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가 벌여 놓지 않은 거는 자기 앞에 들어오지 않는다

 

여러분이 여기 법당에 들어오면 법당에 부처가 있는 것이고
여러분이 법당에 안 들어왔으면 안 들어온 대로
거기 있는 자리에 부처가 있는 것입니다.

(지난 호에 이어서)
이렇듯이 사람도 오늘 이렇게 사람으로 있다가 내일 어떻게 될지, 어떠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나올지 그것도 모르는 겁니다. 영이란 본래 체가 없는 거라, 즉 말하자면 원자에서 입자가 수만 개로 퍼지듯이, 또 하나로 뭉쳐지듯이, 벌어지고 뭉쳐지고 이렇게 작용을 무수히 하면서 지금 우주 전체가 돌아가고 있듯이 그런 거란 말입니다. 한마디 더 하자면, 아까도 암흑 얘기 했지만, 그렇게 진화돼서 해 나온 그 과정을 증명하려면 모두 여러분의 몸속을 보십시오. 그게 증명할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악업 선업이라는 건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인데 그 입력이 돼서 나오는 그것이 여러분 속에 지금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독 안에 들어도 면치 못한다는 것을 이 한마음, 이 도리를 공부한다면, 이 마음이 ‘야, 네 몸인데 네 몸을 건강하게 끌고 다녀야지.’ 하는 그 마음이 그대로 입력이 된다면 그대로 그 마음이 전체에 입력이 되는 것이죠, 의식들이. 그래서 ‘아, 나를 몰랐는데 이게 내 집이고 내 몸이래.’ 하고선 모두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은 바로 두뇌입니다. 마음이 바로 한 찰나에 두뇌로 올라가서 즉 누진…, 바른쪽 왼쪽의 그 작용의 핵심이 바로 누진입니다. 누진이 바로 사대로 통신을 합니다. 이 두뇌로 올라가서 통신을 해서 한마음으로 그렇게 알려지는 그 통신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자기가 파워를 일으켜서 잘못하면 살이 굳어지고 세포가 굳어지는데, 제 집이 없어지거든요. 제 집 망하는 거를 누가 좋아합니까. 제 집이 망그러지는데 누가 좋아하느냐고요. 그러니까 건강한 거는 두말할 것도 없고, 또 그 의식들이 들고 나면서 영계성이든지 세균성이든지 업보성이든지 유전성이든지 다 끌어들여서 파워를 일으키는데, 좋은 것도 끌어들이고 나쁜 것도 끌어들이고 이렇게…, 이 주인이 없으니까 그렇게 되는 거죠, 마음의 주인이 없으니까. 그렇게 해 놓고 돌아가는 것을 만약에 주인공의 그 주장자를 완벽하게 세우고 공부를 한다면 모든 게 그냥 삽시간에, 그 모두가 바깥으로는 털구멍을 통해서 보살의 행으로서 화하게 되고, 안으로는 안대로 보살의 행으로서 화하게 되니까 천백억화신으로서 화할 수 있다 이런 겁니다.

이 모두가 이렇게 작용이 엄청난데, 하나도 작용 안 하는 것이 없어요. 하다못해 이 지구의 모든 것도, 물과 산도, 이 들도 움죽거리지 않는 게 하나도 없어요. 우리들 인간의 수명은 70년 80년이지만, 그것들은 이천, 만, 십만 이렇게 수명이 길 뿐이죠. 이러한 법의 도리를 부처님께서는 49년을 설했고 여러분 앞에 그 길을 인도하면서 “절름발이로 살지 말아라. 또는 눈먼 장님으로 살지 말아라.

