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호 불교인재원 이사장

엄 이사장은 1941년 만주에서 태어났으나, 질병 등 혼란기라 공부상에는 몇 년 늦게 등재 되어 현재 71세다. 1945. 8. 8. 선친의 귀국으로 서울에서 3년간 살다가 이승만 정부의 조봉암 초대 농림부 장관의 강력한 토지정책으로 소작을 주었던 농토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선친은 경북 의성 다인 봉정으로 이주하여 농지 정리를 완전히 하는 과정에서 6.25동란으로 울산에서 피난 생활 후에 대구로 이주하여 장성한 뒤 선친의 사업에 참여하여 서울로 진출하여 그룹으로 성장하였고, 불교와는 전국신도회 수석 부회장, 전국신도회 고문, 불교인재원 이사장, 군불교진흥회장, 한일불교문화교류회 이사, 선친에 이어 BBS창설 이사, 일반경력으로는 고대 총교우회 22대부회장, 동 경영대학원23대 회장, 건영그룹 회장, SBS창설대주주, 그룹 도산 후 현재는 대인농산 명예회장, (재)중도육영재단 이사장, 영월엄씨대종회장, (사)통일대박정책연구원 이사장으로 활동중에 있다.
1982년 성철 스님 통일법문 듣고 감화
“국민에 꿈 심어줘야 통일된다” 당부
성철 수행처 순례중 통일불사 발심
3월부터 엄홍길씨와 통일 산행 진행

통도사·구룡사 등 불사 일궈
1997년 건설사 도산, 그룹 해체
불교공부로 마음 챙기고 나눔활동
“통일불사 국민운동으로 키울 터”


[현대불교=김주일, 노덕현 기자] 엄상호 불교인재원 이사장이며, 중도육영재단과 통일대박정책연구원 이사장(71)은 한때 서울을 비롯한 인천, 경기, 대구, 부산 등 전국 광역시에 건영을 비롯하여 건영종합건설, 건영토건, 건영건설 등 8개 종합건설을 주력기업으로 유통, 레저, 통상, 특수강제조, 창투, 해외법인 등 23개 계열사로 구성된 건영그룹 회장이었다. 그룹이 해체되는 좌절을 겪었지만 그는 여전히 건강한 모습으로 다양한 사회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중 눈길을 끄는 것이 불교 수행을 바탕으로 한 통일운동이다. 엄 이사장은 지난 2012년 8월부터 통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7월 1일 그를 만나 통일의 비전에 대해 들었다.

진행=김주일 기자, 사진·정리=노덕현 기자

 

Q: 사업 하시던 분이 통일운동을 하고 계시니 보통의 인연이 있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서 통일운동을 하시게 됐는지요?

통일 운동을 설명하자면 먼저 성철 큰스님과의 인연을 이야기해야 한다. 성철 큰스님을 처음 뵌 것은 1983년 오녹원 총무원장님 재임시 전국신도회 부회장일 때 박완일 회장과 함께 해인사로 신년하례를 가면서였다. 성철 큰스님은 당시 많은 스님과 신도들 앞에서 일갈하시는 모습에 큰 감명을 받게 되었다. 이후로 2009년 불교인재원을 맡으면서 2012년부터 2년간 ‘성철 큰스님 탄신 100주년 기념 수행도량 순례단’을 이끌게 됐다. 불자들과 평소 성철 큰스님을 시봉했던 원택스님을 증명 법주스님으로 모시고 생가부터 해인사, 백련암 등 인연처를 순례하였다.

그러던 중 여섯 번째로 은해사 운부암을 가게 됐다. 운부암에 가던 날 새벽 비몽사몽간에 성철스님으로부터 특유의 빠르고도 부정확한 발음으로 ‘통일을 위해 기도해! 통일 기도를 해’라고 일갈하셨다.

Q: 꿈에까지 성철 스님이 나와 말씀하실 정도면 평소에도 이에 대해 많은 생각이 있으셨겠습니다.

평소 통일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이에 대한 꿈을 꾸지 않았나 싶다. 꿈에서 깨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성철 큰스님이 살아계셨으면 당신의 수행처를 찾아다니는 대중들을 보고 무엇이라 하셨을까. 호통을 치지 않으셨을까.”

그래서 ‘통일’이라는 화두가 생긴 것이었다. 성철 큰스님은 항상 ‘남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다. 그 전에는 이 말이 머리로는 이해가 됐지만 가슴으로 와 닿지는 않았다. 그런데 ‘통일’이라는 화두가 생기니 이 말이 가슴으로 받아들여져 힘이 났다.

