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광욱 광림사 법륜회 회장

 

신광욱 씨는… 1952년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나 1968년 상경했다. 1976년 특전사 제대 후 택시 운전을 하게 됐으며, 1993년 광림사 해성 스님이 출연한 불교방송 라디오에서 장애인들의 사연을 듣고 봉사자로 나섰다. 동료 택시기사들을 모아 광림사에서 법륜회를 조직해 성지순례 도우미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법륜회가 진행하는 ‘중증장애인 세상보기’는 1996년 조계종 사회복지재단으로부터 우수상을, 2003년 장애인먼저실천본부에서 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장애인을 돕느라 술을 마시지 않아 건강해졌다는 신 씨. 그의 모습에서는 65세의 나이가 믿기지 않는 젊음이 느껴진다.

생계활동 외에 오롯이 봉사활동
1993년 장애인 사연 접하고 발심
광림사 해성 스님과 봉사도반으로
1994년 법륜회 조직해 활동 전개
 
장애인 돕기 20년 세월 ‘보람’
청각장애인 무료운전 교습 진행
지체장애인 직접 태워 성지순례
시각장애인 해외성지순례 안내도
 
세월 흘러도 봉사 의지는 ‘청춘’
동료봉사자들 고령자가 대부분
지체장애인서 시각장애인 돕기로
“봉사하니 오히려 건강합니다”

“물질로 나눌 수 없다면 마음으로라도 베풀면 되지요. 운전이라도 잘하니, 장애인들의 발이 돼야겠지요.”
이제 막 머리에 희끗희끗한 서리가 내리기 시작한 한 중년의 신사는 환한 미소로 이렇게 말했다. 어느 직장이었으면 이미 퇴직해 손자들의 재롱을 받을 나이인 65세에도 이 신사는 ‘아직 한창’이라며 운전대를 잡았다. 그렇다. 이 신사의 직업은 택시기사다. 끼어들기와 급정거 등이 판치는 서울 도심을 그는 물 흐르듯이 부드럽게 운전해나갔다.

올해로 33년째 택시운전을 하고 있는 신광욱(법명 無二ㆍ65) 씨의 이야기다. 그는 택시 운전을 하며 송파 광림사 연화원에서 장애인들을 위한 봉사를 20년 넘게 펼치고 있다. 청각ㆍ지체장애인을 거쳐 이제는 시각장애인까지. 장애불자들의 ‘눈과 귀, 발이 되겠다’는 마음가짐 하나로 꾸준한 봉사활동을 이어오고 있었다. 한여름의 뜨거움이 느껴진 7월 18일 송파 광림사 연화원에서 그를 만났다.

2011년 장애인 나들이에서 활동하는 신광욱 씨
라디오서 장애인 사연 접하며 발심
신 씨가 택시운전을 시작하게 된 것은 33년 전인 1983년부터였다. 1952년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난 그는 1968년 상경했다. 다들 그랬듯 시골에서 입 하나 줄이기 위해서였다. 특전사에 다니다 1976년 제대한 그에게는 생계유지가 화두로 다가왔다. 혈혈단신인 서울에서 먹고 살기 위해 잡은 것이 핸들이었다. 198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택시기사는 유망직종이었다. 다행히 군생활에서 차량을 운행한 경력이 인정돼 처음부터 개인택시를 몰게 된 행운 아닌 행운을 얻었다.

홀로 택시를 몰아야 하는 택시기사에겐 라디오가 친구다. 1993년 라디오에서 우연히 광림사 해성 스님의 인터뷰를 듣게 됐다.

“불교가 모태신앙이었어요. 부모님과 홍천 수태사에 어려서부터 다녔지요. 1980년대 택시운전을 하며 강동구 마하연을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런 연유로 평소 불교방송을 즐겨 들었어요. 1993년 2월 강부자 씨가 진행하던 ‘피안을 향하여’에 연화원 해성 스님이 출연하셨어요. 장애인들을 돕자는 구구절절한 말씀에 제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해성 스님은 당시 불자들이 교리를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찰을 직접 찾아 수행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스님은 이런 필요성에도 장애인들은 사찰에 갈 수 없는 실정이라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신 씨는 방송이 끝나자마자 스님에게 전화를 해 포이동 연화원 법당에서 만났다. 신 씨의 원력은 자신 혼자만의 봉사로 끝나지 않았다. 함께 다니던 불자 택시기사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1년 동안 모임 이름조차 정하지 않은채 봉사활동을 전개하던 신 씨와 동료기사 10명은 1994년 5월 5명을 시작으로 ‘법륜회’를 출범시켰다.

1996년 진행된 지체장애인들과 목아불교박물관 관람 모습.
장애인 태우고 전국사찰 누벼
법륜회는 청각장애인 성지순례 도우미를 시작으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남양주 불암사를 비롯해 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여주 신륵사 등 전국사찰을 누볐다. 신 씨와 법륜회의 청각장애인 봉사활동 소식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이 소식을 들은 지체장애인들에게서도 연락이 왔다.

