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유현 자수장

13세에 처음 바늘 들어
통도사 팔상도로 자수불화 발심
발심 기도 10년, 완성에 12년
일본자수 벗어나 한국자수 열어
해외 포함 20여 차례 전시

맥 잇기 위해 작품 팔지 않아
“대상과 하나 되어야 의미 있어”
40대부터 불화작업만 100여 점
자수로 불교의 문화적 외연 넓혀
“죽는 날까지 바늘 안 놓을 것”

 

“은하수가 밤하늘을 수놓았다.” 또는 “꽃들이 온 세상을 수놓았다.”라는 표현이 있다. 단순히 은하수가 떠있고, 꽃들이 피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아름답다’는 표현을 하기 위해 ‘수놓았다’는 표현을 한 것이다. 이처럼 ‘수놓다’라는 단어는 쉽게 볼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의 표현으로 쓰이고 있으며, 수를 놓는다는 일이 쉽지 않은 일임을 은유하고 있는 셈이다. 은하수가 밤하늘을 수놓듯이, 꽃들이 온 세상을 수놓듯이 바늘 하나와 오색실로 한 땀 한 땀 수를 놓으며 한 평생을 살아온 이가 있다. 수를 놓아 불화를 그려온 최유현 자수장(80ㆍ중요무형문화재 제80호)이다. 박도일 수필가 jwpark4284@daum.net

심선신침(心線神針), 수선일여(繡禪一如)
2016년 5월 22일부터 29일까지 서울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는 전례를 찾기 힘든 자수 작품 전시가 열렸다. 중요무형문화재 제80호 최유현 자수장의 ‘심선신침, 최유현 자수전’이다. 최 자수장의 전시는 그동안에도 수 십 차례 있었지만 이번 전시는 서울에서는 처음 열리는 전시이며 최 자수장의 60년 자수세계를 망라한 전시였다.

연화장세계도(270×300cm), 팔상도(236×152cm,8점), 삼세불도(257×103cm, 257×128, 257×103), 지장보살도(164×190cm), 팔금강도(132×70cm) 등 그의 대표작인 자수불화를 비롯하여 그의 작품 120여 점이 전시됐다.
이번 전시에 선보인 화장세계도와 팔상도, 삼세불도 등 크기가 3미터에 가까운 그의 자수불화는 일단 보는 이를 그 크기로 압도한다. 또한 멀리서 보면 자수라는 것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세밀한 자수예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오색실은 물감이 되고, 바늘은 붓이 되어 수많은 점과 선들을 이루어 마침내 실과 물감, 붓과 바늘의 경계를 허무는 ‘자수’가 탄생하는 것이다.

도솔래의상ㆍ비람강생상ㆍ사문유관상ㆍ유성출가상ㆍ설산수도상ㆍ수하항마상ㆍ녹원전법상ㆍ쌍림열반상 여덟 그림을 말하는 ‘팔상도’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그린 그림이다. 이번 전시에 선보인 최 자수장의 팔상도는 통도사에 있는 팔상도를 그대로 자수로 옮긴 것이다. 한 작품 당 높이가 2미터를 넘는 팔상도 여덟 점은 이번 전시의 압권이었다. 붓으로 그렸다고 해도 놀라울 일인데 바늘과 실로 한 땀 한 땀 수를 놓아 완성되었다는 것을 알고 나면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리고 마지막 매듭을 짓기까지 12년(1986~1997)이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또 한 번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본래 팔상도를 비롯한 불화의 의미는 그림이라는 의미를 넘어,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고 가르침을 주기 위한 것으로 경전과 같은 것이다. 경전의 한 자 한 자에서 환희심을 경험할 수 있는 것처럼 최 자수장의 팔상도와 불화들은 같은 환희심을 불러일으킨다. 그 외 삼세불도 역시 오랜 세월이 걸린 작품으로 13년이 걸렸다.

그의 작품은 이번 전시를 통해 “한 올 한 올 그 색과 형태를 달리하는 실들이 전하는 질감과 입체감은 경이롭다.”는 평을 받았다. 그렇다 그의 자수는 경이롭다. 앞서 말한 ‘규모’에서 경이롭고, 회화와 자수의 경계를 허무는 ‘표현’에서 경이롭고, 길고 긴 작업 시간의 ‘정성’에서 경이롭다. 그리고 그 표현과 정성은 세간에서 말하는 것과는 다른 표현과 정성이라는 것에 또한 놀라움이 있다.

