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주인공에다가 모든 걸 포기해서 일임시키라!

이론으로 팔만대장경을 달달달달 외우고
위로 꿰고 옆으로 꿴다 하더라도
목마를 때 시원한 물 한 그릇 마시는 것만 못합니다.

대승이 옳은지 소승이 옳은지
질문 대승불교 교단과 소승불교 교단 사이에는 교리의 면에 있어서는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하더라도, 동일한 불제자로서 수행의 기준이 다르고 수행의 목적이 다름으로 인하여, 각 교단의 정당함을 주장하기 위하여 상대방을 배척하며 이단시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차이점을 마음공부를 해 나가는 저희들의 입장에서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가르침 부탁드리겠습니다.

답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올바른 길이 무엇인가. 비유해서 한마디 하겠습니다. 오조 홍인 선사가 『금강경』 강의를 하시니까 육조 스님께서 그 대답으로 이렇게 말했죠. “불성이 스스로 청정함을 어찌 알았으리까.” ‘내 마음이 내 불성을 어찌 알았으리까.’ 하는 거나 똑같습니다. “불성이 스스로 끄달리지 않음을 어찌 알았으리까.” 걸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일체 모든 생활이 걸리지 않음을 어찌 알았으리까.’ 이 말입니다. 그다음에 “불성이 스스로 일체 만법을 갖추어 가지고 있는 줄 어찌 알았으리까.” 요건 내가 알아듣기 쉬우라고 조금 더 보태서 말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불성이 스스로 만법을 들이고 내는 줄 어찌 알았으리까.” 이랬습니다. 그것을 종합해서, 즉 이 세상 이치를 종합해서 말하자면 삼천대천세계 우주 천하가 다 근본이 있습니다. 그 근본이 어디에 직결돼 있느냐. 마음의 근본에 직결이 돼 있다 이겁니다. “천지의 근본은 마음의 근본이니라. 태양의 근본도 마음의 근본이요 시공이 없이 돌아가는 이치의 진리는 인간의 마음의 근본으로 돌아가느니라.” 이랬습니다.

이 마음공부를 하는 데는 대승, 소승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국민’ 하면 잘살고 못사는 사람이 따로 있지 않듯이 ‘사람’ 하면 그냥 사람입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사람이라고 하죠. 그런데 좀 전에 육조 스님 말씀에 나왔듯이 우리 참인간의 마음, 여러분이 지금 생활하는 그 마음, 청정한 마음이라는 것은 개별적인 어떠한 대(對)가 없는 것을 말합니다. 한마음을 청정한 마음이라고 그러죠. 그게 뭔지 일러 드리겠습니다.

‘공이 색이요, 색이 공이니라.’ 한 것은 무슨 뜻인가. 고정됨이 없이 찰나 생활을 하는 것을 공했다고 하는 겁니다. 어저께도 그런 말을 했습니다마는 아내가 “여보, 인제 오세요?” 하면 남편이 됐습니다. 그랬는데 아이가 “아빠!” 그러고 들어오니까 남편 됐던 건 없어지고 금방 아버지가 됐습니다. 그런데 “얘, 아비야! 인제 오니? 나 좀 보자.” 하거든요. 그래서 얼른 또 어머니한테로 가니까 고만 아들이 돼 버렸습니다. 이렇게 화하는 세상입니다. 화해서 찰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고정되게 보는 거, 고정되게 듣는 거, 고정되게 가고 오는 거, 고정되게 먹는 거, 고정되게 만나는 게 있습니까? 이것이 고정되게 머물러져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러니 이것이 진리고 도(道)요, 길이고 참선이고 참입니다. 이 공부하는 데는 대승이다 소승이다 이런 게 없습니다. 왜? 간편하게 얘기합시다. 상을 차려 놓는 데에 접시도 있고 종지도 있고 사발도 있고 대접도 있고 큰 접시도 있습니다. 손님들이 많이 오시겠으니까 상에다가 온통 다 차려 놨습니다. 그런데 거기 대승, 소승이 있을까요? 여러분! “종지는 안 쓸 거다. 대접만 쓸 거다.” 이렇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종지만 써야겠다. 이게 옳다.’ 이런다면 종지만 가지고 어떻게 상을 차리며 ‘대접만 쓸 거다.’, ‘큰 그릇만 쓸 것이다.’ 한다면 큰 그릇만 가지고 어떻게 쓸 것이며 ‘접시만 쓸 것이다.’ 한다면 접시만 가지고 어떻게 쓸 것입니까? 이걸로 비유합시다.