“청각장애인들만 데리고 가지 말고 함께 가자는 요청이 몰려왔어요. 평소 이동이 자유롭지 못하다 보니 사찰에 아예 가지 못한다는 말과 함께요.”

신 씨는 이에 1995년부터 지체장애인들의 도우미 역할을 자처했다. 성지순례 전 법륜회 회원들은 지체장애인들의 집주소를 받아서 찾아가 택시로 성지순례를 떠났다.

장애인시설, 특히 장애인 화장실 등이 구비되지 않았던 당시 사찰환경으로 인해 지체장애인들이 용변을 볼 때면 법륜회 회원들이 2~4명씩 붙어 도와야 했다. 이런 상황 때문에 폐를 끼치기 싫은 지체장애인들은 굶기도 했다.

“하루는 지체장애인들이 성지순례 전날 저녁부터 굶는다고 얘기를 들었어요. 이유를 물어보니 밖에 나가면 화장실이 불편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정말로 가고 싶다는 말에 다시 힘이 났습니다.”

해성 스님은 “그만큼 말로만 듣던 사찰에 오고 싶어하는 분들이 많다. 대부분이 성지순례 며칠 전부터 설렘으로 잠을 못잔다고 한다. 사찰에서 법문을 듣고 눈물을 펑펑 흘리는 장애인들도 많다”고 첨언했다. 스님은 “이들의 성지순례는 법륜회 거사님들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휠체어 편의시설이 없어 지체장애인 한 명당 4명씩 붙어 휠체어를 들고 법당까지 나르곤 했다”며 신 씨 등 법륜회원들의 노고를 전했다.

택시기사로서의 생업과 봉사자로서의 삶을 함께 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개인택시 기사의 경우 이틀을 일하고 하루를 쉬도록 되어 있다. 이 일정을 맞추고, 중요한 행사가 쉬는 날에 맞지 않으면 일을 쉬기도 했다.

“예전에는 네비게이션이 없었어요. 그래서 성지순례를 가려면 지도를 펴놓고 공부하고, 사전답사를 해야 했지요. 틈틈이 쉬는 날에 하려다 보면 한 번 성지순례 준비하는 게 3주가량 걸립니다.”

법륜회 모든 회원들은 생계가 달린 택시운행을 멈추기도 하고 자비를 행하며 장애인들을 수송했다. 장애인들과 함께 불자로서의 삶을 살겠다는 원력이 아니고서는 힘든 일이었다. 여기에 법륜회 부인들로 구성된 보현회가 점심식사 준비와 설거지 등을 하며 도왔다. 매년 10차례 성지순례와 봉사를 진행했으며 동참 택시가 30여대에 달하기도 했다.

장애인음악회 효시된 용주사 순례
당시 법륜회 회장을 맡고 있던 신 씨와 해성 스님은 두차례 성지순례 후 색다른 성지순례를 진행하기로 했다. 바로 사찰에서 장애인 음악회를 여는 것이었다. 1996년 수원 용주사 성지순례를 앞두고 활발한 논의가 이어졌다.

신 씨는 “장애인들이 단순히 사찰을 보고, 법문을 듣고 오는 것 보다, 스님과 사찰의 대중들와 함께 어우러지는 자리를 만들고 싶었다. 추억을 남기고 이를 바탕으로 불자로서 삶의 희망을 갖게 하고 싶었다”고 당시 심정을 전했다.

문제는 사찰 측의 허락이었다. 지금도 남아있지만 장애인들에 대한 잘못된 인식 때문이었다.

“사찰음악회가 지금과 같이 보급되지 않았던 때였어요. 어디 신성한 사찰에서 음악을 부르냐는 호통도 나왔습니다. 여기에 장애인들을 데려와 음악회를 한다니 더욱 그랬지요. 만약 사고라도 나면 큰일이잖습니까.”

신 씨는 “겨우 허락을 받아 음악회를 여니 오히려 사찰의 스님들이 더 좋아했다. ‘읍읍읍’ 이렇게 말도 되지 않지만 소리를 내며 노래하고 즐거워하는 장애인들의 모습을 보며 모두가 감동받았다”고 전했다.

성지순례 도우미로 활동을 시작했지만 법륜회 회원들은 불교교리 공부 등 불자신행모임으로도 충분히 제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택시 차량에는 카세트 테이프가 쓰였다. 신 씨를 비롯한 법륜회 회원들은 만공 스님 법문 테이프 등을 돌려 들으며 운행 중에도 교리공부를 했다.

해성 스님은 이런 법륜회 회원들을 위해 정병조, 故김상현 교수, 동봉 스님 등 불교석학들을 초청해 이들을 위한 불교강좌를 열었다.

신 씨는 “저희 운전기사들이 어디가서 이런 공부를 하겠냐”며 “교수님들이 운전기사 10여 명을 앞에두고 거의 일대일 강습을 해주셨다. 이때 불교에 대한 생각이 정립됐다”고 말했다.

신광욱 씨는 택시에 관음보살상을 항상 모시고 다닌다. 신 씨에게 택시는 움직이는 법당이다.
장애인 무료 운전교습, 가장 기억에 남아
신 씨와 해성 스님이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1998년 청각장애인들에게 무료 운전교습을 했을 때의 일이었다.