“단순히 그림을 모사하는 것에서 그치면 안 됩니다. 찾아낸 그림(대상)에서 또 다른 그림을 창조해야 합니다. 불화에서의 그 ‘창조’는 다름 아닌 신심이겠지요. 그리고 그 신심은 그 대상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자수(불화)는 의미가 없는 것이죠. 그렇게 ‘하나’가 되어 바늘을 들 수 있어야 12년, 13년이라는 세월을 한순간처럼 보낼 수 있는 것이고요.” 그랬다.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그의 자수불화는 눈에 보이는 놀라움과 아울러 구(求)하는 자의 면목이 있었다. 그것이 또 다른 그의 표현과 정성의 근원이었다. 그에게 바늘을 들고 앉은 12년, 13년이라는 시간은 한 만기의 안거였다. 한 땀 한 땀의 바늘 자국은 치열한 가부좌의 자국이고, 한 땀 한 땀 오색실의 자국은 ‘나’를 향해나간, ‘나’를 지워나간 삼매의 자국이었던 것이다. 그가 말하는 ‘심선신침’ 뒤에는 ‘수선일여(繡禪一如)’가 있었다.

팔상도를 보다
“어느 날, 통도사의 팔상도를 보았죠. 그리고 그 팔상도를 자수로 지을 수 있기를 부처님 앞에서 서원했죠.”
최 자수장이 유년기를 보낸 시기는 물질의 값어치보다는 마음의 값어치에 기대 살던 시절이었다. 물자가 귀한 시절이었기에 손수 만든 물건이 값을 대신하는 시절이었고 대표적으로 여성의 혼수가 그랬다. 정성으로 마음을 표현했던 것이다. 그 정성의 대표적인 물건이 자수가 있는 물건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 여성들은 자수가 일상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혼인은 일륜 중의 큰일이었다. 그 큰일을 치르기 위해 여성들은 평소 어머니 밑에서 자수를 익혔다. 최 자수장 역시 그랬다. 최 자수장은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좋았다. 무엇이든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열세 살 때 최 자수장은 바늘을 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최 자수장은 권수산이라는 그 당시 자수의 대가를 만나게 된다. 최 자수장이 열여섯 때였다. 권수산 선생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목포로 피난을 왔고, 자수 학교를 세웠다. 최 자수장은 권수산 선생이 세운 자수 학교에서 자수를 체계적으로 익히게 된다. 그리고 1960년대 초, 최 자수장은 그 동안 공부한 전통 자수를 널리 알리고 나누고자 ‘최유현자수연구소’를 개설해 후학을 양성하기에 이른다. 최 자수장은 우리 자수의 맥을 잇고 우리 자수의 영역을 넓히기 위한 창작 활동을 해나갔다. 생활 속에서 사라지는 자수가 아닌, ‘작품’으로 남아 자수의 저변을 넓히는 자수를 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작품이 모이면 전시를 열었다. 1970년대~1980년대에는 열악한 여건에서도 해외 전시를 다섯 차례나 열었다. 권 선생을 만나기 전인 10대와 20대에 규방의 전통 문화에 바탕을 둔 자수를 익혔던 그는 권 선생 밑에서 자수의 눈을 뜨게 됐고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그 때까지의 자수에 적지 않은 회의를 품게 된다.

석가모니불도
“어느 정도 자수에 눈을 뜨고 나니 회의가 밀려왔어요. 왜 같은 것만을 답습하는지 답답했습니다. 좀 더 새로운 자수의 소재를 찾고 싶어졌던 거죠.”

그랬다. 당시는 일제강점기 문화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모든 문화가 그랬다. 그 암울한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자수 역시 국적 없는 자수에 매몰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다. 최 자수장은 그런 시대적 배경을 깊이 체감했던 것이다. 그는 한국 전통의 문양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더 이상 일본 자수에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는 한국의 민화와 옛 유물에 깃들어 있는 다양한 문양과 조형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들을 밑그림으로 하여 수를 놓기 시작했다. 한국 자수는 새로운 길을 걷게 된 것이다. 하지만 최 자수장은 민화와 옛 유물에서도 만족할 수 없었다. 그도 어느덧 40줄에 들어섰을 때였다. 우연히 찾게 된 통도사에서 그는 팔상도를 보게 된다. 그는 무릎을 쳤다. 결론은 ‘불화’였다.

“하지만 팔상도는 엄두가 나지 않았죠. 그래서 일단 자그마한 아미타부처님을 모시는 것으로 조심스러운 시작을 했죠. 저의 첫 자수불화는 아미타부처님이었죠.”

