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母列傳- ⑬ 설훈(雪訓) 스님

불화승이면서 조각 솜씨 뛰어나
1790년 용주사 관음보살상 조성
현등사 금동지장보살좌상 대표작
41년간 불화 조성·불상 개금 불사

설훈 스님이 만든 대표작인 1790년 가평 현등사 금동지장보살좌상 사진제공=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
18세기 중·후반 불교미술사에서 주목받는 작가는 설훈(雪訓) 스님이다. 스님은 주로 명산대찰(名山大刹)에 불화를 조성하면서 불상의 조성과 중수에 참여하였다. 특히, 현재 도난문화재인 서산 개심사 관경변상도는 고려불화를 계승한 작품으로, 조선후기에 조성된 불화 가운데 최고의 작품성을 가지고 있다.

설훈 스님은 기존 조각승 계초 스님, 계심(戒心) 스님, 봉현 스님 등과 달리 불화승에 속하지만, 1790년 용주사 창건 시 관음보살을 제작한 것을 보면 불교조각에서도 상당한 명성과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 설훈 스님이 수화승으로 만든 불상은 현등사 금동지장보살좌상 1점이 남아있을 뿐이다.

설훈 스님의 생애와 활동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불화의 화기(畵記)와 사찰의 연혁을 적어놓은 사적기 등을 통하여 스님의 활동 시기와 거주 사찰, 불화승 계보 등을 밝힐 수 있다. 지금까지 조사된 설훈 스님과 관련된 문헌 기록은 18건으로, 불화 화기와 불상 발원문이 11건이고, 사적기 내용 등이 7건이다.

설훈 스님과 관련된 가장 빠른 기록은 1753년에 간행된 〈숙빈상시봉원도감의궤(淑嬪上諡封園都監儀軌)〉에 남한산성(南漢山城) 화승(畵僧)으로 언급되어 있어 경기도에 거주하던 스님임을 알 수 있다. 설훈 스님은 1758년 4월에 각총(覺聰) 스님과 경기 여주 신륵사 극락보전 삼장보살도(三藏菩薩圖)를 조성하면서 명부전 시왕상을 새로 채색하고, 수화승으로 경북 의성 고운사 사천왕도 가운데 지국천왕도(持國天王圖, 홍익대 박물관 소장) 등을 그렸다. 그 후 스님은 1765년에 수화승 긍유 스님과 서울 봉은사 대웅전 목조삼세불좌상을 개금하고, 1767년에 수화승으로 충남 서산 개심사 관경변상도(현재 도난)를 조성하였다.

또한 스님은 수화승으로 1773년에 경남 합천 해인사 법보전 본존불을 개금하고, 1774년에 서산 문수사 청련암 지장시왕도을 그리는데, 지장시왕도 화기에 ‘쌍봉산인(雙峯山人) 설훈(雪訓)’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후기 경기도에 있는 쌍봉산을 찾아보면, 1875년에 작성된 ‘수원군쌍봉산화운사기(水原郡雙峰山華雲寺記)’가 있어 설훈 스님이 화운사에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문수사 청련암 지장보살도의 뒷면 배접지 안쪽에서 발견된 편지 6점은 당시 불화 조성과 스님들의 활동에 관한 중요한 자료이다.

설훈 스님은 1776년에 수화승으로 정순(定淳), 영우(永宇) 등과 강원 홍천 수타사 지장보살도(地藏菩薩圖)를 조성하고, 1780년에 남양주 봉선사 대웅전 불상을 취허환열(鷲虛幻悅) 스님, 용봉경환(龍峯敬還) 스님, 상겸(尙謙) 스님 등과 개금하였으며, 1783년에 편수(片手) 법현(法賢) 스님과 보성(寶性) 스님이 남양주 불암사 범종을 칠 때 증명으로 참여할 정도로 명성과 지위가 높았다.

