德治로 백성 교화한 선비… 말년에 속진 떠나

권팽로·이황 문하서 수학
국가 요직 두루 거쳐
승려와 인연 시로 남기고
에도 조예 깊은 문인

▲ 소백산 자락에 자리한 희방폭포. 구봉령은 소백산 승려 사경의 시축에 차운, 나이 50세에 소백산을 노닐며 소요(逍遙)와 은일(隱逸)의 아름다움을 누리고자 했다. 〈현대불교 자료사진〉
백담 구봉령(栢潭 具鳳齡, 1526~1586)은 시문에 능했으며 수많은 승려들과 교유하면서 이들과의 아름다운 인연을 시문으로 남겼다.

어린 시절부터 남달랐던 그의 품성은 일찍 부모를 잃었지만 의연하게 처신했던 것에서 드러난다. 조실부모한 그에게 소학의 문리를 얻게 한 것은 그의 외종조 권팽로(權彭老). 이후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의 문하에서 수학했기에 그의 학문적 연원은 튼실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비교적 평탄한 환로(宦路)를 걸었다. 퇴계의 문하에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이후(1546), 1560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를 거쳐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등을 역임했다. 1564년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한 후 수찬, 호조좌랑, 병조좌랑을 거쳐 1577년 대사간에 올랐다. 이듬해 대사성을 거쳐 이조참의, 형조참의를 거치는 동안 그의 탁월한 경륜과 지혜는 나라에 실익을 주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더구나 국조인물고에는 그의 학문에 대한 식견과 열의를 그의 총명함이 남보다 뛰어나서 글을 읽음에 눈으로 한 번 훑어보면 외우곤 하였다. 널리 백가(百家)를 섭렵하여 소상히 알고, 그런 후 다시 육경(六經)을 널리 관통하여 그 요체를 간추려 끝을 맺고, 이를 아름다운 행실로 표출시켰다고 하였다. 이미 그의 인물됨은 성동(成童, 15~6) 때부터 드러났으니 이는 국조인물고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6세에 논어를 읽었는데 밥을 먹음에는 배부름을 구하지 않고 거처함에 편안함을 구하지 않는다(食無求飽 居無求安)’고 한 대목에 이르자 감탄하여 말하기를 사람이 능히 자립(自立)하지 못하는 까닭은 배불리 먹는 것과 편안히 사는 것이 자신을 해치기 때문이다. 진실로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능히 자신의 분수에 맡기어 구함이 없다면 어떤 일인들 성취할 수 없을 것인가라고 하면서 마음을 진정하고 깊이 생각하며 되풀이하여 학습하였으므로 얻는 바가 있었다.

그가 감탄했던 구절은 논어1권에 나오는 내용이다. 공자께서 밥을 먹음에는 배부름을 구하지 않고 거처함에 편안함을 구하지 않으며(食無求飽 居無求安) 일에 민첩하고 말을 삼가며 도 있는 자에게 나아가 (시비를) 바르게 한다면 호학한다고 말할 만하다(敏於事而愼於言 就有道而正焉 可謂好學也已)”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구봉령은 밥을 먹음에는 배부름을 구하지 않고 거처함에 편안함을 구하지 않는다(食無求飽 居無求安)”고 한 내용에서 감동을 받았던 것이니 이는 그의 입지가 물질적인 풍요로움에 두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결국 그의 뜻은 학문에 있었던 셈이다.

그러므로 그가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부임했을 때에 순리로 백성의 쟁송(爭訟)을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발현했으니 이러한 사실은 국조인물고백성 중에 형제가 서로 소송을 하는 자가 있으므로 공이 순리로써 그들을 타이르니, 두 사람이 눈물까지 흘리며 머리를 조아리고 자책하면서 결국 서로 돈목(敦睦)하게 된 일이 있었다고 한 사실에서 드러난다. 백성을 덕치(德治)로 교화했던 그의 목자(牧者)로서의 자질은 일찍이 논어를 읽고 감탄했던 대목에서도 예견된 일이었다.