귀먹은 귀머거리로 살지 말아라.” 이럭하고서 모든 것을 가르치셨는데, 단군도 그렇게 가르치셨고, 농사짓는 법이라든가 모든 걸 가르치셨고, 부처님도 그러하셨죠.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모든 게 홀로 높으니라. 홀로 높으니라. 천상천하에 유아독존.” 이것을 말씀하신 겁니다. 그게 뭔 줄 아십니까? 이 세상에 크고 작고 높고 낮은 게 없이 전부 홀로 높으니라. 대장간 일 하는 사람은 대장간 하는 데서는 제일 높고, 또는 뱃사공 일 하는 데서는 뱃사공이 제일 높고 모두가, 농사짓는 일 하는 데서는 농사짓는 농부가 제일 높고, 아이, 모두 홀로 높지 않습니까. 하여튼 이거 하는 사람이 저거 못하고 저거 못하는 사람이 이거 못하니까 모두가 제가끔들 해 가지고 돌아가고 있어요, 서로 주고받고 하면서.

그리고 우리가 종교를 믿는다 이런다면 그냥 믿는 것만이 믿는 게 아닙니다. 진실로 우리가 행동, 말, 뜻 이 모두를 다 갖추어야 됩니다. 가정에서 어떠한 문제가 있다, 속이 상한다, 뭐 자식들이 속을 썩인다 이러더라도 말로 하고 몸뚱일 잡아 가지고 때려서 되는 게 아닙니다. 해와 바람이 싸운 얘기도 아시죠? 이 마음을 붙잡아야 몸뚱이도 오지, 마음을 붙잡지 않고 자꾸 욕을 하고 “너, 아이고, 요놈의 새끼! 너는 배울 시기에 못 배우면 깡통밖엔 못 차.” 이러면서 갖은 욕을 하면서 불안을 격화시키고, 온통 집안 식구들을 다 그냥 북북북북 긁으면 화를 내고 인제 이런단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것이 어떻게 입력이 되겠습니까. 그냥 그대로, 말한 대로 입력이 되는 겁니다, 자동적으로 아주. 그리고 그 사람은 뭐, 자식이든지 부모든지 누구를 막론해 놓고 자꾸 달아나갑니다, 추우니까. 보금자리가 너무 쌀쌀하고 추우니까 말입니다. 따뜻한 데로 찾아가느라고 자꾸 달아나갑니다.

그러니까 종교인이라 하면 그래도, 가정에서도 어떠한 것이든 모든 거를 다 거기 맡겨 놓고 부드럽게 말하고 부드러운 행동과 부드러운 뜻을 가지고, 어떠한 조건이라도 거기다 맡겨 놓을 수 있어야 하며, 그렇게 한다면 같이 밝아질 수가 있는 겁니다. 밝게 살 수 있어요. 그건 스스로 경험해 본 사람들이 다 말을 할 겁니다.