스님은 1784년에 수화승 유성과 경북 김천 직지사 천불전 불상을 제작하고, 1785년에 함남 이원군 동면 복흥사의 삼존불상과 불화(靈山會上圖, 甘露圖, 神衆圖)를 혜청(惠淸) 스님, 원유(圓宥) 스님과 조성하였다. 설훈 스님은 1790년에 수화승으로 5월에 가평 현등사 금동지장보살좌상과 신중도를 조성하고, 8월부터 9월까지 경기 화성 용주사 대웅전 관음보살상을 제작하였는데, 북한산성(北漢山城) 도총섭이었던 용주사 등운(等雲) 주지스님이 1825년에 작성한 〈용주사사적기(龍珠寺寺蹟記)〉 중 ‘본사제반서화조작등제인방함(本寺諸般書畵造作等諸人芳啣)’에 여러 승려장인 가운데 설훈 스님만 유일하게 당호가 적혀 있다. 또한 설훈 스님은 1792년에 남양주 흥국사 시왕상과 시왕도 조성에 증명(證明)으로 참여하고, 1794년에 경북 산청 대원사 신중도를 제자들과 그렸는데 이 기록이 스님의 마지막 기록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발원문과 사적기를 중심으로 설훈의 생애를 살펴보면, 스님은 당호가 관허당(寬虛堂, 觀虛堂)으로 1720년대 후반에 태어나 각총 스님에게 불화를 배우고, 1750년대 후반부터 불화의 조성과 불상의 중수·개금을 주도하였다. 특히, 그는 1780년대 범종을 고쳐서 만들 때 증명(證明)으로 참여할 정도로 당시 불교계에서 명성과 지위를 가졌다. 또한 스님은 1790년에 현등사 금동지장보살좌상과 정조가 발원한 용주사 관음보살상을 만들 정도로 당대 최고의 불화승이자 조각승이다.

설훈 스님은 이 시기에 활동한 호남의 계초 스님과 계심 스님 등과 다른 불화승 계보를 따르고, 화성 쌍봉산에 거주하면서 경기도를 중심으로 활동한 작가이다. 설훈 스님의 계보는 각총(-1735-1758-) → 벽하(-1755-1758-), 설훈(-1753-1794-), 경환(-1764-1803-), 상겸(-1780-1790-) → 성윤(-1770-1790-), 성일(-1771-1790-), 연홍(-1775-1791-), 상훈(-1777-1792-)으로 이어진다.

설훈 스님과 가장 밀접한 불화승은 경환(敬還, 敬煥, 景煥)스님이다. 경환 스님의 당호는 용봉당(龍峯堂)으로, 1764년에 건원릉(健元陵) 정자각(丁字閣) 중수와 1776년에 영조(英祖) 원릉(元陵) 조성소 화승(畵僧)으로 참여하였다.

경환 스님은 1780년에 수화승 설훈과 남양주 봉선사 대웅전 불상을 중수·개금하였는데, 시주질에 묘적암(妙寂庵) 화주(化主)로 적혀 있다. 묘적암은 여러 지역에 있었지만, 경환이 경기도에서 활동한 것을 보면 남양주 묘적암에 거주한 불화승임을 알 수 있다.

경환은 1788년에 상겸 등과 경북 상주 남장사 불사에 참여하여 ‘불사성공록(佛事成功錄)’에 경성양공(京城良工)으로 언급되었다. 그는 1790년에 수화승 설훈 스님과 가평 현등사 금동지장보살좌상과 신중도를 제작한 후, 1794년부터 1796년까지 이루어진 화성성역에 화공(畵工)으로 참가하고, 1803년에 안산 쌍계사에 봉안된 도성암 현왕도 조성에 증명(證明)을 맡았다.

