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회경 작곡가 (조계종 불교음악원 음악감독)

 

김회경 작곡가는… 중앙대학교 음악대학 서양작곡과와 동 대학원 한국음악과를 졸업했다. 서울음악제(17·18·19회), 난파음악제, 동아음악콩쿨, KBS서울국악대경연에서 작곡상을 수상했으며, 많은 불교음악을 작곡한 공로로 제8회 행원문화상을 수상했다. 서양음악에서부터 국악관현악, 교성곡, 무용음악, 합창곡, 찬불가 등등 다양한 음악작품을 남겼다. 현재 동국대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고 오느름민족음악관현악단장, 불교음악협회이사, 문화복지연대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조계사혼성합창단과 봉은사어머니합창단의 지휘를 하고 있으며, 조계종 불교음악원 음악감독 및 봉은국악합주단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유년부터 굿판과 상엿소리에 끌려
서울음악제, 동아콩쿠르 등 입상
서양작곡 전공하며 국악과 수업 도강
“우리 소리, 한국음악 하고 싶었죠”
91년 오느름민족음악관현악단 창단


조계사합창단 계기로 찬불가 시작
1993년 첫 찬불가 ‘향연’ 발표
1996년 첫 교성곡 ‘불밭에~’ 발표
1999년 창작국악교성곡 ‘혜초’ 발표

범패 가락, 국악, 양악 접목 시도
찬불가와 창작국악곡의 전형 제시
교성곡 등 300여 곡 찬불가 작곡
“범패, 채보화 집대성하고 싶어”

 

“~아! 연꽃이여, 청아하고 아름다워라. 내 마음 연꽃같이 영원히 피어나리.~” 합창단의 음성이 불전에 울려 퍼진다. 찬불가 ‘연꽃 피어오르리’이다. 합창단은 음성 하나하나에 불심을 담고, 지휘자는 그 음성 하나하나를 모아 불전으로 실어 나른다. 음성공양이다. 꽃공양을 하기 위해 꽃이 피기를 기다려야 하고, 차공양을 하기 위해서는 찻잎을 길러야 하듯이 음성공양을 하기 위해서는 찬불가를 지어야 한다. 20여 년 동안 300여 곡의 찬불가를 짓고 그 노래의 음성을 부처님 전에 실어 나르며 사는 이가 있다. 서울 조계사혼성합창단의 지휘자이며 조계종 불교음악원의 음악감독을 맡고 있는 김회경 작곡가(52)이다. 박도일 수필가 jwpark4284@daum.net

"가장 한국적 음악

펼칠 수있는 마당은 바로 불교"

 

굿판의 소리와 상엿길 만가 좋아한 소년 
제상 앞에서 만신이 방울을 흔들며 춤을 춘다. 굿판이 열렸다. 만신과 마부가 재담을 주고받으면 놀이꾼들은 절타령 등을 노래하고 어울려 춤을 춘다. 북소리, 꽹과리소리, 장구소리가 온 마을에 울려 퍼진다.

소년 김회경은 굿판으로 달려갔다. 만신의 신들린 곡조와 주문, 놀이꾼들의 구수한 민요, 만신의 새신(賽神)을 돕는 다급한 악기소리, 심지어 만신이 흔드는 방울소리까지, 소년 김회경은 그 소리들이 좋았다.
경기도 포천서 유년을 보낸 김 씨는 어쩌다 동네에서 굿판이 벌어지면 굿판으로 달려가 그 묵은 곡조와 소리에 젖어 놀았다. 집 마당의 강아지보다 조금 컸던 아이가 무엇을 안다고 그 간단치 않은 소리에 이끌려 놀았을까. 그뿐이 아니었다. 동네에 초상이 있어 상여행렬이 지나가면 어김없이 아이는 그 슬프고 투명한 곡조를 따라다니며 하루를 보냈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어허야, 한 번 가면 못 온단다. 어허야~” 생사의 분간은 고사하고 천지분간도 못하는 어린아이 김회경은 그 고단하고 무상한 곡조와 장단의 어디서부터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일까. 인간과 귀신이 마지막으로 나누는 굿판의 소리와 생사를 건너다니는 상엿길의 만가를 그 자그마한 귀로 어떻게 들을 수 있었던 것일까.

