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불선원장 각산 스님

참불선원 강좌…〈금강경〉으로 본 인식론의 고착

흔히 사람들은 바라는 바를 성취하기 위해 종교에 기대 기복적인 신앙을 하곤 한다. 절대자가 갖는 위대함이 내 능력 밖의 것을 이룰 수 있게 해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열반을 앞두고 마지막 설법을 통해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등불로 삼아 믿고 의지하라”고 하셨다. 서울 참불선원장 각산 스님은 7월 25일 참불선원 인문학강좌서 “부처님은 열반에 오르기 위해 과정에 사용된 중간 수단을 단호히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며 “인식론이 갖는 한계를 넘어서 깊은 사유를 할 때 행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리=이승희 수습기자
 

▲ 각산 스님은… 해인사 희랑대 회주 보광 스님을 은사로 출가, 미얀마 고승 파욱 사야도와 세계적 명상가 아잔 브람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해인사 승가대 졸업 후 송광사·범어사·통도사 등 제방선원과 태국, 미얀마, 스리랑카, 호주, 중국, 인도 등지서 10여 년간 수행했다.

자아가 왜곡한 세상은 고통
라는 인식조차 한 관념
수행 통해 만물 변화 관조하면
집착 사라지고, 내면 행복해져

생각이 고통이다
근대 철학의 갈래 중 하나로서 인식론이 있습니다. 인간의 인식이나 지식이 어디서 기원했고 구조는 어떠하고 어떤 방법을 통해 습득되는지를 연구합니다. 서양 철학사에서 쟁쟁한 철학자들이 인식론을 많이 다뤘습니다. 인식론을 연구하면 인류 삶에 행복의 길을 제시하고 사회적 규범도 제대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7세기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인식론적 명제를 남겼습니다. 데카르트가 살았을 당시 유럽 정신사는 기독교 신앙 체계가 지배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신에 의해 인류가 존재하고, 신의 뜻대로 인류 삶의 모든 것이 이뤄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신이 아닌 사람의 인식에 의해서 인류가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기독교적 인식론을 한 번에 뒤집은 혁명적인 사고 때문에, 사람들은 데카르트 철학을 근대 철학의 시초라고 일컫습니다.

중세 유럽에서 근대의 시초를 마련한 데카르트의 혁명적 사상은 위대하지만 불교적 인식론의 깊이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데카르트뿐만 아니라 서양 철학자들이 제각각 주장을 펼치며 인식론 명제를 내놨지만 결국 서로에게 왜곡된 견해들로 합의점을 찾지 못했습니다. 데카르트는 인간 이성의 행위적 주체나 사유의 주체가 의식이라고 말했지만 정작 그 의식이 무엇인지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 불교는 탐착을 만드는 주체인 인식이 실체가 없다고 밝혀 한 단계 더 나아간 사유를 이끌어냅니다. 불교적 인식론은 지식 전체를 아우르는 논리로 인해 깊은 사유를 가능하게 합니다. 불교 철학을 통해서 보면 견고한 서양 철학이라도 왜곡된 모습이 드러나게 됩니다.

반야심경600권에 달하는 대반야경사상의 정수를 262자로 압축한 경전입니다.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세상 만물이 텅 비어 있는 ()’한 상태라는 이치를 알려줘서 이들을 열반으로 안내하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데카르트가 신을 부정하기 위해 내놓은 생각이란 개념은 사실 사람들에게 탐착과 고통을 전달합니다. 불교적 인식론은 자아가 바깥 대상과 접촉하면 반드시 느낌을 낳는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 느낌은 애()를 낳고, 이 애는 집착을 낳습니다. 집착으로 인해 존재는 인식되고, 존재하게 되면 반드시 고통이 뒤따릅니다.

마음작용 분석하기
이런 인식의 인과작용을 유식설이라고 합니다. 유식에는 3가지 인식상태가 있습니다. 하나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고 두 번째는 의타기성(依他起性), 마지막은 원성실성(圓成實性)입니다.

위 개념들을 설명할 때 대표적으로 뱀 모양을 한 새끼줄의 비유를 많이 인용합니다. 어떤 사람이 깜깜한 밤에 뱀을 발견하고 무서워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잘 살펴보니 그것은 뱀이 아니라 새끼줄이었습니다. 뱀으로 오인한 새끼줄을 발견한 사건처럼 온갖 분별로 마음속에서 허구적 대상을 지어내는 것을 변계소집성이라고 합니다. 뱀에 의해 공포라는 감정이 일어나는 연기(緣起)적 현상이 의타기성입니다. 그런데 다시 잘 살펴본 뒤 새끼줄이란 것을 발견하고 안도하는 마음처럼 존재의 진실한 상태를 깨닫는 것이 원성실성입니다.