설훈 스님이 수화승으로 만든 대표적인 작품은 현등사 금동지장보살좌상이다. 이 보살상의 바닥에는 조성발원문이 빽빽하게 음각되어 있다. 발원문에 의하면 지장보살상은 1790년 5월에 운악산 현등사 지장암에 봉안하였다. 이 지장보살이 봉안된 지장암은 18세기 중반에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와 〈범우고(梵宇考)〉에 “현등사와 지장암은 운악산(雲岳山)에 있다”고 적혀 있고, ‘운악산현등사사적(雲岳山懸燈寺事蹟)’에 “절의 동쪽에 고개를 하나 넘으면 암자가 있는데 원통전(圓通殿)이다. 오랫동안 비워 놓았는데, 4월 보름날 저절로 불이 났다. 동으로 고개를 넘으면 지장전(地藏庵)이 있고, 이 암자는 아직 있다”라는 내용을 근거로 1823년 4월까지 암자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871년에 작성된 〈가평군지(加平郡誌)〉에는 “현존 현등사(懸燈寺), 고지(古址) 지장암”으로 적혀있어 1823년에서 1871년 사이에 폐사(廢庵)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금동지장보살좌상은 조성발원문에 의하면 백련명률(白蓮明律)이 화주(化主)가 되어 여러 시주자의 후원을 바탕으로 관허설훈(寬虛雪訓), 용봉경환(龍峯敬還), 혜청(慧淸), 성일(性一), 성윤(性允), 쾌신(快信)이 형태를 만들고, 전인강(全仁江)이 주물하였으며, 표덕연(表德蓮)이 표면을 처리하였다. 지금까지 조선후기에 제작된 금동불은 1623년 남양주 수종사 석탑에서 발견된 금동불과 1790년 가평 현등사 금동지장보살좌상 밖에 조사되지 않았다.

금동지장보살좌상은 높이가 45㎝로, 조선후기 제작된 보살상 가운데 중소형에 속한다. 보살상은 얼굴을 앞으로 약간 내밀고 상체를 바르게 세운 자세로 결가부좌하고 있다. 보살상은 머리에 두건(頭巾)을 쓰고, 살집 있는 얼굴에 눈꼬리가 약간 위로 올라가 살짝 뜬 눈, 삼각형의 코, 살짝 미소 짓는 입, 화형(花形) 귀걸이를 단 귀를 가지고 있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을 모아 둥근 보주(寶珠)를 쥐고, 왼손은 손가락을 곧게 편 상태로 무릎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바깥에 걸친 두터운 대의(大衣)의 끝자락이 오른쪽 어깨에 수직으로 커튼처럼 늘어지고 팔꿈치와 복부를 지나 왼쪽 어깨로 넘어가고, 반대쪽 대의 자락이 왼쪽 어깨를 완전히 덮고 수직으로 내려와 복부에서 편삼과 접힌 후에 결가부좌한 다리를 덮고 있다.

지장보살상의 등 뒤에 두건자락이 숄을 두른 듯이 양 어깨를 완전히 덮고, 왼쪽 어깨에 V자형의 옷자락이 길게 늘어져 있다.

이와 같이 설훈 스님이 제작한 불상은 다른 조각승이 만든 불상과 달리 재료로 금속을 사용하고, 어깨가 당당하고, 무릎이 높이와 너비가 알맞아 안정감이 있다. 이는 설훈 스님이 불화를 그린 불화승이라 인체 표현에 사실성이 있고, 불상 표현에 얼굴을 강조하던 기존 조각승과 다른 조형 감각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설훈 스님이 그린 1790년 가평 현등사 신중도 사진제공=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
뿐만 아니라 타원형의 얼굴에 눈 사이가 좁고, 이목구비가 사람과 비슷하여 자연스럽다. 착의법에서도 현등사 지장보살좌상은 오른쪽 어깨에 걸친 대의자락이 수직으로 접힌 반면, 계심 스님이 1779년 제작한 온양민속박물관 목조대세지보살좌상이나 봉현 스님이 1790년에 조성한 화성 용주사 대웅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오른쪽 어깨에 U자형의 대의 자락이 길게 늘어져 도식적으로 표현되었다.

하반신에 걸친 대의자락도 지장보살좌상은 18세기 전반에 활동한 진열이 제작한 불상과 같이 안쪽의 옷자락이 넓게 펼쳐지고, 왼쪽 무릎에 접힌 소매 자락이 17-18세기에 제작된 기년명 목조불상이나 석조불상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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