여러 스님들에게 말씀하였으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돌아온 것은 성철 큰스님이 생전에 하신 말씀이었다. 성철 큰스님이 법정 스님과 생전 나눈 대화였다. 법정 스님이 성철 큰스님에게 통일에 대해 한마디 해달라고 하니 성철 스님은 “국민에 꿈을 심어줘야 한다고 하셨다.

Q: 꿈이라…한국사회에서는 이제 통일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들이 점점 늘고 있습니다. 오히려 통일이 삶에 큰 도움이 된다고 여기는 이들도 많습니다.

우리나라 여러 난제들의 근원으로 올라가면 결국 남북분단이라는 현실에 부딪치게 된다. 매사에 남북분단 상태가 발목을 잡으면서 활력 넘치는 발전을 성큼성큼 해 나가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움 속에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 근래 경제가 어렵다고 하고 일자리도 문제라고 한다. 사실상 이 모든 문제의 돌파구는 통일에 있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부르고 국민들 마음속에 통일은 언젠가는 이뤄야 할 것이라는 공감대가 있었다. 지금도 통일에 대한 관심은 여전하다. 그러나 남이나 북이나 실제로 통일로 가는 길에는 아직도 끝이 없어 보인다.

Q: 국민들에게 ‘통일’이란 꿈을 어떻게 심어 줄 수 있을까요?.

한사람의 꿈은 그냥 꿈이지만, 모든 사람의 꿈은 현실이 된다고 한다. 모두가 통일에 대한 무관심에서 벗어나야 한다. 세상 어디에도 우리를 통일 시켜줄 이는 아무도 없다. 우리 스스로가 해야 한다. 해야 할 사람들이 손을 놓고 있으면 아무 것도 안된다.

남북 관계를 보면 북은 적화통일에만 혈안이 되고 있는 것 같다. 결국 남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다. ‘통일은 대박이다’는 말이 있다. 반대로 뒤집어 보면 ‘통일이 안되면 쪽박’이란 말이다. 우리는 이미 어린시절부터 겪고 있어 실감을 못하지만 분단 상황이 초래하는 사회적 비용은 어마어마하다. 결국 이 부분이 우리 민족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Q: 엄상호 이사장님은 불자로서 통일운동을 불교계 내에서 하고 계십니다. 불교계에서 통일운동을 전개하신 이유가 있으신지요?.

일반 국민들에게 통일의지를 북 돋는 게 쉽지만은 않은 과제다. 3·1운동 당시에도 보면 독립운동을 한 이들 중 전부가 종교인들이었다.

불자들이 먼저 이 절, 저 절 다니며 통일기도를 한다고 하면 먼저 불교계에서 분위기가 무르익고, 또 다른 종교계에서도 동참하고, 이러다 보면 국민들에게 통일의지를 심어주지 않을까 생각한다. 불교인재원에서 통일운동을 출발해 점차 함께 참여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첫 사업이 ‘엄홍길 대장과 함께 하는 평화통일 기원 순례 산행’이다. 엄홍길 대장과는 불자로서 인연이 있을 뿐 아니라 금년 초에 ‘히말라야’라는 영화를 보고 산악 영웅에서 통일에 꿈을 심어주는 전도사로서의 역할을 특별히 요청하여 협력하기로 했다. 1차로 금년 3월부터 엄홍길 대장이 37년간 살았던 도봉산 망월사 포대능선을 시작으로 (사)통일대박정책연구원과 엄홍길 휴먼재단이 처음 120명에서 2차는 우이동 애국지사 묘역 참배와 국립 4.19민주묘지 참배와 산행 순례, 3차로 엄홍길 휴먼재단 창립8주년을 맞아 역시 도봉산에서 엄홍길 휴먼재단 이사장인 김&장 법률대표인 이재후 변호사 외 300여명이 산행을 순례했다. 4차로 역시 엄홍길 휴먼재단과 동작동 국립 현충원 참배와 둘레길 산행 순례에 이어 통일 교육을 실시하였다. 산행 순례 행사에는 통일에 대한 꿈을 심어주는 강연이 함께 진행된다.

 Q: 많은 저명 단체들과 통일운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재)통일과나눔재단의 통일나눔펀드를 보고 동참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뒤 통일나눔과도 통일의 꿈을 심어주는 일에 함께 협력하기로 한 일도 있다.

Q: ‘통일은 대박’이라는 말이 나와서 말씀드리지만 이 책의 저자인 신창민 박사와도 인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책 출간을 후원하시기도 했다고요.

 통일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니 언론기사에도 더욱 관심이 있어서 매일 신문을 읽고 방송을 시청하던 중 2015년 6월이었는데 6·15공동선언 15주년 좌담회가 열렸고, 한겨레에서 이것이 크게 보도됐다. 이 중에 〈통일은 대박이다〉라는 책이 소개 되었다. 책을 구입하여 읽어보고 저자 신창민 박사를 만났다.