일체 만법을 일심으로 들이고 낼 때에 ‘줄지도 않고 늘지도 않느니라.’ 하는 것은 걸리지 않게 몽땅 버려서 몽땅 갖추어 가지고 있게 만드는, 실천궁행하는 법입니다. 실천이 아니라면 부처님이 정법을 이렇게 가르치지 않으셨을 겁니다. 이론으로만 경을, 팔만대장경을 달달달달 외우고 위로 꿰고 옆으로 꿴다 하더라도 목마를 때 시원한 물 한 그릇 마시는 것만 못합니다. 이것을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살기 위해서 먹느냐, 먹기 위해서 사느냐?” 이거는 이차적인 문제죠. 진짜 배고프고 정말 목마르고 갈증이 날 때는 냉장고 문을 턱 열곤 한 그릇 쭉 마시는 겁니다. 그런 뒤에야 죽고 사는 것이 생각나는 것이니 그건 이차적이죠.

목마를 때 그냥 마시는 것이 그대로 찰나의 행이요, 정법이요, 중용입니다. 우리 인간들 사는 것이 바로 불법이요, 참선이며, 그대로 행선입니다. 아주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는데, 거기 무슨 이론이 들어갑니까? 거기 무슨 이의가 붙습니까? 비행기가 날아가는데, 프로펠러가 막 돌아가는데 거기 먼지 앉을 게 있습니까? 이것을 잘 판단해서 여러분이 자기 몸과 가정과 사회, 국가는 물론 세계, 우주까지도 한 손에 넣고 자유자재할 수 있는 원통력을 길러서 원심력으로써 행을 하셔야 합니다. 내가, 즉 말하자면 ‘아내다’ 하면 벌써 가설이 된 거고 ‘자식이다’ 하면 가설이 된 겁니다. ‘남편이다’ 하는 것도 가설이 된 겁니다. 전선의 가설이 됐으니까 전기 스위치를 올리면 거기까지 다 불이 들어오거든요. 이것이 바로 만법의 근원입니다. 그렇게 간편한데도 불구하고 이유를 따지고 이게 옳으냐, 그르냐 하는 시비가 왜 붙습니까?

불법과 세간 법을 둘 아니게 융합하려면
질문 저는 진리의 차원에서 볼 때 과연 인간의 정치라는 것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또한 부처님 법에 근거해서 인간의 그 정치 사회가 조직되거나 구성되어질 수 있는지, 그러니까 부처님 법과 인간 사회의 법이 둘이 아니게 융합될 수 있는 길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 그게 물론 둘이 아니죠. 다 둘이 아니건만 모든 사람이 막이 막혀서 정신계를 쪼금도 생각 안 하거든요. 그리고 자기가 자기를 막아 놓고 생각을 못 하니까 일이 그릇될 수도 있고 잘될 수도 있고 이런 거죠. 그래서 이런 말을 했죠. “옛날에 지구의 생명들을 물로 죽게 하고 불로 죽게 했지만 인제는 너희들의 마음먹는 대로 되느니라. 마음이 자기를 죽이고 자기를 살게 하느니라.” 이랬단 말입니다. 그런 시대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을 알아야 상대의 마음을 알거든요. 그래서 “내 마음부터 알아라. 그래야 남의 마음도 알 수 있고 일체제불의 마음도 알 수 있느니라.” 그럽니다. 그러니까 둘이 아니죠, 전부가. 그런데 우리들의 법은 그냥 법이라 하고 막 떠들고 그러거든요. 그런데 부처님의 법은 공법이에요. 이 몸 하날 가지고도 공법이고, 모두 전체가 공법이고, 공생이고 공심이고 공체고 공용이고 공식이에요, 전부가. 그렇기 때문에 하나도 그르게 돌아갈 수가 없는데, 사람들을 보세요. 이렇게 마음공부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들 안 하죠. 그런데 옛날에는 국사로다가 스님을 청했는데 선지식, 즉 말하자면 마음과 근본, 그것을 깨치셔서 이끌어 가는 그런 분이라야 바로 국사로 모실 수가 있었던 거죠. 그렇게 국사를 모시고 살 때도 있었어요.

