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 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부 교수

참불선원 강좌불교와 뇌과학으로 조명한 자아와 무아

세상 모든 것은 찰나의 연속이고 집합이다. 우리가 믿는 자아(自我)’는 어떨까? 불교는 자아를 부정하는데 우리가 일상에서 를 인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김성철 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부 교수는 74일 열린 참불선원 불교인문학 대강좌에서 불교와 뇌과학으로 조명한 자아와 무아라는 주제로 강의했다. 그는 자아는 뇌가 만들어낸 가아(假我)이고, 실재하는 것은 매순간 일어나는 체험의 연속일 뿐이라며 결국 뇌과학은 불교의 무아설로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정리=이승희 수습기자

▲ 김성철 교수는… 서울대학교 치의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에서 〈용수의 중관논리의 기원〉이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중앙승가대와 동국대학교 서울캠퍼스 강사를 거쳐 현재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불교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티벳장경연구소장, 불교사회문화연구원장, 계간지 〈불교평론〉 편집위원장을 역임했다.

뇌과학자 자아는 뇌에서 창발
죽으면 허무쾌락적 삶 주장,
화엄학서 자아는 찰나적 경험
실재 향한 집착 끊어야 해탈

뇌과학 길잡이 불교철학
저는 불교학자로서 뇌과학에 대해 불교적 해명을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최근 10여 년 동안의 연구결과를 모아 공부하면서 얻은 성과를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전세계 종교철학 중 유일하게 불교만이 자아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를 인식하는 이유는 뭘까요? 이에 대한 뇌과학적 설명과 더불어 왜 그러한 설명이 허구적인지 불교적 관점에서 해명해보겠습니다.

현대 뇌과학은 철저히 유물론적 입장에서 뇌를 다룹니다. 다시 말해 내세, 영혼, 마음 등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직 단백질 덩어리인 뇌에서 나온 부산물로서 정신을 정의합니다. 이런 뇌과학이 이뤄놓은 성과가 엄청나므로 이와는 반대의 논의를 펼친 타 종교들은 벌써 예전부터 논리적 타당성을 의심받고 신뢰를 잃었습니다. 물론 뇌과학자들은 객관적 증거로 확인이 불가능한 영혼이나 내세 같은 개념을 과학적 관점에서 다루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객관적 증거가 없이 과학은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종교철학 중 불교만이 유일하게 뇌과학의 허술함을 설명하고, 길 잃은 현대과학에 새로운 길을 제시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일단 마음의 기원에 대한 설명부터 두 영역은 매우 다릅니다. 현대 과학자들은 물리적 뇌로부터 마음이 시작됐다고 생각합니다. 진화 과정에서 뇌가 생긴 이후에 이전엔 없던 마음이 생겼다는 가설을 창발이론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불교 화엄학에서 마음이란 뇌로부터 생긴 것이 아닙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여러분들은 바깥 풍경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여러분들이 보는 것은 망막입니다. 망막의 한 점이 넓은 세계를 수용하고, 이 작은 망막 구멍을 통해 세상을 볼 수 있는 겁니다. 이렇듯 아주 작은 한 점에 세상이 모두 담길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한 알의 티끌 속에 시방 세계가 들어있다는 뜻)’입니다.

유물론적 관점의 부작용
앞서 말했듯이 현대과학은 마음 혹은 자아란 인류 진화과정에서 생긴 뇌로부터 창발한 존재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뇌의 기능이 정지하면 우리의 마음도 사라집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에 내생이란 없습니다. 재밌는 것은 부처님 이전 시대 고대 인도에도 이와 같은 유물론자들이 있었습니다. 세속에 순응하는 이들 학파를 짜르와까라고 불렀습니다. 창시자는 브리하스빠띠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브리하스빠띠는 천국도 없고 해탈도 없으며, 영혼도 없고 내세도 없다. 사성(四姓)계급 속에서 직분을 다해도 그 어떤 효력도 생하지 않는다. 살아있는 동안만이라도 행복하게 살게 하고, 빚을 내서라도 버터를 먹게 하라. 일단 몸뚱이가 재가 되면 어찌 다시 돌아올 수 있겠는가라는 어록을 남겼습니다. 같은 학파의 대표적 인물인 아지따 께사깜발린은 인간이란 땅, , , 바람의 4가지 요소로 이뤄져 있다. 사람이 죽으면 각각의 요소로 다시 되돌아간다. 상여꾼들이 아무리 송덕문을 읊어도 결국 하얗게 탄 뼛조각만이 남는다. 공덕을 말하는 것은 공허한 거짓말이고 부질없는 헛소리다. 바보든 현자든 육체가 무너지면 완전히 사라진다. 죽음 후에는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나는 뇌가 부속품이 망가지면 작동을 멈추는 컴퓨터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부서진 컴퓨터에게 천국이나 내세는 없습니다. 그것은 어둠을 무서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꾸며낸 얘깁니다라고 밝혔습니다. 철학자 존 설은 의식이란 광합성, 음식물 소화, 세포 핵분열과 같은 생물학적 현상이다. 인간이나 짐승 두뇌의 놀라운 생산물이다고 생각했습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사상들을 인중무과론이라고 불렀습니다. 원인 속에 결과가 없다는 뜻입니다. 물론 인중유과론도 있습니다. 이 세상은 브라만이란 절대자의 반영체라고 주장하는 고대 인도의 사상들입니다. 불교는 이들 모두를 부정합니다.