당시에 한우리통일연구원 이사장이기도 한 신창민 박사는 서울법대 재학시 불교학생 회장을 역임하는 과정에서, 청담 큰스님을 모시고 조계사에서 법회를 많이 하게 된 것도 확인하게 되었다. 1990년 설립한 (사)한우리통일연구원 이름도 법정스님이 지어준 것이었다. 이것이야 말로 부처님이 연결해 준 인연이라 생각했다. 이후에 신창민 박사를 만나 본인이 1만여 권의 도서를 보급하는 것을 보고 자신은 통일연구원 원장으로서 통일연구에만 전념하겠다고 하면서 통일연구 사단의 이사장을 맡아 운영할 것을 간곡히 말씀하시어 좋은 인연이라 수락하고 취임하게 되었다.

 Q: 통일운동 외에 불자로서의 마음가짐도 대단하신 듯합니다. 평소의 신행활동은 어떻게 해오셨습니까?

 대대로 불교집안인데, 조부 때부터 특별한 인연을 이어온 경북 의성 다인의 대곡사와 적조암 외에 대구로 이주하여 대구 팔공산 동화사, 경남의 통도사와 1977년도에 서울로 이주해 혜화동 로타리 부근에 살면서 서울의 조계사를 찾아 많은 인연을 맺어 오던 중 무진장 스님과의 인연으로 동산반야회의 설립이사장으로 참여했던 것이 보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외 많은 유명사찰과 지금도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예전에 그룹 회장으로 활동할 때도 여러 큰 스님들을 찾아가 법문을 청해 들었다. 기업이 잘 될 때 불교를 위해 무엇인가 크게 불사를 하지 못한 것이 후회되기도 한다. 그러다 성철 스님 탄신 100주년을 맞아 수행 도량을 순례하면서 백일법문을 듣고 제대로 불교를 이해하게 되었다.

조계종 종정을 역임한 통도사 월하 스님과 선친이 인연이 깊었는데 그 인연으로 불사에도 참여했다. 서울 서초구 포이동 구룡사외 많은 곳의 포교당 건립 불사는 원력이 있으면 이뤄진다는 것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어느 날 출근 길에 ‘통도사 서울포교당’이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퇴근하며 포교당을 찾았는데 아무리 봐도 없었다. 5일 만에야 찾았는데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던 천막포교당이었다. 정우 스님과 함께 불사를 진행하게 됐다. 현대식 도심포교당 건물에 대한 반응은 좋았다. 여러 사람의 원력으로 이뤄내게 됐다. 원력이 있으면 이뤄진다는 것을 느낀 게 바로 월하 큰스님의 법력으로 정우스님과의 불사를 하면서 부터다.

혜화동 로터리 부근에 살 때도 천막 법당이었던 삼선포교당이 현대식으로 건립된 것과 진천에 보탑사 건립에도 지광스님의 원력으로 석주 큰스님과 함께 보탑사 공사 현장을 찾아 불사에 참여했던 것도 특별한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그 외에도 암도 포교원장님을 회사 법회에 많이 초청하여 법문을 들으면서 인연을 맺어 중계동에 포교당을 건립하였고, 지금은 중도육영재단의 감사로 모시고 함께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또한 불교인재원 이사장으로 소임을 보면서 고우스님, 무비스님, 혜국스님, 원택스님과의 인연도 늘 감사를 드리고 있다.

 Q: 이사장님은 1990년대 신도시 아파트 건설로 유명한 건영그룹의 회장이셨고, 23여개 계열사를 거느린 건영그룹 총수셨는데 1996년 갑자기 흑자 도산했습니다. 충격이 크셨을 듯 한데요.

 아파트 분양을 위해 건설사간에 연대보증을 하면서 연대보증을 한 우성그룹이 시공한 삼풍백화점 붕괴 책임으로(후일 설계사의 책임으로 밝혀져 우성그룹도 억울한 도산이었음) 도산이 되면서 제 때에 아파트 분양을 위한 연대보증을 받을 수 없어 조 단위의 물량을 분양 할 수 없어 갑자기 유동성에 문제가 되어 그룹이 해체되었다. 본인이 중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중국사업에 특별한 관심으로 국내 최초로 중국에도 진출한 상태였다. 당시 중국 상해에 아파트 한 채만 투자해도 수익이 대단하였는데, 중국 상해에 수천 세대의 아파트 사업의 투자는 위기만 잘 넘겼으면 국제적인 그룹으로 성장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룹이 해체됐으니 아픔이야 없었겠나. 이 아픔을 불교적 수행을 통하여 이겨냈다. 처음 전국신도회 부회장으로 해인사 신년하례회에서 성철 큰스님을 쉽게 뵙게 된 것이 송구하여 그 뒤 다시 백련암을 찾아서 3,000배를 하게 된 것이 인연이 되어 매달 1만배 서원을 세웠다. 30년이 넘게 매일 333배를 해오고 있었는데, 그룹은 도산하였으나 건강과 신심이 더 좋아졌다.