그랬는데 지금은 명예, 이익, 이런 것만 가지고선 모두 대통령을 하려고들 하시니깐 문제가 있는 거죠. 그리고 어두운 사람들은 다 그저 자기의 안위를 위해서 “아, 그 사람이 돼야 우리한테도 좋고 그렇다.” 하고 찍거든요, 또. 전체를 보질 않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일들이 생기는 거를 인제 때에 따라서 우리들이 생각나는 대로 자꾸자꾸 관하고 하면, 그대로 또 좋게 벌어질 것입니다. 우리들의 생각 살림에 따라서 다 벌어지고 헤어지고 하는 거니까요.

몸과 마음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질문 얼마 전 교통사고로 다리를 많이 다치게 되어 병원에 입원하고 있습니다. 저도 나름대로 불교에 관심이 많아 불법의 이치에 대해서 어느 정도 터득을 했다고 여겼는데, 막상 내 몸이 불편하게 되니 괜히 짜증도 나고 신경질적이 되면서, 내 몸과 마음을 스스로 제어하기가 힘들어집니다. 이제는 정말 내 몸과 마음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습니다.

답변 우리 수행자들은 그런 이치를 알아도 실질적으로 내가 그렇게 해 보지 않고는 그 도리를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 아기가 되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는 거와 모르는 거를 다 그 주인공에 일임시키면서 자기는 자기대로 거길 믿고 거기에 감사하고, 들이고 내는 것도 거기다가 들이고 내야 된다 이겁니다. 그러는 동시에 내 이 육의 기능은 모든 것을 거기에서, 즉 말하자면 감독이 되는 거죠, 모든 게. 기능의 감독자로서 전부 응용하듯이. 그러니까 내가 인체 안에서 모든 생리적인 작용을 하는 거를 다 관리인으로서 하다가 보면 바로 참 제작자가 되는 거죠. 배우가 되는 게 아니라. 그 배역으로 이 안에서 생리적인 작용을 하는, 즉 말하자면 곤충이 다 나한테는 호법신장들이 되는 거죠. 그래서 팔만 사천 털구멍도, 업보가 되려면 그 털구멍 하나에 한 생의 업보가 된다 하지마는 그것이 호법신이 된다면 일분일초도 안 돼서 자기가 항상 다니면서 자길 보호하게 되죠.

그렇기 때문에 자기 마음이 그렇게 그 주인공에 모든 걸 몰락 일임시켜 버리고, 잠재해 있는 자기 실상이 지금 현재 의식과 계합이 된다면 그렇게 좋은 보물을 얻을 수가 없는 거죠. 그럼으로써 일체 만법을 자기 마음대로 응용하고 참, 하늘과 땅과 상응하면서, 모든 일체 유생 무생과 다 상응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둘로 보질 않고 하나로서 다 작용을 할 수 있는 거죠. 그러니까 이 몸 안에 들어 있는 곤충의 생명이나 내 큰 생명이나 둘이 아니죠, 하나하나가. 그러니까 겁낼 것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겁을 내기 때문에 일임해도 진짜 되질 않지, 겁을 내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믿는 게 되거든요. 진짜 자기 이 육신마저도 주인공에다가 내버리는 격이니까. 그러니까 “거기다 던져라, 던져라.” 하는 거죠. “몰락 던져라. 던지면 건져진다.”
그러니 업보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자와 부가 둘이 아니고, 즉 말하자면 악과 선이 둘이 아니죠. 이게 전부 해말갛게 이렇게, 연기가 같이 돌아가는 것처럼, 에너지가 같이 돌아가는 것처럼, 구름이 같이 돌아가는 것처럼 이렇게 돌아가고 있거든요, 사람의 마음들이. 생각 내기 이전 마음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럼으로써 그거를 조절을 하는 거는, 빼 쓰고 잠그고 하는 거는 마음, 바로 지금 내는 마음, 이거죠. 그것을 조절하려면 나도 물질이기 때문에, 작용하는 그림자기 때문에 그 근본적인 참나에게 모든 걸 일임하는 거죠. ‘네가 형성시켰고, 네가 움죽거리게 했고, 네가 생각나게 하는 거니까 네가 알아서 해라!’ 하고 탁 맡겨 버리세요. 그리고 요구하는 것도 거기다 요구를 하고요. 감사하는 것도 전체니까, 전체가 돌아가는 거니까 감사해도 거기 하나만 감사하면 전체가 다 감사를 주고받고, 함이 없이 우주간 법계에서도 다 상응하고 있죠.

