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옥봉 백광훈
25. 옥봉 백광훈
  • 박동춘 소장
  • 승인 2016.07.08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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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위 高下 막론하고 승려와 깊은 교유

최경창·이달 더불어 삼당시인
명나라 사신 백광선생칭해
처영 스님과 오랜 인연 등
승속 넘은 벗들과 유불 교유

조선 중기의 인물, 옥봉 백광훈(玉峰 白光勳, 1537~1582)은 일찍부터 벼슬에 올라 나라에 보국(報國)하려는 의지를 접었다. 그 이유는 자세하지 않지만 그가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다는 점과 정치적으로 혼란했던 시절을 살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짐작할 뿐이다.

그도 한때 선릉참봉(宣陵參奉)이나 소격서(昭格署) 참봉을 지냈으나 이는 호구지책(糊口之策)을 위한 것이라서 그리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대부분 강호에 머물며 시작(詩作)에 몰두하여 송풍(宋風)을 버리고 당풍(唐風)을 따르고자 하였다. 후일 그와 최경창(崔慶昌, 1539~1583), 이달(李達, 1539~1612)을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 칭하는 연유는 여기에 있다.

조선 중기의 문인 이정귀(李廷龜, 1564~1635)백광훈은 손꼽히는 호남시인으로 특히 절구(絶句)를 잘하여 당나라의 천재시인 이하(李賀)에 비견된다고 평가하였다. 그가 출중한 시재(詩才)를 가졌던 연유는 무엇일까.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그의 천재성이 첫째일 것이고 두 번째는 시 짓는 일을 좋아하여 탁마에 열중했던 점과 그의 사승(師承) 관계일 것이다.

따라서 그의 학맥을 살펴보면 일찍이 박순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양응정(梁應鼎, 1519~1581)과 노수신(盧守愼, 1515~1590)에게도 수학했다. 특히 그가 진도로 노수신을 찾아간 것은 1558년 아내를 잃은 후 집이 가난하여 한양에서 더 이상 수학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당시 노수신은 멀리까지 자신의 적거를 찾아온 백광훈을 위해 술을 준비하는 등 성의를 다했다. 이러한 정황은 백생광훈지야음(白生光勳至夜飮)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시월 초삼일에(十月初三日)
멀리서 벗이 찾아왔네(朋來自遠方)
마음 맞는 우정, 오래 전에 이름을 들었고(神交久名聞)
의기투합하여 나이를 잊고 벗할 만하네(義合可年忘)
말하다가 웃는 사이에 한껏 심취되어(語笑專傾倒)
이 몸을 취한대로 맡길 뿐이라(形骸任醉)
이 사람은 다만 이러할 지니(此生聊爾耳)
다음 만남에 다시 어찌할까(後會更何當)

그가 진도를 찾았을 때가 시월초삼일이라 하니 초겨울이다. 먼 길을 찾아온 백광훈은 자신과 신교(神交)를 나눈 사이라 하였다. 이는 바로 뜻이 맞는 사람임을 의미한다. 실제 노수신은 백광훈보다 22살이 더 많았지만 나이를 불문하고 망년지교(忘年之交)를 나눌 수 있는 사이라고 여겨 의기투합하여 나이를 잊을 만하다고 말한 것이다. 세상에서 뜻을 투합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그러므로 이들은 말하다가 웃는 사이에 한껏 심취될 수 있었던 스승과 제자였다. 후일 노수신은 그를 백의제술관(白衣製述官)에 천거하여 그와 함께 명나라 사신을 맞았는데 명나라의 한세능(韓世能)과 진삼모(陳三模)는 백광훈의 시와 글씨에 탄복하여 백광선생(白光先生)이라 칭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36세였다.

한편 그가 시에 탁월한 재주도 있음을 인정한 것은 호남문단을 주도했던 임억령(林億齡, 1496~1568)이다. 평소 명리(名利)를 멀리하고 청렴결백했던 그는 백광훈에게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드러냈는데 이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백광훈을 전송하며(送白光勳還鄕)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강 위에 달은 둥글었다가 다시 이지러지고(江月圓復缺)
뜰 앞에 매화는 졌다가 다시 피누나(庭梅落又開)
봄이 되었는데도 돌아가지 못한 채(奉春還未得)
다만 망향대를 오를 뿐이라(獨上望鄕臺) 

원래 임억령은 백광훈보다 나이가 39살이나 많았다. 그는 시벽(詩癖)이라 할 만큼 시를 짓는 일에 열중하여 항상 외직(外職)을 전전하였다.