“어머님이 회심곡을 잘 하셨어요. 어려서부터 어머님의 회심곡을 들으며 컸죠. 그래서 그랬는지 꼬맹이 때부터 그런 것들이 좋았어요. 무어라 설명할 수는 없지만 몸과 마음이 그 곡조와 장단을 받아들였어요. 지금도 그렇고 우리 전통의 소리와 곡조, 장단이 좋았어요. 그런 것들이 저에겐 설명할 수 없는 ‘인연’이라고 생각해요.” 훗날 작곡가가 된 김회경은 그때부터 이미 음악가가 꿈이었다.

중앙대 음대 서양작곡과에 입학
김 씨의 꿈은 그가 동남중종합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단단해지고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권형집 교장 선생님과의 만남이 계기였다. 서라벌예대 음대 교수를 지낸 권형집 선생은 교내 합주반을 관장하며 학교 안팎에서 다양한 음악 활동을 하고 있었다.

한창 음악가의 꿈을 키우고 있었던 소년 김회경에게 권형집이라는 이름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볼 수 있는 꿈의 실체였다. 그는 교내 합주반에 들어갔고, 권형집 선생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며 음악의 새로운 세계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중앙대 음악대학 서양작곡과에 진학한다. 그리고 2학년 때인 1985년에 서울음악제에서 작품이 당선되고, 1986년 난파음악제 최우수상 수상과 1987년 동아음악콩쿠르에서 입상하면서 작곡가로서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공부에 대해 미련이 많았다. 고민이 시작됐다. 그는 유학의 길을 접고 동 대학원 한국음악학과에 진학한다. 그는 서양작곡을 전공했지만 재학 시절에도 시간이 날 때마다 국악과 수업을 도강할 정도로 우리 전통의 소리에 대한 관심이 컸다.

“작곡가로서 제가 가야 할 길은 서양음악이 아니라 한국음악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렇다면 굳이 외국으로 유학을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유학을 다녀오고 나서도 한국음악에 대한 모색은 또 다시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어차피 이 땅에서 풀어야 할 숙제라고 생각했죠.” 대학원까지 마친 김 씨는 작곡가로서 자신의 길에 대한 깊은 모색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작곡가로서 해야 할 한국음악이란 게 도대체 무엇일까.”

불교를 만나다… 조계사합창단 지휘 제의 받아
김 씨는 1991년 자신의 음악세계를 구현하기 위한 한 걸음으로 오느름민족음악관현악단을 창단한다. 악단의 명칭에서도 보이듯이 그는 한국적인 음악에 몰두하고 있었고 그 실천에 대한 모색이 시작됐다. 그러던 그 해, 그는 조계사 어머니합창단의 지휘자 제의를 받게 된다. 김 씨는 무릎을 쳤다. 어린 시절 굿판과 상여행렬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따라다녔던 것처럼 또 한 번 그는 따라다니고 싶은 것을 만난 것이다. 그것은 불교였다.

 

자신의 음악의 근원은 ‘우리’에서 출발한다는 김회경 작곡가가 지휘자로 있는 조계사 대웅전 앞에서 웃고 있다.

“합창단의 지휘자를 제의받고 알았어요. 가장 한국적인 음악을 할 수 있는 마당은 불교라는 것을. 일 초의 망설임도 없었죠.”