한때 백담(栢潭)의 아름다운 산수 경치를 사랑하여 그곳에 오두막집을 지어놓고 장차 쉴 계획을 세웠던 그의 뜻은 이행되지 못한 듯하다. 말년이 되어서야 모든 관직을 사양한 채 문을 닫고 세상 돌아가는 일에 상관하지 않았다. 다만 서너 명의 학도(學徒)들과 경사(經史)를 토론하며 속진(俗塵)을 떠나 깨끗한 삶을 추구하였다고 한다.

조선 중기의 선비들처럼 그가 교유했던 승려 수만도 수십 명에 이른다. 특별히 시문에 밝았던 그는 함께 노닐던 승려들의 시축에 수편의 글을 남겼다. 대략 그와 교유했던 승려들을 살펴보면 계선승(戒禪僧), 소백산 승려 사경(思瓊), 청량사 승려 옥징(玉澄), 영정(永貞), 삼각산 승려 보훈(寶訓), 행각승려 숭인(崇印), 백암산의 승려 경진(敬眞) 등이다.

특히 그의 영정 산인에게 주다(贈永貞山人)라는 시에는 당시 승려들 사이에서 퇴계 선생의 글을 받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 정황이 드러나는데 이는 그가 이 시의 말미에 승려들은 반드시 먼저 퇴계 선생의 묘필을 받들고 뒤에 뛰어난 것들을 구하여 이어 쓴다. 그런데 영정승려만이 미치지 못했다. 그 모습과 말이 매우 슬펐기 때문에 그 생각이 넘쳐난 것이라(山人輩必先捧退溪先生妙筆 後邀諸勝題 而貞獨無及 其色辭甚愴 故洩其思云)”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계당의 선필은 연기와 노을을 뿌려 논 듯(溪堂仙筆灑煙霞)
명산에 떨어져 머물렀던 곳이 얼마였던가(散落名山定幾多)
어찌 홀로 후에 와서 찾을 곳이 없을까(渠獨後來無覓處)
다만 눈물을 머금고 구름 언덕을 지날 뿐이라(故應含淚過雲阿)

결국 그가 영정 승려의 시축에 글을 쓴 연유는 대부분 글깨나 하는 승려들이 자신의 시축 말미에 퇴계의 글을 받은 후 다른 명망이 있는 인사의 글을 받지만 영정 스님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므로 마음에 느낌이 있어 글을 써준다는 것이니 그가 영정 스님에게 보인 성의의 일단을 드러낸 것이리라.

이밖에도 그가 소백 산승 사경의 시축에 차운하여 쓰다(次書小白山僧思瓊軸)라고 한 시에는 당나라 이백과 송나라 소식이 49세의 나이에 자극궁(紫極宮, 신선이 사는 곳)을 거닐었다는 것뿐 아니라 조선의 주세붕이나 퇴계 선생도 소백산을 주유했던 사실을 상기하였다. 다른 한편으론 자신도 산수를 소요하려는 뜻을 이백은 나이 49세에 자극궁을 노닐었고 소식 또한 나이 49세에 노닐었으며 이에 이백의 시에 화답하였다. 주 진재(주세붕, 1495~1554)와 이 퇴계(이황, 1501~1570)는 이어서 풍기 군수를 지내며 소백산에서 노닐었다. (그들은) 모두 이백과 소식의 나이 때에 아울러 시를 창수하였다. 내 지금의 나이가 또한 50살이니 그 간격이 겨우 1살이다. 노닐고자하는 뜻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른다.(李謫仙年四十九 遊紫極宮 蘇子瞻亦四十九而遊 乃和李詩 周愼齋李退溪相繼守基 來遊小白 皆李蘇之年 竝有和章 余於今年 亦隔五十僅一歲 有願遊之志故云)”고 밝혔다. 소백 산승 사경의 시축에 쓴 시 소백 산승 사경의 시축에 차운하여 쓰다(次書小白山僧思瓊軸)는 다음과 같다.

