤에는 차원에 따라서 윤회가 된다는 얘깁니다. 그것이 바로 비가 한데 모이면 개울물이 되듯이 그런 것이 윤회라고 합니다. 그럼 마음은 체가 없으니까 자기가 체가 없는 걸 알아야 할 텐데, 생시 때에 마음이 체가 없다는 걸 알아야 될 텐데 그걸 모르고 산 사람은 자기가 이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러면 죽어서 영혼이 이 발자취를 옮기려면 악업, 선업의 그 애고에 의해서 전부, 크고 작은 것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기 때문에 한 발짝도 에누리 없이 벗어날 수가 없다는 얘깁니다. 또 자기가 체가 있는 줄 알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났다 하더라도, 강을 건너가려도 자기가 체가 있는 줄 알고 빠져 죽을까 봐 못 건너가고 불에 타 죽을까 봐 못 들어가고 이럭하니까 길을 인도하는 사람이 있어야만 될 거 아닙니까? 그래서 천도라는 게 생긴 것입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친구가 죽었는데 가만히 보니까 아, 친구가 개구리 소굴로 들어가거든요. 그래서 탁 막고서 “너, 어디로 들어가느냐.” 하고 악을 벽력같이 써도 그 영혼만이 듣는 말이죠. 그래도 이 생시의 사람들은 못 듣겠죠. 그래서 악을 쓰니까, 이 집이 참, 아주 2층, 3층으로 된 기와집이라서 좋기 때문에 들어간다고 하더랍니다. 그 모습을 타고 난다면 다시 모습을 바꾸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개구리 소굴로 들어가서 개구리 모습을 가지고 나온다면 그 모습 속에서, 그 환경 속에서 살면서 그냥 머리에 젖었기 때문에 다시 사람으로 환생하기는 극히 어렵다는 얘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입력되어진 습을 지우기가 힘들어요
질문 불법과 큰스님의 가르침 속에서 도반들과 어우러져 생활하고 있는 지금을 너무나 감사히 여기면서 하루하루 정진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큰스님께서는 수억겁 쌓인 죄업이라도 한생각에 다 녹일 수 있다고 하셨지만 저는 이 습을 다 지워 나가야 하는 이 공부의 길이 너무 힘이 들어서 질문을 드립니다.

답변 힘들 것이 하나도 없어요. 지워서 없애려고 하지 말고 내가 지금 생활하고 나한테 닥치는 것을 그대로 그 공부의 재료라고 생각하세요. 그걸 끊어 버렸다고 해서 안 나오는 게 아닙니다. 자꾸 나와야 내가 습득을 하고 내가 알게 되고 내가 경험을 하고 이렇게 되는 거지, 만약에 그게 나오지 않는다면 그건 목석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습이 나온다고 애를 쓰지 마시고 습이라고 생각지도 마세요. 나오는 대로 그대로 거기 놓고 행하면 그대로 되는 거지 무슨 습이 이렇게 많아서 내가 이걸 없앤다, 이걸 끊어야 되겠다 합니까. 이런 생각조차도 하지 마세요. 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습인 것이지 습이라고 생각 안 하면 습이 아닌 겁니다.

여러분은 살아오면서 그 습이란 말을 아주 쉽게 자꾸 하는데요, 나는 그래요. 살아 있는 동물이라면 어떠한 거든지 보면은, 들으면은, 하면은 할 수 있는 그러한 재능이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나쁘고 좋고 그런 것만 아니까 정히 나쁜 거는 하지 않고 좋은 것만 합니다. 나쁜 거를, 불의를 당했을 때 그거를 보지 못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도 모두 그대로 ‘아, 이 주인공 놈이 다 그대로 하고 그대로 해결하고 그대로 넘어가는구나!’ 하고 그냥 이렇게 편리하게 생각하세요. 그 이름에 그냥 막혀 가지고는 쩔쩔매지 말고요. 좋은 생각이 나와도 습이라 그러는 거예요, 이거는. 허허허. 아니, 좋은 생각을 해서 습이라고 안 그랬더라면 좋은 행이 그대로 나오고 좋은 경사가 있을 텐데도 불구하고 ‘요건 또 습이구나! 요거, 이거!’ 이렇게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냥 습이 되는 거죠.