그는 불교에 젖기 시작했다. 작곡가 김회경이 경험하고 고민했던 한국음악에 대한 모색은 이제 새롭고 구체적인 실천의 길로 접어들었다. 합창단의 찬불가를 지휘하면서 그는 매일 매일 부처님을 만나고 불교의 소리를 만날 수 있었다. 그랬다. 그가 처음 불교의 길목에서 만난 것은 찬불가였다. 넓게 보면 불교의 모든 음악을 찬불가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그는 대중이 쉽게 부르고 들을 수 있는, 그리고 그것이 공양이 될 수 있는 찬불가야말로 의미 있는 모색이라고 생각했다. 1993년, 그는 마침내 그의 첫 찬불가인 ‘향연’을 발표한다. 그리고 ‘지장보살송’ ‘길과 벗’ ‘왕생극락의 노래’ ‘님의 소리’ ‘연꽃 피어오르리’ ‘구름 걷힌 달처럼’ 등등 그의 찬불가는 봇물 터지듯 쏟아진다.

한국불교음악의 현재진행형 계보 잇다
한국 찬불가의 본격적인 출현은 1920년대 조학유, 백용성, 권상로, 김대운, 김정묵으로부터 시작됐다. 백용성 스님은 1927년 〈대각교의식〉에 ‘왕생가’와 ‘권세가’라는 악보를 남겼고, 권상로는 〈부모은듕경전〉에 ‘삼귀의’라는 악보를 남겼다. 하지만 초창기 찬불가는 작곡가들의 작곡 활동보다는 가사를 중심으로 창작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찬불가를 직접 작곡할 수 있는 작곡가가 부재 내지는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후 한국의 찬불가는 시대별로 새로운 행보를 걷게 되는데, 1950년대에는 어린이법회를 중심으로 진행된 일련의 찬불가들이 만들어졌으며, 1960년대부터는 서울의 대각사와 조계사에서 합창단이 만들어지면서 찬불가의 수요가 증폭되기 시작했으며, 그로 인해 한국의 찬불가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이후 1970년대 반영규 선생과 최영철 선생이 있었고, 198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한국의 찬불가는 질적 양적으로 또 한 번 전기를 맞게 된다. 많은 사찰의 합창단이 창단되었고, 그로 인해 불교음악은 대형화, 무대공연화로 이어진다. 그 힘은 1990년대로 이어져 불교음악운동이 더욱 활발하게 전개된다. 대형 무대공연을 통해 교성곡이 발표되는 등 대형 작품들이 발표되기 시작한다.

경전 하나를 교성곡으로 창작
1996년에는 마침내 김회경이 불교창작국악곡인 교성곡 ‘불밭에 피는 꽃-찬! 지장보살(서울 국립극장 대극장)’을 발표한다. 이미 많은 찬불가를 지은 반영규 선생이 글을 쓰고 김 씨가 곡을 붙인 ‘불밭에 피는 꽃-찬! 지장보살(이하 ‘불밭에’)’은 총 10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공연 시간이 무려 2시간 10분에 달해 불교음악 1천 3백곡 중에 가장 긴 곡으로 기록됐다. 이 곡은 ‘지장보살본원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전에는 성불하지 않겠다고 한 지장보살의 이야기를 드라마틱하게 묘사했다. 경전 하나를 교성곡으로 창작한 것은 ‘불밭에’가 처음이다.

“작곡 전이나 작곡 중에 〈지장경〉을 수십 번 읽고, 반영규 선생님이 쓰신 가사를 수백 번도 넘게 읽었습니다. 화려한 기교보다는 음 하나하나로 듣는 이의 가슴을 울리고 싶었습니다.”

곡은 같은 음절이 반복되면서 선율과 화음이 다양한 변화를 일으키고 후반부로 갈수록 고음화된다. 곡 전체가 지장보살의 공덕을 찬탄하고 있어 힘 있고 드라마틱하며 죽음과 삶이 둘이 아니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들어 있다.

 

2016년 4월 24일 국립극장 ‘붓다’ 공연 모습.