서울에 있는 어느 사람이 자식이 하도 그냥 나가서 깡패들하고 같이 어울려서는 그저 보름 정도 안 들어오기 예사고 열흘 안 들어오기 예사고, 학교 가지 않는 것이 그냥 뭐 다반사고 그래서, 학교에서는 부모를 자꾸 부르고 이렇게 되니까 “이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하고 찾아왔어요. 그리고 집안에서도 뭘 자꾸 훔쳐 내간답니다. 그리고 바깥에서도 뭘 훔쳐서 경찰서에서 자꾸 부르고 말입니다. 이러니까 학교도 퇴학을 당하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걸 부모가 하도 그냥 애쓰다, 버린 자식으로 내놨다가 이 선원에 오게 됐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거든요. “아들의 주인공과, 그러니까 아들의 생명과 엄마의 생명이 둘이 아니요, 또한 부모다 자식이다 하는 바로 인연줄이 있다. 인연줄이 있기 때문에 둘이 아니다. 그러니까 항상 거기다 맡겨 놓으면 인연줄에 의해서 거기까지 불이 들어올 수 있다.” 이랬거든요. 그러니까 그 마음의 도리를 알고서 거기다가 그냥 그대로 그렇게 했더니 한 두어 서너 달 되니까 아이, 장독대를 닦고 있는데 들어오더니만 “어머니, 잘못한 게 너무도 많습니다.” 하면서 “아이, 힘드시죠?” 그러면서 장독대를 듬성듬성 옮기면서 자기가 그냥 물로 닦고, 그렇게 그 어머니의 어려움을 덜어 주더랍니다. 그러면서 그날부터 그 마음이 잦아져 가지고 어머니의 그 아픔을 아들이 알고, 자기가 잘못됐다는 걸 알고 이렇게 해 가지곤, 아주 그때서부터 학교에다가 잘못했다고 백배사죄해 가지곤 도로 학교에 들어가고, 그렇게 해 가지고선 아들이 효자가 됐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우리는 죽어서 천당에 가고 죽어서 잘되기를 바라는 게 아닙니다. 지금 현실이 없다면 미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사는 것을 가만히 지켜볼 때 과거에 어떻게 산 거를, 어떻게 했던 거를 알 수 있고, 바로 지금 행동을 하고 살아가는 꼬락서닐 보면 미래에 어떤 게 올 거라는 거를 모두 여러분이 잘 아실 겁니다.
그러니 기복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여기 법당에 들어오면 법당에 부처가 있는 것이고 여러분이 법당에 안 들어왔으면 안 들어온 대로 거기 있는 자리에 부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당에 들어와서 절을 할 때는 부처님의 이 형상이 내 형상이요, 부처님의 마음이 내 마음이요, 그 생명의 뜻이 내 뜻이요, 이건 둘이 아닌 고로 그저 삼배를 올릴 것도 급하면 일정례를 올리되 둥글게 해서 그저 내 주인공으로서, 하나로서 절을 하는데 그것도 자기를 겸손하게 만들기 위한 방편입니다. 하심하게 하는 방편입니다. 아상이나 아집이나 그런 거를 모두 죽여야 모두 한마음 속으로 들어갈 테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까 불교라는 이 단어 없는 단어, 이것이 바로 우주 만유의 근본이며 우리가 지금 생활을 해 가지고 나가는 이 작용 자체가 바로 불교입니다. 우리들을 떠나서 불교가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이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고 뭐가 있습니까. 무효지. 여러분이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상대가 있고 흐름이 있고 인연의 법칙이 있고 발전도 있고 창조력도 기를 수 있고 창조를 해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농사를 지어서 놓은 것도 과학이요 밥을 지어 놓고 먹는 것도 과학입니다. 임신을 해서 어린애를 낳는 것도 과학입니다.

이거는 심성과학이며 자동적인 과학입니다. 이 무수하고 광대무변한 이 자동적인 과학을, 심성과학을 물질과학으로만 가서도 아니 됩니다. 모든 것이, 천체물리학도 이것은 심성물리학이라야만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이 공부를 해 나가면서 잘 터득을 하신다면 핵심에서, 천체물리학이니 과학이니 전체 모두가 나갈 겁니다. 천문학이니 하는 모든 게 전체 그 핵심에서만이 빚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저 혼자만 말을 해서 안됐습니다만 어쩔 수 없이 말을 했으나 나는 말한 게 없습니다. 여러분도 들은 게 없이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들은 게 없으면서도 바로 여러분의 양식이 되어서 여러분의 생활 그 자체에서 실천할 수 있는 그런 창조력을 기르시길 바랍니다. 여러분한테 인제 질문을 좀 받아야겠습니다. 질문하실 분 있으면 질문하시죠.

사회자 질문하실 분 있으시면 질문해 주세요. 그동안 평소에 의심이 들었던 문제라든지, 지금 큰스님의 말씀을 듣고 질문하실 게 있다든지 그러시면 나오셔서 질문을 해 주십시오.
큰스님 질문하실 분 없으십니까? 우리 고문님 좀 나오셨으면 좋겠네. 허허허. 아유, 정말 재미있기도 하지만 정말 여러분이 이렇게 튕겨서 듣는 이 양식이야말로 진짜 좋은 법이죠.

질문자1(여) 마음을 제가 관한다는 것이요….