계산의 신선, 삼가여 푸른 산을 익숙히 유람하고 (溪仙愼老踏蒼)
자극궁의 맑은 유람에서 또다시 돌아왔네 (紫極淸遊又一還)
어찌 지팡이 날리며 백악을 건널까(那得飛凌栢岳)
49세 틈새를 따라 잡으리(追攀四十九年閑)

계산의 신선은 아마 산승 사경일 것이다. 그는 적선(謫仙)인 이백이나 소동파처럼 산수를 노닐던 신선이며 그가 주석한 소백산은 풍기 군수를 역임했던 퇴계선생이나 주세붕도 노닐던 곳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구봉령은 나이 50세에 소백산을 노닐며 소요(逍遙)와 은일(隱逸)의 아름다움을 누리고자 한 것이다.

이밖에도 그는 백암사에 주석했던 승려 경진과의 인연을 경진의 시축에 금약봉에서 차운하여(敬眞軸 次金藥峯韻)의 모두(冒頭)“1554년 봄에 내가 병으로 평해 온천에 가서 휴식했는데 백암산이 그 근처에 있었다. 그때에 경진 스님이 백암사에 있었다. 내가 잠시 절에서 만났는데 올해로 19년이 되었다. 경진 스님이 나를 찾아오다가 길에서 만났는데 한참만에야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말해둔다.(甲寅春 余以病往沐平海之溫泉 白山在其傍 時眞住白寺 余暫接于寺 今十九年 眞訪余而來 遇於路 久而得知故云)”라 밝혔다. 경진 스님에게 써준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해운의 깊은 곳, 백암산에(海雲深處白)
장실 스님은 그 해에 함께 웃고 얘기했지 (丈室當年共解顔)
돌이켜 생각해 보니 20년이 꿈만 같아 (回憶卄齡還似夢)
흰머리 상대하니 서로 봄이 의아하네 (白頭相對訝相看)

1554년 그가 백암온천에서 요양했던 것은 그가 별시 문과에 장원급제하기 6년 전의 일이다. 당시 경진 스님은 백암사에 있었기에 잠시 만났다는 것이니 구봉령과 경진의 교유는 1554년에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만나지 못하다가 19년이 지난 뒤에야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세월의 무상함 속에 서로를 알아 볼 수 없으리만큼 늙어 버린 것. 그래서 흰머리 상대하니 서로 봄이 의아하네(白頭相對訝相看)”라고 한 것이다.

그는 차를 즐긴 선비였다. 육우의 다경(茶經)에 오묘한 골기를 이해했다. 이런 사실은 그가 쓴 다경을 읽고(讀茶經)에서 내 다시를 읊으려하니(我欲詠茶詩)/ 이뿌리에서 상쾌한 연무가 이누나(煙霞爽牙頰)/ 다경을 읽는 것만 못하니(不如讀茶經)/ 빙설 같은 맑음, 가슴에서 일어나네(氷雪生肺膈)/ 다시는 피부와 같고(茶詩狀皮膚)/ 다경은 혈맥을 더듬네(茶經搜血脈)/ 홍점(육우)은 진실로 기이한 선비라(鴻漸信奇士)/ 핵심을 보고 모색을 남겼네(相骨遺毛色)/ 처음 읽으니 신령해진 듯하고(一讀通神靈)/ 다시 읽으니 혼이 단련되네(再讀鍊精魄)/ 이어 다시 차를 마시니(因復玉乳)/ 스멀스멀 겨드랑이에서 바람이 이누나(習習風生腋)/ 의연히 내 신선 멍에 하여(依然駕我仙)/ 상제가 사시는 청도의 달로 날아오르리(飛上淸都月)”라고 한 것에서 드러난다. 그는 다시(茶詩)을 읊으려고만 하여도 이뿌리에서 상쾌한 연무가 일어날 만큼 차의 경지를 통달했던 선비였다. 아울러 다경을 읽으면 가슴에서 맑디맑은 청량함을 느꼈던 관료였던 셈이니 그는 조선 중기의 관료 문인 중에 차의 진미를 일이관지(一以貫之)했던 선비였음이 분명하다. 아무튼 그는 다시(茶詩)와 다경(茶經)의 지경(地境)의 차이를 선명하고도 확연히 이해했던 문인이었던 셈이다.

그는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어 혼천의기(渾天儀記를 저술했고 백담문집과 속집을 남겼다. 사후 용산서원(龍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으며, 문단(文端)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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