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과 현대미술- ⑬ 빌 비올라(Bill Viola)

일상에서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여러 가지 요소들 중에 영상의 발전은 생각의 방식을 바꾸어 놓았다고 볼 수 있다. 이제는 영상의 홍수 속에 생각의 기능마저 중독된 듯이 무감각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영상기술의 발달과정에서 예술적 영상영역은 오래되지 않았다. 백남준이 시도한 예술에서의 영상작업들은 짧은 시간에 많은 파장을 불러일으키며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예술의 영역을 각인시켰다.

백남준 비디오 작품 설치 도우며
영상예술 관심… 日 선불교 배워
정지된 듯 보이는 영상엔 변화가
반복 영상 통해 순환의 의미담아
작가 특유의 깊은 사유세계 경험

빌 비올라(Bill Viola, 1951~, 미국)는 젊은 시절 백남준의 작품설치를 도와주며 영상예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비올라는 백남준의 영상예술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새로운 개념을 형성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영상예술은 기존의 회화나 조각, 설치, 행위예술과는 차별화 되며 영상기술을 통한 정신의 다양성을 보여주고자 하고 있다. 과학의 발달은 영상을 인위적으로 조작하여 자신이 원하는 영상을 현실과 관계없이 만들어 낼 수 있다. 즉, 가상의 영상을 통하여 인간의 생각과 경험을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2000년 프랑스 파리에 있는 퐁피듀 센터에서 비올라의 삶과 죽음이라는 영상작품을 처음 접하였을 때 깊은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 필자 역시 영상예술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차에 그의 작품은 필자를 다시 회화로 복귀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에 영상예술의 가치와 개념을 새롭게 도입한 비올라의 작품은 더 이상 영상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의 길이 보이지 않는 하나의 커다란 벽처럼 느껴졌던 기억이 있다.

그의 영상은 아주 단순하다. 하지만 너무나 철학적이며, 선(禪)적이다. 그의 영상에 자주 등장하는 물은 인간 내면의 심연을 상징한다. 내면의 깊은 울림은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내면의 바다에는 어떠한 것도 모두 수용한다. 물은 외부의 힘에 반응하여 파장이 일어나지만 시간이 흐르면 파장의 흔적은 사라지고 원래의 물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모든 것은 순간의 작용이다. 그 순간이 연결되며 시간성을 만들어 내고 그 시간의 흐름에서 과거, 현재, 미래라는 생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흔적이 사라지며 그 시간은 어디로 사라지는가?

젊은 시절 그는 일본에 1년 이상을 체류하며 선불교에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이는 이후 자신 작품의 철학적 배경이 된다. 비올라가 일본에 머무르며 경험한 것들은 시간의 흐름이다. 하루라는 시간을 자신이 살았던 미국에서 느끼고 경험하는 부분과 일본에서 머물며 체험하는 시간이 다르게 느껴진 것이다. 그에게 중요한 경험이며 새로운 인식의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왜 일까? 어디를 가나 주어진 시간은 같은데 장소에 따라서 느껴지는 시간은 다를까?

필자가 처음 선을 하던 경험이 생각이 난다. 대학교 3학년 당시 처음 접한 좌선은 왜 그리 시간이 가지 않는지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처음에 30분을 앉아 있는데 30시간처럼 느껴진 적도 있다. 아마도 비올라가 처음 좌선을 경험했을 때도 이와 같지 않았나 추측해 본다.

이러한 체험은 그의 작품에 그대로 반영이 된다. 많은 평론가들은 그의 작품을 평가할 때 ‘느림의 미학’을 이야기 한다. 그의 작품들은 정지된 듯 보이나 변화한다. 변화하는 듯 보이나 변화하지 않는다. 느리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현실에서 우리의 삶은 매우 빠르게 변화한다. 변화에 적응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변화하는 현상 속에서 나 홀로 느리게 갈수 있는가? 즉, 다시 말해 빠르고 느리고의 시간적 차이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빠른 것은 좋지 못하고 느린 것은 좋다고 한다면 이것도 분별이다.

과학기술에서는 속도를 더 높이기 위해 많은 기술자들이 연구를 하며 시간의 효율성을 찾아가고 있다. 반대로 수행자들은 천천히 가라고 한다. 그래야 많은 것을 보고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경우도 많다. 과연 그럴까? 필자의 짧은 소견으로 시간성과 생각의 깊이는 별로 관계성이 없어 보인다. 예를 들면 깨달음에 이르는 데에는 수행의 시간이 별로 관계가 없어 보인다. 예술가도 많은 작품을 하고 오랜 시간 그린 작가가 좋은 작품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근거는 없어 보인다. 즉,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나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은 시간성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력과 집중력의 문제라고 생각해 본다.

▲ 빌 비올라의 작품 ‘Five Angels for the Millennium, 2001, -Ascending Angel’〈사진 왼쪽〉과 ‘Five Angels for the Millennium, 2001- Departing Angel’〈사진 오른쪽〉의 한 장면. 우리의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은 짧은 순간 머물러 있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그 형상은 변화하거나 사라짐을 보여준다.
비올라는 우주의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졌는데 그 이유는 우주는 정지된 시간처럼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거대한 에너지에 의하여 움직이며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자신의 작품 속에서는 영상의 표현으로 보여줄 수 없는 정신적인 영역을 영상을 통하여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은 짧은 순간 머물러 있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그 형상은 변화하거나 사라진다.