큰스님 (절을 하는 질문자에게) 한 번만 하세요. 그거는 당신의 아집을 꺾기 위해서 당신이 당신한테 하는 겁니다.

질문자1(여) 마음공부를 한다는 것이요, 이렇게 얘기를 듣고 또 불경 책을 봐도 그때 잠깐이지, 제 스스로 그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이, 떠나오면 잊어버리고 그게 제대로 되지를 않거든요.

큰스님 아, 잊어버리는 것도 거기서 나오는걸요. 잊어버리는 것도 거기서 나오고 먹자 하는 것도 거기서 나오고 기르자 하는 것도 거기서 나오는 거고, 한군데서 일체 만법이 나오는 거지 다른 데서 나오는 구멍은 없습니다.

질문자1(여) 그걸 다스리는 방법이 없나요? 나가면 또 금방 한 이틀이면 또 잊어버려요.

큰스님 잊어버린 것도 거기서 나오거든요. 딴 데서는, 딴 데서 나올 틈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서 나오니까 거기다가 맡겨라 이 소립니다. 거기다 맡기고….

질문자1(여) 맡기면 제멋대로거든요. 이게 생각도 없이 중구난방으로 하고 나면 어떨 때는 ‘아유, 이거 실수였구나!’ 이미 저지르고 난 다음에….

큰스님 당신이 모르기 때문이야.

질문자1(여) 그렇죠, 저는 모르기 때문에.

큰스님 당신이 아주 백지이기 때문이지. 그러니까 해 봐라 이거야. 무조건, 무조건 믿고 해 봐라, 아는 척하지 말고. 아는 것도 거기 놓고. 지식이나 학식으로 하는 게 아니고 이론으로 하는 것도 아니야.

질문자1(여) 항상 마음을 붙들고 다녀야 되는데….

큰스님 아, 뭘 붙들고 다녀요? 본래 가지고 있는데. 하하하…. 하이고 아, 붙들 게 있어야 붙들죠? 마음이라는 게 쥘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빛깔도 없는 거예요. 허공을 쥘 수도 없고 그렇지만 허공이 있지 않아요? 마음도 쥘 수도 없지만 있지 않아요? 아, 지금 그 말을 하잖아요! 아, 마음이 없는데 어떻게 말을 해요?

질문자1(여) 실천이 안되죠.

큰스님 하이고 참! 저 봐. 실천이 안된다는 소리도 거기서 나오는 거거든요. 전체를, 전체를 믿어요. ‘내가 지금 일상생활을 전체 하고 가는 것이 그놈이 하는 거다.’ 하고요. 전체 믿어 버리면 될 거 아닙니까? 한 번도 해 보지도 않고선 그러네. 하하하.

질문자2(여) 사무 사유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가르쳐 주십시오.

큰스님 사무 사유라는 건 물질세계의 사, 무의 세계 사, 이게 팔정도를 이렇게 뚱그렇게 해 놓고, 이렇게 이렇게 해 놓고 이렇게 이렇게 그려 놨죠. 그러면 사, 사가 한꺼번에 그냥 한데 합쳐져서 수레바퀴 돌아가듯이 똥그랗게 해 놨죠. 이 세상도 그렇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사무 사유가 한데 합쳐서 바로 돌아가고 있는 거죠. 여러분도 바로 이거를, 대의적인 일에 사유 사무가 되고, 한 혹성으로서 작게 돌아간다면 지금 정신계 물질계, 요거, 지금 요것이 돌아가는 거죠. 그러니까 같이 항상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 모두가, 즉 말하자면 무의 세계와 유의 세계가 같이 작용을 하고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얼른 쉽게 이렇게도 비유가 될 수 있죠. 이 세상 모든 게 천차만별로 사생, 즉 말하자면 태로 낳는 거, 알로 낳는 거, 질척한 데서 낳는 거, 또는 화해서 낳는 거, 이것이 바로 무에서 유로 나오고 유에서 무로 들고 하니까 이것이 바로 사무 사유가 되는 거죠. 이렇게 해서 이 세상만사가 그렇게 돌아가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한 마디 가지고 열 가지가 벌어지고 열 가지가 한 가지로 귀결되고 이렇게 하는 거죠.