내가 항상 얘기하죠. 그 뭡니까? 저 무학 대사가 꿈 해몽한 이치요. 이성계의 꿈 얘기 한 거 있죠? 만약에 무학 대사가 그 꿈을 그대로 나쁘게 해석을 했다면 나쁘게 됐을 겁니다. 그런데 좋게 해석을 하고 좋게 이끌어 주니까 그냥 지금 말로 대통령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이 만약에 꽃이 활짝 피었다가 그냥 우수수 다 져 버리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면 ‘아이고, 이젠 죽었구나, 이젠 죽었어!’ 하고 모두 탄식을 할 겁니다, 아마.

그래서 꿈도 생시고 생시도 꿈이니 절대로 꿈이 이렇다고 해서 언짢아할 일이 없습니다. 그냥 바꿔서 자꾸 써라. 구정물이 들어오면 바꿔서 새 물로 쓰고 이렇게 자꾸, 맛없는 걸로 들어오면 맛있는 걸로 바꿔 먹어라. 이게 자유자재입니다. 그런데 왜 자유자재하질 못합니까? 돈이 들어서 자유자재하지 못합니까, 누가 막아서 자유자재하지 못합니까? 그렇게 하라는데도 그냥 어떤 양반들은 꿈을 꾸고선 “아이고, 꿈을 이렇게 꿨으니 이거를 어떡하면 좋습니까.” 이러는 거예요. 이렇게 답답할 수가 없어요. 그거 한생각이면 바꿔 쓸 거를, 글쎄! 하여튼 지금 말하고 지금 얘기하고 그러는 사람이 그 주인공 놈이니까, 하하, 그냥 주인공 놈이 과거도 살았고 현실도 살아나가니까 그저 과거 것이든 현실 것이든 닥치는 대로 그냥 ‘주인공, 네 놈이 해결해!’ 하고 다 거기다 맡기세요.

사성제에서의 고는 어디에서 생겨났는지
질문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 사성제가 가장 근본이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성제라고 하면 고집멸도를 말하는데 그 고(苦)라고 하는 것은 어디에서 생겨났는지요. 그 고에서 벗어나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지요.

답변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 중에 고 하나만 없앤다면 집도, 멸도, 도도 없습니다. 왜 『반야심경』에 “색(色)이 공(空)이요, 공이 색이니라.” 이런 뜻을 말씀하셨겠습니까? 그렇다면 고는, 고덩어리는 어디에 있는가? 이 고 하나만 가지고 얘기를 해도 길어요. 그런데 고 하나만 없앤다면, 그 도리를 안다면 집도 없고 멸도 없고 도도 없어요. 이 도리를 아셔야 돼요.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온 것이 고입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사생이 다 그렇죠. 사생이다 하면 벌레까지도 들어가죠. 저 무정물도 다 들어가고요. 그러니 그것을 모두 따진다면 헤아릴 수가 없는 거죠. 차원이 있다, 없다 할 수도 없고요.

그런데 요것부터 얘기하고 그 고덩어리에 대해서 또 얘기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수억겁을 거쳐서 인간까지 되어 온 과정을 보면, 지수화풍이 한데 합쳐서 돌아가니까 거기에서 생명이 생겼고, 그 생명이 생김으로써 수없이 거듭거듭 모습을 바꿔 가면서 진화된 거예요. 그것을 아셔야 돼요. 여기까지 올라오면서 살던 의식 자체에 습과 욕심이 인과로서 박혀 있는 거죠. 원수를 졌든 안 졌든, 선이든 악이든, 수없는 나날을 거듭거듭 살아오면서 인연 지은 게 바로 이 몸뚱이입니다.