그렇기 때문에 학술적으로, 이론적으로 ‘이것이 이렇다 이것이 이렇다’ 이럴 필요가 없는 거죠. 팔만대장경이 이 세상 돌아가는 진리인데, 어디서 또 찾겠습니까? 항상 날마다 보고 있는데. 불교가 따로 있고 생활이 따로 있어서는 절대 안 되죠. 불교가 생활이고, 생활이 불교고, 종교가 생활이니까. 내가 근본이고, 내가 원인이 되고, 내가 바로 화두고, 나라는 존재가 있기에 모든 존재가 있는 거지, 나라는 존재가 없다면 모든 존재가 어디 있겠어요? 그러니까 여러분도 자기 자신의 모두를 갖다가 포기하고, 포기하되 그냥 포기하는 게 아니라 자기 주인공에다가 모든 걸 포기해서 일임시키라 이겁니다. 당신께서 형성시킨 거니까. 기계를 하나 만들어 놨다면 기계 만든 사람이 더 잘 고치지, 기계 안 만든 사람이 더 잘 고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내 육신이 기계라면 기계 만든 사람한테 모든 걸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린 재밌는 공부 하는 겁니다, 이게. 아주 재미있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병 증세라든가 이런 걸 가지고도 벌써 ‘어이쿠, 이건 고치지 못하는 병이라는데….’ 하면 벌써 이거 그냥…. 병원에서도 전체 10%라면 3%밖에는 자기가 책정을 할 수 없답니다. 그러니깐 7%를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면 고개를 꺄우뚱꺄우뚱하다가, 자기가 의사로서의, 박사로서의 체면도 있으니까, 무슨 병이다 이러곤 내놓는다는 얘깁니다. 우리같이 이렇게 공부한 사람이라면 그게 무슨 병이다 그러더라도 ‘아이, 그까짓 거….’ 이렇게 하지만, 딴 사람이 어디 그럽니까? ‘아이고, 이 병에 걸렸으니 인제 큰일 났구나. 시한부 인생이로구나.’ 하고선 낙담을 하고 마음으로써 그렇게 될 때, 그 병이 그냥 그대로 되는 겁니다, 그 병이. 막 바로 그 병이 그냥 되는 거예요. 이게 악성이다 이러더라도 ‘이거는 주인공이 다 해 놓은 거니까 악성이고 나발이고, 없다! 당신만이 할 수 있는 거다!’ 한다면 그냥 악성이고 뭐고 없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게 다 공부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이 공부 좀 할 만한 사람들은요, 그냥 공부시키느라고 몸도 일부러 아프게도 하고 일부러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기도 하고 이런다고요. 그러니 그 재료를 갖고 열심히 공부해 보세요.

수행은 누가 하는 것입니까?
질문 불교인이면 누구나 배워서 알고 있는 삼법인(三法印) 중에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뜻이 ‘제법에는 이름하여 붙일 것이 없다.’ 하는 뜻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제법에 이름하여 붙일 것이 없다면 오늘 수행은 누가 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왜 이 공부를 그렇게 해야 됩니까. 또 ‘나’라고 할 것이 없다면 업은 어디에 붙은 것입니까? 그 뜻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답변 이 얘길 항상 합니다만, 여러분이 찰나찰나 아버지 노릇 하고, 엄마 노릇 하고, 자식 노릇 하고, 형제 노릇 하고 그러죠? 그렇게 찰나찰나 생활하며 돌아가되 찰나찰나 그렇게 많은 모습으로, 천차만별로 돌아가는데 어떤 노릇 할 때 꼬집어 나라고 할 수 없으니 없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게 돌아가는 그 자체가 바로 초월해서 돌아가니까 함이 없이 한다는 것이죠.