질문자3(남) 스님께서는 한마음이 우주의 본체라고 말씀하시는데요, 한마음이라고 그러면 너와 나의 어떤 본체, 같은 마음을 의미하는 건지, 아니면 성리학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하나의 기(氣)로서 이원화돼 있는 건지…. 그러니까 마음은 하난데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건 너와 나의 개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개체에서는 마음은 한마음이지만 두 가지 어떤 형체랄까 그래서 일기이원론이 되는 건지, 아니면….

큰스님 물질로 생각을 한다면 아니 됩니다. 그러나 이 한마음이라는 건 물질로 생각을 해도 그 뜻이 나타나고 있어요. 이 뜻을 생각합니다. 지금 비유를 하자면 사장과 직원이 어떻게 돌아갑니까, 사장과 직원이? 이것은 직원과 사장이 이 하나로 귀결된, 먹고살기 위한 그 하나로 인해서 한마음으로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안 그렇습니까? 네. 그런데 이 세상 이치가 다 그러합니다. 우리가, 즉 말하자면 저런 나무들, 울창한 나무들도 공기를 보유했다가 바로 사람들한테 모두가 나눠 주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면 우리 사람들에게서 또 자동적으로 이산화탄소가 벌써 나무한테로 갑니다. 그러니까 모든 게 공심 공용 공체 공생, 이것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게 한마음이지 두 마음입니까? 모두가 같이 돌아갑니다. 같이 돌아가는데 용도에 따라서 즉, 아까도 얘기했듯이 아프면 의사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같이 돌아가는 동시에 내가 아프면 의사가 필요하고, 가난하면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필요하고, 이렇게 하니까 ‘너’가 있고 ‘나’가 있다 이렇게 됩니다.

질문자4(여) 제가 여쭤 보고 싶은 건요,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육신을 가지고 나오잖아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벙어리로 어떤 사람은 귀머거리로, 그러니까 대부분의 사람이 정상인으로 나오지만 또 어떤 사람은 지체부자유나 정박아나, 그러니까 똑같지 못한 그런 몸으로 태어나지 않습니까? 그거는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는 건가요?

큰스님 자기가 한 대로요.

질문자4(여) 그럼 전생의 업 때문인가요?

큰스님 예를 들어서 지금 현실에도 자기가 한 대로 지금 자기가 받고 가죠. 남의 따귀를 때렸으면 따귀가 오고요. 그런 거죠. 남을 기껏 두들겨패 놓고 왔다면 그쪽에서도 앙심을 먹고 또 두들겨패러 여럿을 끌고 또 오죠. 그런 거나 마찬가지죠. 그러니까 어린애 둘이 놀다가 한 애가 불집게에 정수리가 찔려서 죽었단 말이야. 그런데 이후로다가 그게 논란이 됐어요. 생각을,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어린애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그 불집게로다가 그렇게 찔려서 죽었겠느냐? 그래서 난 이렇게 대답을 했죠. 알고 짓는 죄는 알고 받게 마련이고 모르고 짓는 죄는 모르고 받게 마련이다라는 얘기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얘기할까요? 어떤 사람이 농촌에서 사는데, 깻벌레하고 거미가 옛날에는 무지 많았습니다. 그럴 때 이 통에다가 오줌을 받아 가지고는 씩씩거리는 깻벌레를 집게로다가 집어서 그냥 연방 넣어서 죽였습니다. 깻벌레하고 거미하고 수년을, 수십 년을 그렇게 죽이다 보니까 그 의식들이 아주 그냥 똘똘 뭉쳐서 그만 인간으로 화한 겁니다. 그 집이 어린애를 못 낳았는데 어린애로 화한 겁니다. 형제가 됐어요. 그 형제가 인제 글방을 다니고 그러는데 어느 스님이 난데없이 오시더니, 오늘 저녁이면 그 어린애가 당신들에게 원수를 갚을 테니 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일러 주더랍니다. 겻불을 두 군데다가 켜 놓는데, 병아리 못 나가게 하는 그런 철망으로다가 이렇게 쳐 놓고 공석을 덮어 놓고 이렇게 겻불을 피우고, 자식들이 올 때쯤 되면 항아리 속에 들어가서 뚜껑을 아주 덮고선 아무리 어떤 소리가 나더라도 인기척을 하지 말고, 그 인기척이 다 끊어진 뒤에도 한 시간 후에 나가 보라고 그랬어요.