그런데 말 못할 일도 있지만 이렇게 여러분한테 전해 드리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이해를 해야 하고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알아야 자기가 마음으로 관할 때에 진실로 관할 수 있는 겁니다. 이해가 안 가서 진정 뭐가 뭔지 모른다면 절실하게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거죠. 여러분 세포에, 오장 육부에 정맥 동맥을 통해서, 두뇌를 통해서 모든 게 돌아가는 이치가 하나의…. 이것을 이야기하려면 그 뒷받침으로 이 이야기를 해야겠군요.

임신을 하려면 엄마 아빠가 들어가야 되는데, 음과 양이 들어가는 데는 반드시 인연 따라서 혼백이 거기에 접근을 하게 되지요. 이 세상은 과일도 그렇고 상인도 그렇고 정치인도 그렇고, 인연 따라 모두 모이죠? 그와 같이 인연 따라서 혼백도 거기에 접근을 하면 삼합이 한데 합쳐져서 삼신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음과 양, 그리고 나의 근본에 부합된 마음의 영혼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본래 근본을 가지고 거기에 접근한 그 사람의 인과에 의해서 수십억 마리가 거기 모입니다. 그럼 수십억 마리가 인과에 의해서, 유전에 의해서, 업보에 의해서 수없이 거기 모이는데 그 하나하나가 자기 인연 따라서 만난 바로 자기 중생이죠. 그런데 그렇게 많은 숫자가, 헤아릴 수 없는 숫자가 자기 인과로 온 겁니다. 업보로 온 거고 유전으로 온 거고. 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몸뚱이 속의 그것들은 다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아서 이렇게 인간 한 덩어리를 이룬 겁니다. 이걸 가지고 왜 고덩어리라고 하는가. 일 초 일 초 바꿔지면서 병도 나게 하고 수없이 나오게 합니다. 악의 업보로 인연이 된 거는 거기에서 수없이 돌아가면서 ‘내가 원수 갚아야지.’ 하고 때로는 아프게도 만들고 때로는 가난하게도 만들고, 때로는 우환이 오게도 만들고 때로는 웃게도 만들고, 어떤 때에는 싸움을 하게도 만들고 어떤 때에는 선의 인연이 거기에 또 포함돼 있기 때문에 사랑을 하게도 만듭니다. 이렇게도 돌아가고 저렇게도 돌아가고 그러는 원인이 여러분 몸뚱이 속에 수십억 마리가 지금 천차만별의 모습으로 운행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안에서만 그러냐. 마음은 체가 없어서 바깥으로도 나오는 겁니다. 연방 털구멍을 통해서 나고 듭니다. 그런다면 바깥의 일이 될 것도 안 돼요, 또. 이게 인과고 업보예요. 그런데 그것이 딴 데서, 보이지 않는 데서 오는 게 아니라 전부 나에게서 직접적으로 나온단 말입니다. 입을 통해서 말도 그놈들한테서 나오는 거, 생각하게 하는 것도 그놈들한테서, 전부 그놈들한테서 나오는 겁니다. 또 그놈들이 아니라면 이 육체를 쓰고 있을 수도 없고 그놈들이 아니라면 부처가 될 수도 없습니다. 참 묘한 거죠. 그래서 그 하나하나 나오는 것이, 거듭거듭 찰나찰나 돌아가면서 나오는 것이 고정됨이 없죠.

그래서 “공이 색이고 색이 공이니라.” 했습니다. 그리고 육조 스님께서는 또 “본래 자성이 움죽거리지 않으면서도 만법을 들이고 내는 줄 어찌 알았으리까?” 하셨습니다. 요걸 가만히 생각을 해 보십시오. 팔랑개비는 대를 쥐니까 팔랑개비가 돌아가고 대가 아니라면 팔랑개비가 있을 수가 없죠. 그와 같이 본래자성불의 그 중심은, 주장자는 바로 팔랑개비 대와 같이 붙어 있기 때문에 주인공입니다. 주인을 막대기라고 한다면 팔랑개비는 육신입니다. 이 모두가 삼합이 한데 합쳐져서 돌아가는데, 바람과 팔랑개비와 대가 자꾸 돌아가는데, 이게 삼위일체로 공해서 돌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일체는 하나로 돌아간다. 그 하나로 돌아가는 건 어디로 돌아가느냐? 그러니 그 하나마저도 이름 지어서 말할 수가 없는 것이 바로 부처니라. 그리고 공했느니라.” 이런 겁니다.