아버지가 될 때에 나라고 하겠습니까, 남편이 될 때에 나라고 하겠습니까, 자식이 될 때에 나라고 하겠습니까. 나라고 할 것이 없이 사이가 떨어지지 않고 찰나찰나 나투며 화해서 돌아가니까, 나라는 걸 이름해서 세울 게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공했노라. 나는 없노라. 나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노라. 나는 한 일이 없노라.” 하는 겁니다. 또 나는 여러분한테 설법한 일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건 왜냐하면 여러분이 생활 속에서 쳇바퀴 돌아가듯 남편 노릇 했다, 자식 노릇 했다, 아버지 노릇 했다 하면서 순간순간 돌아가는데 어떤 거 할 때에 남편이 했다고 그러고, 어떤 거 할 때에 아들이 했다고 하겠습니까. 모든 게 그렇게 돌아가니 나라는 게 너무 많은데, 그냥 아버지 노릇 하고, 남편 노릇 하고, 자식 노릇 하고, 사위 노릇 하고, 친구 노릇 하면서 여여하게 돌아가는데 어찌 붙을 게 있겠습니까.

공해서 없다는 거를 알면 붙을 게 없을 것이고, 천차만별로 바깥으로 끄달리고 ‘내가 있다, 내가 했다, 내가 줬다’ 하면서 ‘나, 나, 나’ 이러고 돌아가면 그냥 매사에 걸려서 돌아가죠. 여러분이 음식을 먹고 소화를 잘 시켜서 먹는 대로 소화가 잘되면 그대로 여여한 거고, 어떠한 거든지 욕심을 내고 먹으면 체해서 소화가 제대로 되지 않고 대변이 제대로 나가지 않으니 걸려서 죽습니다. 그거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마음을 잘 써서 소화가 잘되면 걸림 없이 돌아가고, 모든 걸 재료로 알고 실천을 해서 체험을 한다면 마음의 발전이 되고, 지혜로운 마음이 생기고, 과학적인 문제가 거론되고, 창조력이 생깁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런 마음이 없다면 내내 걸려서 무심의 50% 정신세계는 모르고 물질세계만 알아서 절름발이로 살게 되는 겁니다.

지금 시대는 정신세계가 아니라면 안 됩니다. 정신을 뺏기고 정신을 뺏어서 사는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꼭 육으로 잡아먹혀야 잡아먹히는 게 아니거든요. 정신을 뺏어 먹고 사니까 정신을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 정신 공부를 해야 된다는 얘깁니다. 그러니 궁금해하고 질문하는 그 자체를 생각해 본다면 수행을 누가 하는지, 내가 없으면서 내가 있는 도리를 알게 될 것입니다. 궁금한 그것마저 맡겨 놓아 한번 본인 스스로 체득해 보시기 바랍니다.

몸을 함께 수련하면 효과적일 것 같은데
질문 한마음 공부는 정신적인 공부라고 볼 수 있는데요, 사람 몸은 육체와 정신이 공존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육체적인 단련으로서 단전호흡이라든지 그런 공부를 병행하면 좀 효과적인 공부가 되지 않을까요?

답변 안 됩니다. 단전호흡이라는 것은 육체에 기를 모으는 겁니다. 그래서 육체를 좀 더 돕자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육체를 돕는 거지 어떠한 정신을 돕는 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잘못되면 머리로다 기를 빼지 못합니다. 넣으면 빼야 되거든요. 빼지 못한다면 그냥 정신분열자가 되기도 합니다. 머리로다가 열이 모이면 그냥 피를 토하게 되고 또 정신분열이 되고 그러죠. 이런 거를 무척 많이 봤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도 좋지마는 한데 모으는 거를 어차피 하려면 마음을 모으지, 단전을 해서 기를 모으지 말라 이거죠.