연주자만 4백여 명에 이를 정도로 초대형 무대였던 ‘불밭에’는 전통 국악의 음계와 불교음악인 범패가락의 진수를 현대화해 접목시켰으며, 국악과 양악이 가지고 있는 장점들을 접목해 찬불가와 창작국악의 전형을 제시했다. 또한 장시간 연주곡인 점을 감안해 합창과 중창, 어린이와 스님의 독창 등 다양한 시도를 동원했으며, 곡에는 일곱 살 때 돌아가신 김 씨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바라는 마음과 김 씨가 아들로서 오랜 세월 바라본 아버지의 애틋한 서정도 스며있다. 당시 ‘불밭에’는 “널리 알려진 서구의 종교합창곡들과 비교하더라도 손색이 없다. 오히려 없었던 장르를 빚어낸 정열과 창작성이라는 측면에서 서구의 작품들이 쫓아올 수 없는 생생함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회경 작곡가의 음악은 ‘우리’의 소리에서 출발한다. 어린 시절 굿판과 상엿길에서 설명 없이 들을 수 있었던, 그리고 음악가로 성장하며 김회경화 된 그 오래된 소리에서 출발한다. 작곡가 김회경은 가장 한국적인 음악을 모색해왔다. 그리고 그 답을 불교에서 찾고 불교로 완성해 가고 있다. 그는 이후 ‘육법공양’, ‘혜초’, ‘회당’, ‘찬불소리’, ‘아! 원효’ 등 5곡의 교성곡을 더 발표한다. 그 중 ‘아! 원효’는 현재도 작업이 진행 중인 곡이며, 전곡이 완성되면 뮤지컬 작업도 추진할 것이라고 한다.

1920년대 찬불가가 등장한 이후 1960년대까지는 창가풍, 군가풍, 타령조의 노래에 이어 서양의 찬송가 풍으로 이어져 한국적 찬불가라고 내세울만한 것이 뚜렷하게 없었다. 1970년대 이후 비로소 한국적 찬불가라 부를 수 있는 곡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어지는 한국찬불가의 계보에서 김회경의 이름은 1990년대의 계보에 뚜렷하게 등장한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한국불교음악의 현재진행형 계보 중 하나가 된다.

“범패, 채보화도 하고 싶어요”
“범패를 채보화하고 집대성하고 싶어요.” 2015년부터 조계종 종령기구인 불교음악원의 음악감독을 맡고 있는 김 씨의 현재와 미래는 여전히 한국불교음악의 계보 안에서 왕성하게 진행되고 준비되고 있다.

이틀이 멀게 법회에 서고, 시절 없이 곡을 짓고, 시절을 마련해 무대에 선다. 그런 그에게는 또 하나의 원력이 있다. 전승으로만 보존되고 있는 범패를 악보로 만들어 남기는 것이다. 불교음악의 진수이자 대표는 다름 아닌 범패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우주의 근본 진리를 찬탄하는 범패는 가곡, 판소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성악곡 중의 하나다. 부처님의 말씀이 여전히 우리의 삶을 이끌어주는 소중한 방편이듯이, 그 말씀의 씨앗으로 자란 범패 또한 우리 삶에 소중한 방편일 것이다. 더욱이 불교가 종교를 넘어 우리 민족의 생활과 문화적 근간을 이루어온 사실을 생각할 때 범패는 종교를 넘어 소중히 해야 할 가치임에 틀림없다. 그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우리’의 소리를 늘 붙들고 살아온 김회경에게 그 일은 설명이 필요 없는 인연이고 당연한 원력일 수밖에 없다.

아쉬운 것은 이러한 찬불가와 교성곡 등 불교음악의 음원이 많이 보급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불교음악이 무대에 오르는 일 또한 많지 못하고, 불교음악인들이 제대로 조명되지 못하는 것도 아쉬운 것 중 하나다. 백용성 스님 등 많은 선지자들의 노력이 있었고 김 씨를 비롯한 음악인들이 그 원력을 이어온 것은 기쁘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 가치와 의미가 충분히 설명되고 있는 시절인가’에 대해선 아직 의문이 따른다. 그들의 이름과 음악이 귀만 열면 들려오는 시절이 오기를 기원한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