그렇게 불화에 눈 뜬 최 자수장의 가슴 깊은 곳에는 늘 팔상도가 있었다. 언제가 팔상도를 자수로 짓고 싶었다. 그는 틈이 나면 통도사를 찾아 부처님 앞에서 기도를 올렸다. 팔상도를 짓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를 올린 지 10년이 되었을 때 최 자수장은 팔상도의 첫 바늘을 심게 된다. 기도에 10년, 완성에 12년, 20년이 넘는 세월이 걸린 셈이다. 그렇게 최유현의 팔상도는 태어났다. 그는 40대부터 거의 불화를 중심으로만 작품 활동을 이어왔으며, 지금까지 100여 점이 넘는 불화를 자수로 옮겼다.

“작품, 팔지 않아요”
2014년부터 부산대(복식문화연구소)에서 석좌교수로 재직하며 후학을 기르고 있는 최 자수장은 이제 다음 세대에 대한 염려로 강단에 선다.

“우리는 조상으로부터 자수라는 매력 있는 문화를 물려받았어요. 또한 그 속에는 불화라는 무궁무진한 환희심의 세계가 있어요. 계승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하지만 자수의 매력을 알면서도 힘든 작업이기 때문에 끝까지 하려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시작하는 이도 많지 않지만 그마저도 도중에 그만 두기가 허다한 상황입니다.”

최 자수장은 그동안 만들어온 그의 작품을 한 점 도 팔지 않았다. 그 이유는 본인의 자수와 더불어 우리 자수의 맥을 잇고 싶은 염원에서다.

“작품을 잘 보존해서 여러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전시하면 이 어려운 일이라도 해보겠다는 후학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지요. 자수는 느림의 미학이고 정성의 미학이죠. 힘든 작업이라는 생각을 가지면 할 수 없어요. ‘느림’과 ‘정성’을 받아들일 때 바늘을 들 수 있어요. 저의 자수가, 불화가 그 믿음을 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죠. 무언가 눈으로 보아야, 감동을 받아야 발심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지요. 부디 저의 자수를 보고, 불화를 보고 발심하는 이가 많았으면 좋겠어요.”

연화장세계도

“자수하면서 부처님 가까이 갔죠”
“저는 ‘초파일 신자’였죠. 불화를 알게 되면서부터 부처님 가까이 가게 됐죠.”

불교와의 인연을 묻자 최 자수장은 그렇게 답했다. 최 자수장은 한 땀 한 땀 부처님을 짓고 연화세계를 지으면서 불법에 다가가게 됐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대상과 하나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바늘을 드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기 때문에 부처님 마음에 다가가지 않고는 진정한 불화를 그려낼 수 없었던 것이다. 최 자수장의 자수에 대한 평가 중에는 “최유현 자수장의 작품에는 ‘창조’가 있다. 단지 옛것을 그대로 베끼어 옮김이 아닌 그만의 정감 있는 시선과 격조 높은 미의식을 담고 있다. 그리하여 천진난만하며 자유분방한 민화에서 불화자수로 넘어가면 장엄한 아름다움으로 이어져 보는 이에게 깨달음을 준다.”는 평가가 있다. 이는 최 자수장의 자수가 자수라는 분야의 영역을 확장시켰다는 의미와 함께 불교의 외연을 문화적인 측면에서 넓혔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 5천 여 명이 다녀갔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지금은 신중탱화를 하고 있어요. 7할은 된 것 같아요. 그것이 완성되면 관세음보살도를 시작하려고 해요. 얼마나 더 살게 될지 모르겠지만 제 곁에 바늘과 실이 있는 한 계속할 생각입니다.” 여든의 그이지만 그가 추구하는 예술과 신행은 초심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간절한 예술과 신행에서 전법의 새로운 희망을 본다. 그의 간절한 바늘 한 땀 한 땀이 불국토와의 거리를 한 뼘 한 뼘 좁혀주기를 희망한다.


최유현 자수장은…
16세 때 스승인 권수산 선생 문하에서 6년 간 공부하며 자수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 후 부산여중과 부산여고에서 수예교사로 재직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국전에서 두 차례 입상했으며, 1960년에 최유현자수연구소를 개설했다. 해외를 포함해 20여 차례의 전시를 열었다. 대한민국 전승공예전에서 ‘연화장세계’를 비롯한 자수불화로 대통령상, 국무총리상, 문화부장관상, 문화재위원장상 등을 수상했으며, 그 외 부산시 문화대상, MBC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1996년에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80호 자수장으로 지정됐다. 현재 부산대 복식문화연구소 석좌 교수로 재임 중이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