그랬는데 뭐, 밑져야 본전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한번 그렇게 해 본 거예요, 정식으로. 아닌 게 아니라 아, 얼마 있더니 “엄마, 아빠! 어디 갔어? 배고파!” 이러고 들어오더니 아, 나중에는 그냥 찾다 찾다 없으니까 “이 연놈들 어디 갔어?” 하하하, 이렇게 나오더라는 겁니다. “오늘 아니면 원수를 갚을 수가 없는데, 오늘 이 시간이 넘어 가면 우린 다 그냥 원수를 갚지 못하는데 어떡하면 좋으냐?” 하고 그냥 팔팔 뛰고 울면서 그냥 뭐 거산을 하고 찾더라는 겁니다. “이 연놈들에 대한 마음이 수십 년 동안 응고가 돼서 내가 이 시간을 타서 원수 갚으려고 한 것이 세상에, 이렇게 허무하게 이렇게 될 수가 있느냐?” 그러면서, “그냥 이 연놈들을 어떻게, 어떻게 씹어 삼켜야만 원수를 다 갚느냐?” 그러면서.

아, 그럭하고서는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고, 너무나 무서워서 세 시간이 지난 뒤에 나와 보니까 한쪽에는 깻벌레가 싹 붙어서 전부 그냥 꿈틀거리고 한쪽에는 거미가 붙어서 그 안으로 그냥 잔뜩 들었더라는 겁니다. 죽고 그냥 꿈틀거리고, 그 겻불에 죽은 거라. 그러니 그 스님께서 얼마나 그 참, 그 노인네들을 건져 주셨습니까. 그러고서는 그 스님은 그 깻벌레와 그 거미를 정식으로 화하게 해서 인간으로 탄생을 하게 해 주셨다는 그런 이치도 있었습니다.

그렇듯이 자기가 벌여 놓지 않은 거는 자기 앞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어떠한 일이든지, 벙어리로 태어난다든가 불구인으로 태어나는 것도 보는 사람과 당하는 사람이 동시에 같은 그 죄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하는 사람도 죽겠지만 보는 사람도 정말 그 못지않거든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49년을 설하시면서 그 길을 인도해 주신 거죠, 그러지 말라고. “그 모두가 이 세상천지에 너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어떻게 짓느냐에 따라서 네 앞에 닥치느니라.” 하고 말입니다.

아까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흑인이 백인 낳을 수가 없다고요. 뭐 아주 철두철미합니다, 이건. 요만한 거 하나도 거저가 없고 요만한 거 하나도 에누리가 없습니다. 참 철두철미합니다. 여북하면 악업을 짓지 말고 선덕을 쌓아라, 선업을 지어라 이렇게 했겠습니까. 나쁜 일을 하고 나쁜 행동을 하고 나쁜 마음을 쓰고 이렇게 한다면 악업을 짓는 거죠. 그러니까 모두 여러분이 자기 스스로 자기를 다스리면서 좋은 공덕을 쌓아야죠. 그리고 또 그런 업장이 있어서 그렇게 됐다 하더라도 이 마음공부를 해서 ‘그 자리에서 그렇게 된 거니까 그 자리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다!’ 하고 거기다가 맡길 수 있는 그런 마음공부를 한다면 아주 그게 무너집니다.

※위 법문은 1992년 7월 26일 모건힐지원 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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