조선 중기 시단을 이끌었던 임억령이 그와 사제의 인연이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임억령이 백광훈의 재주를 아껴 그의 시를 인정한 후에 세상에서 그를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백광훈은 맑고 꾸밈없는 시의 세계를 담아냈던 인물답게 조선 중기의 유학자 중에 수많은 승려들과 교유했다. 그의 발길이 닿았던 사찰만도 홍경사(弘慶寺), 보림사(寶林寺), 백련사(白蓮社), 두륜사(頭輪寺), 해임사(海臨寺), 서림사(西林寺), 보림암(蓮花菴) 등이 있다. 특히 그가 수많은 승려들과 교유했던 사실 중에 임진왜란 때에 승병(僧兵)을 모아 활약했던 처영(處英) 스님과 오랜 인연이 눈에 띤다. 그가 쓴 처영 스님에게 주다(贈處英上人)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도리어 이별을 말할 땐 마음이 바쁘더니(却來言別意)
술잔 잡고 서로 볼 제, 새벽종소리 두려워라(把酒相看畏曉鍾)
가을 풀 누런 꽃이 시들지 않았을 때 떠나더니(秋草黃花去不盡)
높고 낮은 산 어느 곳에서 홀로 지팡이를 짚고 있나(亂山何處獨携)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처영의 호는 뇌묵(雷默)으로, 휴정(休靜) 스님의 고제(高弟)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 1,000명을 모집하여 전공을 세웠던 인물이다. 실제 이들의 교유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알 수 없지만 술잔 잡고 서로 볼 제, 새벽종소리 두려워라라고 한 행간 속에 이들의 우정이 오롯이 배어난다. 더구나 그는 가을 풀 누런 꽃이 시들지 않았을 때 떠나더니/ 높고 낮은 산 어느 곳에서 홀로 지팡이를 짚고 있나라는 한 대목에서 처영 스님에 대한 살가운 정이 드러난다.

또한 두륜사(頭輪寺)의 신견 스님과도 오랜 인연은 신견 스님에게 주다(贈信堅上人)에서 드러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보슬비 내리는 춘산의 정오(小雨春山午)
텅 빈 집, 꿈속에서 학을 타고 돌아왔네(空堂鶴夢回)
객이 오자 곧 문이 닫히고(客來門政閉)
향불은 이미 반쯤 재가 되었네(香火半成灰)
해질녘 계곡의 남쪽엔 눈이 내리고(日晩溪南雪)
해상산으로 부터 스님이 찾아왔네(僧從海上山)
시를 주었던 세월, 잊었는데(贈詩忘歲月)
그대의 늙은 모습 가엾구려(憐爾舊容顔)

백광훈은 신견 스님에게 주다(贈信堅上人)끝자락에 그와의 인연을 이렇게 피력하였다.

1566년 봄에 내가 옥산에 있었는데 신견 승려가 시축을 가져왔다. 나의 시가 그의 시축에 들어있었는데도 그 날짜를 기억하지 못했다. 운천의 아름다운 자취와 시를 준 것이 모두 꿈속의 일이었으니 감격할 만한 것이로다. 마침내 지난번에 지었던 것을 다시 고쳐 쓰고 다시 이로써 잇게 하였다.(丙寅春 余在玉山 堅持軸來 吾詩亦與在中 而不記其日月 雲泉勝跡 與詩而俱爲夢想中事 可感也夫 遂改書前作 而復爲此以續之)

그가 신견 스님을 만난 것은 그의 나이 29세 때의 일로, 노수신의 문하를 떠나 옥산에 머물 때이다. 그가 남쪽의 승려 성연(性衍)과 밤이 깊도록 고담을 나눈 사실이 눈길에 띤다. 남쪽 승려 승연에게 주다(贈南僧性衍)의 내용은 이렇다.

객이 고원에 있을 때를 생각하니(客有故園思)
텅 빈 집에서 이경까지 앉아있었지(空堂坐二更)
평상 근처에 등불은 꺼지려하는데(近床燈欲盡)
휘장에 엄습한 눈, 소리 없이 내렸네(侵帳雪無聲)
멀리 역말은 산길에 막혔고(遞關山路)
물나라의 여정, 아득하여라(微茫水國程)
고향을 벗어나 서로 만나니(相逢越鄕釋)
말없어도 절로 마음을 아누나(不語自知情)

아마도 성연 스님과는 오랜 교유가 있었던 인물인 듯하다. 그러므로 고원에 있을 때를 회상하여 텅 빈 집에서 이경까지 앉아 있었다고 한 것이다. 더구나 소리 없이 눈은 내리고 밤은 깊었으니 이는 더할 수 없는 선경(禪境)을 만끽했을 것이다. 이들은 말없어도 절로 마음을 아는 사이였다고 하는 점에서 이들이 나눈 유불의 교유는 필설로 드러내기 어렵다.

한편 그가 정인 스님에게 준 해임사 정인 스님에게 주다(海臨寺 贈正仁師)에서 강남의 호젓한 절, 꽃 지는 시절에(江南蕭寺落花天)/ 십년을 노닐던 자취 아득하여라(十載遊思渺然)/ 차 솥에선 연기 오르고 향 피운 방 따뜻한데(茶鼎午煙香室暖)/ 온 산에 비바람 불 때 창문 닫고 조누나(一山風雨閉窓眠)”라고 한 것으로 보아 승방을 찾아 차를 나누던 정황도 드러난다. ! 가난했던 그의 회한을 풀어낸 도구는 시와 글씨, 그리고 차였다. 서예에 남다른 골기를 지녔던 그는 초서와 예서를 잘 썼다고 한다. 따라서 그의 예술적인 식견과 안목은 조선 중기를 대표할만한 품재를 지녔다는 평가를 받기에 족하다. 평생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누리지 못했던 그였지만 강호에 머물며 자유를 만끽했을 담박한 삶을 시어 속에 묻어두었다. 그의 자는 창경(彰卿)이며 옥봉이란 호를 썼고 옥봉집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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