여러분이 살림살이를 하시면서 공해서 돌아가는 것을 그대로 아시죠? 모르십니까, 아십니까? 남편 만나면 금방 마음, 행, 말이 동시에 자동적으로 “여보!” 이렇게 나오죠? 허허허…. 그리고 마음도 거기다 의지하는 마음이, 애정이 스스로 나오죠? 행동도 “여보 당신, 뭐 잡쉈소?” 하고 나오죠? 그게 어떻게 그렇게 묘하게 나올까?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게 금방 일 초 전에 그랬는데 저기서 “엄마!” 그러고 아이가 들어오거든요. 그러면 그냥 금방 어머니가 돼요. 어머니가 돼서 “그래, 너 밥 먹었니?” 벌써 말과 행과 뜻이, 이렇게 삼합이 그냥 그냥 바뀌면서 넘어선 겁니다. 벌써 일 초를 넘어선 거예요. 찰나의 살림살이로 또 온 거지요.

그런데 그렇게 말도 바꿔지고 행도 바꿔지고 생각도 모두 바꿔지고, 이렇게 자동적으로 보는 대로 듣는 대로 바꿔지고 먹는 것도 고정된 게 없고 모두가 바꿔지니까, 어떤 거 먹을 때 내가 먹었다고 할 수 없고 어떤 말을 할 때 내가 말했다고 할 수 없고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내가 만났다고 할 수 없거든요. 하도 찰나찰나 바뀌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러니까 “무(無)” 했거든요. 그래서 여러분이 이 뜻을 “색이 공이요 공이 색이니라.” 하는 뜻을 아셔야 된다 이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공해서 돌아가는 그 이치를 알아야 하고, 또 사생을 거치면서 모습을 바꿔 가면서 진화된 이 자체가 인과 업으로서, 유전으로서 그 업보를 가지고 나왔는데 그것은 바로 욕심이 거기에 붙어 있고 내 생명을 아끼는 ‘나’라는 조건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라는 조건으로 인해서 욕심이 생기고 그 욕심으로 인해서 이 세상의 모든 물질세계에 끄달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나의 몸뚱이 속에서 그렇게 독 안에 들어도 면할 수 없는 그러한 인과로서의 업이 자꾸 나오는데, 그거를 거기다가 되놔야 없어집니다. 거기서 나오는 건 어떤 거든지, 내게 원수 갚으려고 나오든 또 좋은 인연을 맺어서 갚으려고 나오든 악과 선이 다 거기서 나오는 거니까 거기다 놓는다. 너희들이 한데 모여서 하나로 돌아가는 거니까 하나에다 다 놓는다 이겁니다. 팔랑개비가 돌아가면서 색깔을 내는 그 자체는 그 대에 의존해서 나오는 거니까 대에다 놔라 이겁니다. 대! 막대기. 그것을 종합해서 주인공이라고 이름을 했습니다. 그러니 거기다 그냥 되놔라 이겁니다. 그것을 하도 못 알아듣기 때문에, 이미 담겨 있는 카세트에다가 되넣으면 앞서 넣은 거는 없어진다고 그랬죠? 앞서 넣은 거는 없어지고 새로 넣는 것이 들어간다. 새로 또 넣는다면 앞서 넣은 거는 또 없어진다. 그러니 연방 그릇은 비면서 새 샘물이 나오는 거를 연방 떠먹어 가면서…, 그릇은 항상 비어 있으니 항상 새 물이 담기지 않겠느냐 이겁니다.

그러니 한생각을 잘하면 오간지옥이 무너지고 독사지옥이 무너지고 전체가 무너진다 이겁니다. 그런데 또 묘한 게 하나 있어요. 여러분이 믿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거와 속아서는 안 된다는 거, 이걸 잘 생각하셔서 믿는 거는 대 막대기를 믿고, 팔랑개비가 돌아가는 것에 속지 말고 거기에다 다 놔라 이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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