현대과학은 철저히 인중무과론을 반영합니다. 진화생물학자들이 TV에 나와서 인생을 즐겁게 사십시오. 살아있는 동안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라고 말하는데 이같은 의견을 따라가서는 안됩니다. 즐겁게 사는 것보다 올바르게 사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종교의 소임은 올바른 삶을 이끄는 것인데 최근 들어 그 역할이 많이 줄었습니다. 죽기 직전까지 잘먹고 잘살아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팽배해져 있는 이유가 이 때문일 겁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는 절대로 객관화 할 수 없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서양 철학자들이 감각질(Qualia)’이라고 부르는 주관적 체험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맛본 소금의 짠 맛을 남들이 전혀 알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현대서양 철학자들은 남과 공유하는 객관의 세계와 나만 알 수 있는 주관의 세계로 나눠서 설명하지만 이것도 틀린 말입니다. 남과 공유한다고 착각할 수 있지만 정직하게 말하면 나의 관점만이 있을 뿐입니다. 감각질과 감각질이 아닌 것을 나누는 것은 잘못된 사유방식의 첫단추를 끼우는 행위와 같습니다.

부처님은 절대 나를 대상화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眼耳鼻舌身意 色聲香味觸法)’은 감각기관이 있은 후에 감각대상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마치 자동차 핸들을 잡고 앞유리로 바깥세상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보는 바를 남과 비교할 수 없어 열등감이 생길 수 없습니다. 모든 것들이 전부 다 유일무이한 절대적 체험이 됩니다.

핸들을 잡고 앞만 보는 이들은 비교하지도 않고 따라서 잘난체 하지도 않습니다. 세상 무서울 것도 없습니다. 실제로 부처님은 어떤 두려움 없이 노숙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이것이 불교의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자동차 바깥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팽배해 있습니다. 서로 비교하고 평가하는 시선이 만연할수록 높아지는 자살률이 우리 사회가 불행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불교계가 앞장서서 자동차 핸들 잡듯이 세상을 바라보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누구든지 세상의 중심이자 주인공이라고 알려야 합니다.

한 점이 빚어낸 세상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느 곳이든 다 양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한 점일 뿐이지만 이 한 점에는 모든 것들이 주관적으로 투영될 수 있습니다. 주관과 객관은 생명체에 국한된 사건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물리적 세계의 속성입니다. 화엄의 핵심을 의상대상 법성게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법성게는 한 톨의 먼지 속에 온 우주가 담겨있고, 낱낱의 먼지마다 다 그러하다고 적습니다. 모든 것을 다 비추는 거울 구슬이 인드라망의 그물에 빼곡히 차 있는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의 구슬은 다른 구슬을 모두 담고 있습니다. 구슬 하나에 점 한 개만 찍어도 모든 구슬에 점이 찍힐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평범한 세상이 아닌 비로자나 부처님의 몸이라고 일컫습니다. 세상은 어디든 완벽하고, 어디든 중심임을 알려주는 불교의 가르침입니다.

모든 사건은 발생하는 순간 우주에 가득찹니다. 방 안에서 다이얼만 맞추면 전 세계 어떤 방송이든 볼 수 있고, 전화를 걸면 통화가 가능한 이유는 방 안에 모든 것들이 다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오는 것이 아니라 호랑이가 오고 있으니 호랑이 얘기를 꺼내게 된 겁니다. 우리 뇌는 수신기와 송신기 역할을 합니다. 의미의 세계는 전부 다 전기 자극으로 전달됩니다. 그래서 반복된 행동은 파동을 일으킵니다. 기도를 간절히 반복하면 하늘에 닿는 이치가 이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관과 객관 중 어느것이 선행할까요? 지렁이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진화 초기에 지렁이처럼 단순한 생명체에게는 주관만이 존재합니다. 이후 복잡한 감각기관이 생기면서 외부를 향한 시선을 통해 비로소 객관이 구성되기 시작했을 겁니다. 현대과학은 물리적 외부 세계가 원래 존재하고 나중에 개별적 생명체에 의해서 주관 혹은 마음이 생겼다고 거꾸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천동설과 비슷한 주장입니다. 이제는 이러한 시각도 지동설의 등장처럼 획기적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FMRI는 뇌 혈관 속 산소농도를 측정해 활동중인 뇌 부위를 시작적으로 표현해 주는 기술입니다. 이를 통해 보면 나의 자아가 집중하는 부분을 확인 가능한데, 대부분 한 순간에 하나의 뇌 영역이 활성화됩니다. 마음을 한 점 식에 모을 때 그 의식이 육체에 반영된다는 불교적 설명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러한 의식은 단절없이 이어집니다. 뇌파가 멈추지 않는 이상 우리의 의식은 계속됩니다. 다만 기억하지 못한 꿈의 내용처럼 매 순간을 의식하지 못할 뿐입니다. 여러분들은 어제 아침 8시에 있었던 일을 기억할 수 있나요? 혹은 매번 바뀌는 근육의 움직임, 찰나의 생각들을 모두 기억할 수 있나요?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지금 이 순간도 잠에서 바로 깬 순간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의식에 단절이 없다는 뜻은 모든 의식이 연기(緣起)’ 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어떤 물체가 크다고 느끼는 것은 이전에 작은 물체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찰나에 일어나는 사물의 속도와 위치의 변화입니다. 의식이 사물을 미분해 속도를 계산해 감각이 지속적으로 생겨나는 겁니다. 움직임이 우리 마음 속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찰나의 움직임은 한 점이 1초에 75번 진동함을 일컫습니다. 따라서 우리 세상 전부는 점과 찰나의 조합이 만들어낸 가상의 흐름일 뿐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느끼고 있는 자아는 뇌가 만들어낸 가아(假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실재하는 것은 매순간 일어나는 체험의 연속일 뿐입니다. 이렇게 뇌과학은 불교의 무아설(無我說)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에 따르면 해탈이란 뇌의 감성적, 본능적, 이성적 영역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경우를 가리킵니다. 어느 곳에도 얽매이지 않아 모든 감성, 본능, 이성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열반에 들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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