함께 사업했던 이들 중에 많은 이들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 사업이 잘 안되어 여러 문제가 발생해서였다. 나 자신도 계속 사업을 잘 했다면 성공했을지는 몰라도 불교를 제대로 이해도 못하고 재물에 끄달려 살다 저세상에 갔을 지도 모를 테니 불교와의 인연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중도’를 알고 ‘(재)건영육영재단’도 ‘(재)중도육영재단’으로 바꾸고, 그룹해체로 겨우 살아남아 만년에 나름대로 뜻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의 짐도 덜고 건강해진 것 같다. 이제 남은 것은 통일운동이니 인생의 회향을 통일불사에 진력하겠다.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는 통일에 있기 때문이다.

  Q: 함께 사업을 하던 다른 분들이 돌아가셨다고 하셨는데, 이사장님은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어릴 때부터 사찰에 다니면서 불심을 키웠지만 마음 속 한편에서는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이 항상 떠나질 않았다. 열심히 수행은 했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와 환생도 믿음이 가지 않았다. 불교에서는 성주괴공이라 하여 언젠가는 나의 존재뿐 아니라 지구도 붕괴되어 사라진다고 하니 너무 허무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이었다. 먼 깜깜한 하늘을 보면서 명상에 잠겨 있었는데 태양과 같은 불덩어리가 날아와 가슴을 치고 지나가는 순간 지구가 붕괴되어도 우주안에 있다는 소리가 들리면서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몇 초라고 느낀 시간이 3시간이나 지난 시간이었다. 그간 지구만 생각했던 좁은 생각에서 우주를 생각하게 되는 순간 마음이 커지면서 생사가 해결 된 것이 아닌가 이해하게 되었다.

  Q: 통일운동 외에는 하고 싶은 일이 없으십니까? 또한 앞으로의 활동 계획에 대해서도 들려주세요.

 통일운동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모든 국민들에게 통일에 대한 꿈을 심어주는 운동을 계속하고 싶다. 현재 소임중에 있는 불교인재원을 잘 활용하여 불교가 젊은 층들에게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나가겠다. 70년 동안 불교를 믿어오는 과정에 늘 불교는 어렵다고 생각하였다. 불교인재원 이사장으로 재임하면서 7년간 빠짐없이 법문을 듣다보니 불교가 너무나 쉬운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쉬운 불교를 널리 알리고자 앞으로도 계속 노력할 것이다.

 엄 이사장은 현재 소임중에 있는 불교인재원 이사장도 선친의 불사금을 관리하였다는 담당 직원이 12년 만에 나타나 고백하면서 당시 불사금을 유용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전남 해남에 계시는 자신의 어머니를 찾아가 고백하게 되었고 놀란 어머니는 그를 전남 해남 대흥사로 데려가 7시부터 새벽2시까지 참회기도 중 갑자기 어머니가 부처님이 그 돈을 주인에게 돌려주라고 한다고 하여 유용한 돈을 돌려주기 위해 왔다고 하면서 내어놓아 2개월간 기도 끝에 결론을 얻어 신도회에 기부하였더니 신도회 회보에 그 기부금이 불교인재원 창설에 종자돈으로 많은 불자들과 함께 큰 역할을 한 것을 보고 기이한 인연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초대 이사장으로 전남지사와 국회부의장에 변호사인 허경만씨가 취임하여 3년간의 소임을 마친 뒤에 신도회에서 본인에게 이사장 소임을 요청하여 선친의 정성어린 불사금을 생각하면 거절 할 수 없어 맡은 뒤 오는 7월 13일이 벌써 7년이 된다. 불교인재원 이사장 소임중에서 성철 큰스님과의 인연으로 통일기도를 하는 과정에 ‘통일은 대박이다’라는 저자 신창민 박사의 인연을 맺게 되어 책을 보급하는 과정에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은 (사)통일대박정책연구원장으로 활동하고 본인에게는 이사장을 맡아 운영하여 줄 것을 간청하여 거절 할 수 없는 인연이라 생각하고 수락하여 취임한 기이한 인연의 오묘함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하였다.

 엄상호 이사장은 인터뷰 내내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적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겪었고, 그럴 때마다 마음 내려놓는 법을 배웠다는 엄 이사장.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그의 통일불사 원력은 이 시대의 가장 큰 불사라고 외치는 모습에서 위대함 마져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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