모든 것은 마음에서 병이 나는 거거든요. 그냥 어디고 마음을 내놓으라고 그런다면 내놓을 거는 없지만, 내놓을 게 없기 때문에 그것은 무궁무진한 거죠. 그런데 단전을 해서 잘못돼 가지고 온 선생님들을 많이 봤습니다. 우리 조카 하나도 장교거든요. 그런데 머리로다가 열이 나서 그냥 여기가 벌겋게 돼서 인제는 작업도 못하겠다고 그러더군요. 우리가 밥을 먹고도 대변을 못 누면 부작용이 생기죠? 그와 마찬가집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하기가 어렵다는 문제가 있죠.

그러니 우리가 평상시에 그대로 컴퓨터에다, 그전에 과거에 입력이 된 컴퓨터에다가, 주인공이라는 게 바로 그거니까 ‘주인공! 나를 넘어트린 것도 너니까 나를 일으키는 것도 너다.’ 그러고, 일으켜졌으면 ‘감사하다.’, 일으켜지지 않았으면 ‘일으켜지게 하는 것도 너다.’ 하고 이렇게 편리하게 맡겨 놓으세요. 이렇게 사는 방법이 얼마나 편리합니까? 그런데 그거를 뭐 단전을 한다 하고 구부리고 앉아서 그렇게 해야만 되겠습니까, 이렇게 바쁜 세상에? 일분일초가 아쉬운데 말입니다.

그리고 참선이라는 것도 말입니다, 가서 일하는 것도 참선이요, 먹는 것도 참선이요, 누운 것도 참선, 자는 것도 참선 아주, 사랑하는 것도 참선, 아, 모두 참선 아닌 게 없는데, 모두들 절에 간다면 무슨 멸치 꽁다리도 먹지 말아야 하고, 고기도 먹지 말아야 하고, 남편하고 자지도 말아야 하고, 뭐 목욕재계해야 하고, 아침에 또 백팔 배를 해야 한다고 하면서, 애들 어른 할 것 없이 죄 굶주려 놓고는 그냥 가는 거야, 저 혼자. 허허허. 이게 가정을 이룩하는 부부입니까. 가정을 이룩하고 살아나가는 게 그것이 바로 종교라는 거를 왜 모르는지….

“서로 다복하게, 아침에 일찍 나가는 애들한테도, 도시락을 싸 주더라도 그렇고 안 싸 주더라도,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듯이 부드럽게 해 줘라. 아무리 나쁘게 하더라도 부드러운 말을 해 주고, 평등한 마음으로 웃으면서 받아들여 줄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길러라.” 이겁니다. 그럼으로써 자식도 잘못 빗나가지 않고, 뿌리를 길러 주기 때문에 그 가지나 이파리는 왕성하게 될 것이다 이겁니다. 사람은 애나 어른이나 그냥 따뜻한 데로 고이게 마련인데 이것은 그저 만나기만 하면 “어이구, 너 어디 갔다 왔니?” 이러고 “아, 왜 이렇게 늦었어?” 이러면서 그냥…. 남편도 그렇고, 조금만 어디 가서 저거 해도 그냥…. 좀 더 사랑하고 믿는다면 잘못된 일이 있더라도 여기다 맡기세요, 잘못되지 않게. 주인공은 둘이 아니니까.

가설이 돼 있지 않습니까. 아, 가설이 돼 있는데 무얼 믿지 못하겠습니까? 가설이 돼 있는데 이 주먹 안에서 어디 가겠습니까? 이 전기 가설 돼 있듯이 가설이 돼 있는데 말입니다. 그쪽 주먹 안에서도 가설이 돼 있고, 이쪽 주먹 안에서도 가설이 돼 있습니다. 그런데 어디 가겠습니까, 그게? 우린 자가발전소거든요. 그러니 항상 그렇게, 조금 못 미더워도 ‘주인공만이 빨리 오시게 할 수 있어. 당신, 빨리 와.’ 하면 어딘가 모르게 빨리 가고 싶어서 허둥지둥 온다는 거죠. 허허, 그게 자력의 통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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