이미지가 촉발하는 느낌은 공포 혹은 안도감 같은 감정을 사람들에게 인식으로 심어줘 특정한 행동을 유발합니다. 이러한 행동들이 모여서 현상계를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사실 느낌은 가치중립적 사건입니다. 단지 접촉으로 인해 생긴 현상일 뿐입니다. 자아가 대상을 만날 때 느낌이 촉발되는데, 이 느낌에 를 개입시키는 순간 집착이나 성남 같은 감정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있다는 고정관념을 벗으면 각종 감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금강경 사구게를 통해 부처님은 위와 같은 맥락인 제행무상·제법무아의 원리를 상세히 설명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산더미처럼 쌓인 금은보화가 사구게 한 게송만큼 소중하진 않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만큼 사구게는 부처님 가르침의 정수를 전달한 소중한 가르침입니다.

1구게는 범소유상 개사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입니다. 해석하면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가 다 허망하다.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이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는 뜻이 됩니다.

1구게를 이해하기 힘들면 제2구게의 가르침으로 보충합니다.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응무소주 이생기심(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而生其心)’은 현상에 머무는 마음을 내지 말고 어디에도 머무는 마음 없이 무심으로 행하라는 뜻입니다. 자아를 인식하는 순간 고통이 따릅니다. 두뇌는 실체 없는 과거를 있다고 착각합니다. 인식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인식이 빚은 자체를 나라고 여기지 말고 무심히 흘려보내면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열반에 이를 수 있습니다. 몸이 병들었을 때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3구게는 초기 경전서 법을 보는 자가 나를 보는 것이다는 부처님의 말씀에서 따와 지었습니다.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는 제2구게 가르침으로도 무심을 행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구절입니다. ‘만약 시각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면 이는 삿된 사도(私道)를 행하는 것이다는 말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절대적 존재에게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란 기도를 올렸던 브라만교의 행위를 타파하기 위한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은 뗏목의 비유를 들어 열반에 오르기 위해 그 어떤 중간 수단도 단호히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강을 건넌 뒤 뗏목을 버려야지 계속 뗏목에 집착하면 열반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보고 만지고 경배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지만 진리를 통해 언제든 만날 수 있습니다.

4구게는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으로 현상계의 모든 것은 열반 이전까지 생멸을 반복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세상 만물이 꿈이나 환영 같아서 찰나로 생멸하니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 담겼습니다.

마음공부는 행복의 시작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할 근거는 위와 같이 충분합니다. 불교는 단순히 논리를 제공하는 학문이 아닌 실천체계를 갖춘 총체적 지식입니다. 우리는 불교를 통해 적절한 수행법도 알 수 있습니다.

사성제(四聖諦)가 대표적인 실천적 가르침입니다. 사성제는 대자유의 기본조건으로, (((()의 네 가지 진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고제는 고통에 찬 현실을 바르게 보는 가르침, 집제는 온갖 번뇌가 고통의 원인임을 지적하는 가르침, 멸제는 번뇌를 남김없이 멸해서 해탈에 이르는 상태, 도제는 해탈에 이르는 여덟 가지 방법(팔정도)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고집멸도라는 네 가지 기본적 이론과 실천 철학을 길잡이 삼아 고통을 벗어나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상(我想)과 자기만의 견해에 휩싸이게 됩니다. 계율을 지키면 고요한 삼매를 경험할 수 있고, 이렇게 선정에 든 상태를 통하지 않고서는 무아를 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정진과 선정을 통해서 올바른 사유체계와 만날 수 있습니다.

선정을 통해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해 평온하게 된 상태를 사마타(samatha)라고 합니다. 이 사마타가 전제되지 않으면 현상을 그대로 관조하는 위빠사나 수행은 불가능합니다.

위빠사나는 편견이나 욕구를 개입시키지 않고 현상 그 자체를 관조하는 수행법입니다. 사마타의 고요한 상태에 이른 후에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멸하는 대상을 그대로 관찰해야 합니다. 느낌을 잘 관찰하는 것은 자유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면서 느낌이 빚은 관념으로 세상을 구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우주관은 관념이 모여 완성됐습니다. 우리는 관념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의도를 배제한 채 대해야 합니다. 존재를 인식해도 거기에 감정만 개입하지 않으면 세상을 관조할 수 있게 됩니다. 해탈은 거기서부터 출발합니다.

여러분, 위빠사나와 사마타를 두 개로 구분 짓지 말고, 하나로 연결된 개념으로 이해하십시오. 평화롭게 지켜보는 가운데 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부처님은 마지막 설법에서 너희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를 의지하라. 또한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의지하라. 이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우리가 보고 인지하는 모든 것들은 우리 인식작용에 의해 왜곡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식과 판단으로 해석된 삶을 삽니다. 만약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한다면 외부조건이 아닌 우리 내면의 세계관을 바꿔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공부를 위해 위빠사나를 하는 이유입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