신 씨는 “봉사활동을 시작하고 가장 많이 간 곳이 경찰서”라며 웃었다. 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장애인들이 무면허 운전을 해 적발되어 신 씨가 참조인 자격으로 간 것이다. 광림사 해성 스님이 면허를 딴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당시에 청각장애인들이 운전 중 사고가 나면 광림사 해성 스님이 경찰서로 가곤했다. 당연히 해성 스님의 기사 역할을 맡기도 했던 신 씨도 경찰서를 자주 가게 됐다.

“사연을 들어보면 생계 유지를 위해 운전면허가 꼭 필요한데, 계속 떨어지니 포기한 경우가 많았어요. 청각장애인들은 실주행에서는 전혀 무리가 없어 면허만 따면 되는데 말이죠.”

해성 스님은 “청각장애인들은 어학능력이 떨어져 문장구조 파악 등이 안된다. 실생활에서는 전혀 지장이 없는데, 책 공부가 되지 않는 것”이라며 “조금만 도와주면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는데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신 씨를 비롯한 법륜회 회원들과 해성 스님은 장애인 운전교습소를 차리기로 했다. 복지라는 개념이 막막했던 그 때 신 씨와 해성 스님은 구청으로 가 장애인 교습용 차량, 운전강사, 제반경비 등을 광림사에서 부담하는 조건으로 교습 자격을 획득했다.

문제는 차량이었다. 조계종 총무원장 월주 스님이 종단 차원에서 차량을 지원해주기로 약속했지만 종단사태가 일어나며 이는 휴지조각이 되어 버렸다.

법륜회와 해성 스님은 차량 마련을 위한 일일찻집을 송파구에서 열었다. 이 찻집에는 많은 이들의 후원이 이어졌다. 동국대 수화동아리 손짓사랑이 수화노래발표회를 열기도 하고, 라디오 방송 등에서 사연이 소개되며 후원금이 모였다. 차량을 마련하고 첫 교습소를 열자 많은 청각장애인들의 교습 신청이 이어졌다.

“상도동에서 온 한 장애인은 90번을 떨어졌다고 했어요. 응시원서를 보니 정말 틈이 없을 정도로 스티커가 빼곡했습니다. 함께 지내다보니 눈썰미는 있는 친구인데, 교본만 보면 머리가 안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스터디하고, 실제 주행도 꼼꼼히 가르쳤죠.”

이런 식으로 면허를 딴 서울지역 청각장애인들이 400명이 넘는다. 8년 가량을 진행해 2007년이 되자 면허를 필요로 하는 청각장애인들이 대부분이 면허를 따게 됐다. 이후 신청자가 줄어 드문드문 진행되는 교습소 운영에 광림사와 법륜회는 교습소를 구청에 이관했다.

해성 스님은 “많은 장애인들이 면허를 취득했고, 이를 바탕으로 현장에서 일하는 이들이 많아졌다”고 소개했다.

스님은 또 “종교간 인식을 새롭게 하기도 했다”며 “다른 종교를 가진 장애인들이 처음에는 운전교습 접수도 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종교는 개종을 해야 가르쳐주는데 혹시 불교로 개종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해성 스님은 이들에게 ‘당신이 필요할때 도움을 받았으니 다른 사람이 필요할 때 도움을 주라’고 했고, 이에 감동받은 장애인들이 각자의 교회와 성당에서 사연을 소개해 스님이 이들 종교활동에 초청받기도 했다.

신광욱 씨가 20년 도반인 해성 스님과 밝게 웃고 있다.
시각장애인 중심으로 봉사활동 전개
법륜회는 현재 시각장애인들을 중심으로 봉사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연 4회 가량 사찰순례를 진행하고 참석회원도 5~10명 수준으로 줄은 상태다.

신 씨는 “경기가 예전보다 나빠져 택시기사들의 생계문제가 커진 것도 있고, 나이 문제도 있다”고 했다. 45세에 봉사활동을 시작한 신 씨만 하더라도 현재 65세다.

“예전에 봉사자로 활동하시던 분이 나이가 들어 휠체어를 타고 봉사를 받는 분으로 돼서 나오시기도 했습니다. 아무래도 지체장애인분들은 힘 써야 할 일이 많아 시각장애인들을 돕는 데 중점적으로 나서고 있습니다.”

비록 나이가 들어 체력이 예전 같지 않지만 원력만은 그대로다. 2013년 구성된 조계종 장애인 전법단 캄보디아 성지순례에서는 시각장애인들을 한 명씩 데리고 다니며 직접 설명해주기도 했다.

“제가 봉사활동을 하지 않았으면 남는 시간에 무엇을 했을까요. 술 마시고 놀지 않았을까요. 봉사를 하고 나서 인생을 흐지부지 보내지 않으니 건강도 챙기고 보람도 찹니다.”

나이가 들어도 꾸준하게 장애인 도우미를 하고 싶다는 신 씨. 신 씨는 후배 세대들에서도 봉사에 동참하는 이들이 많이 생겼으면 한다는 말을 남기고 일터인 도심을 향해 애마의 시동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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