그러면 그 순간 경험하며 느꼈던 느낌이나 감정은 어디로 갔는가? 이러한 그의 생각들은 영상의 속도를 조금 느리게 작동하는 것이다. 움직이는 시간들이 느리게 작동하며 만들어 내는 이미지들은 전혀 다른 생각과 에너지의 흐름을 보여준다.

비올라는 떠나간 영혼들이 영상을 통하여 잠시나마 현세로 돌아오기를 제안한다. 위대한 스승이나 역사적인 사건들을 영상으로 다시 연출함으로써 스승님들의 가르침이나 역사적 교훈 등을 통하여 현재의 우리에게 삶의 방식을 생각하게 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영상을 통하여 보게 되는 스승님들의 모습에서 육체적인 모습은 사라지고 없다. 단지 스승님들의 가르침은 현재에도 살아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육체가 없는 정신이 살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영상은 이처럼 가상의 시공간성을 투영하며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이중적인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영상은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때문에 시작과 끝이 어디인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이를 통하여 그는 순환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순환한다는 것은 변화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비올라가 일본에 머물며 체험한 선적 경험들이 서양적 관점에서 표현된 작품들이 그의 예술의 특성이라고 볼 수 있다. 동양과 서양이라는 문화적, 종교적, 철학적, 지리적 특성들이 사라지고 인간 본래의 모습을 추구하고자하는 그는 영혼, 순환, 죽음, 삶 등을 한순간의 짧은 영상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의 영상에 등장하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빛이다. 빛은 물리적인 영역과 형이상학적인 영역을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한다. 빛은 탄생의 순간을 상징하기도 하며 나아가서 고통의 벽을 벗어나는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 고통은 내면에 존재하는 정신성의 발현으로 나타난다. 어두운 공간에 빛이 들어옴으로 해서 공간은 생명력을 얻게 되며 존재의 가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회화에서 보여줄 수 있는 표현의 영역은 제한적일 경우가 많다. 하지만 영상예술은 다양한 기술을 바탕으로 이미지들을 합성하거나 연출하여 현실과 거리가 있는 가상의 이미지들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것은 가상인가? 현실인가? 가상의 현실인가? 현실에 존재하지 않지만 영상에는 존재하는 이미지들은 또 다른 현실이다. 이는 관념적 사고와는 다른 것이다.

관념적 사고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가상의 세계이며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으며 현실과는 관계성이 없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영상은 가상의 세계를 현실로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하는 영상속의 이미지들 때문에 가끔은 생각의 오류를 범하게 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제작자의 의도에 의하여 어떠한 특정한 목적을 위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비올라의 경우 영상은 지극히 현실적이며 비의도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상을 보면 깊은 사유의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그가 제시하는 영상들은 비현실적이지만 현실의 삶을 변화시킨다.
현실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늘 우리의 존재가치를 찾아가는 길을 모색하는 과정이다. 동서양의 많은 수행자들이 늘어나는 이유이기도 하며, 많은 예술가들이 예술의 표현적 기교보다는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경향이 많아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예술작품은 작가의 정신성의 집합체이기 때문에 그 흔적을 보고 작가의 정신성의 깊이를 판단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판단의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는 작품을 보면 반응이 작가의 깊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판단의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수행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이 스승의 단면을 보고 자신의 방식으로 판단하여 스승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어떻게 하면 판단의 오류를 줄일 수 있을까? 이는 아주 간단하다. 자신이 안다는 생각을 모두 버리면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이 경험하고 습득한 지식으로 스승이나 작품을 대하면 그것은 판단의 오류가 많아질 뿐이기 때문이다.

‘아는 것을 버리다’는 필자가 주장하는 예술을 대하는 방식 중 하나이다. 아는 것을 버리면 낯선 작품일지라도 그 깊이를 느낄 수 있다. 내면의 깊은 심연으로부터 자신만의 움직임을 인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은 것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특히 영상예술은 자신의 생각을 멈추고 고요한 움직임을 느낄 수 있는 좋은 방법 중 하나이다.   

백남준은 영상예술을 시작하며 예술의 영역확장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면 비올라는 영상예술의 2세대로서 시대적 흐름을 주도하며 철학적, 선(禪)적 개념들을 예술의 영역으로 도입하여 새로운 예술적 가치를 만들어 가고 있는 예술가이다.

한국에도 방문하여 자신의 작품을 선보인 비올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영적인 영역을 예술로 표현하고자 많은 노력을 하고 있으며 그가 보여주는 영상은 시간의 흐름을 정지시키는 듯 한 착각을 하게 한다. 시간, 공간, 역사, 문화, 철학 등 보편적인 삶의 궤적에서 벗어나 영원한 존재를 꿈꾸는 듯 한 그의 작품들은 삶의 존재방식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