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속에서 나오는 것 그 속에다 다시 입력을 하라

이 세상만사가 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기 때문에
“색은 공이요 공은 색이니라.” 했던 겁니다.

모건힐지원에서 여러분과 같이 이렇게 2년 만에 다시 만나 뵙게 돼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평상시에 생활을 하면서도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디서 왔는지, 지금 무엇을 하며 어디로 가는지 그것을 모두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 말씀도 그렇고, 사대 성인들이 전부 말하기를 “너부터 알아라.” 했습니다. “너부터 믿고 너부터 알고 너부터 진화시켜서 즉, 창조를 해라.” 하는 이런 가르침을 주셨는데 그것은 실천궁행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실천궁행을 할 수가 없다면 물질세계의 50%에만 극매게 되는데, 정신계의 50%와 물질계의 50%를 같이 상응하면서 같이 작용하는 그런 자유스러운 삶이 돼야만이 그래도 우리가 불자라고 하며 그래도 사람으로서 산다고 할 것입니다.

우주의 근본도 인간의 마음에 직결이 돼 있다고 봅니다. 이 세상만사에 모두 연결이 돼서 돌아가는 법계의 뜻도 바로 우리네 마음의 근본에 연결이 돼 있는데, 그것을 가설이 됐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게 그냥 혼자 돌아가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물질계를 본다 하더라도 혼자 돌아가는 게 없고 정신계를 본다고 해도 그냥 돌아가는 게, 혼자 돌아가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같이같이 돌아갑니다.

회사에 사장이 있으면 직원이 있고 직원이 있으면 사장이 있듯이 필연적인 인연의 법칙, 이 자체가 바로 우리의 발전도 가져오게 할 수 있고, 바로 창조력을 기르게 할 수 있고, 지혜력을 기르게 할 수도 있고 창조를 해내게 할 수도 있는 근본입니다. 우리 사람들은 못 듣고 못 보면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보지도 못했고 이름도 모르고 맛도 모르는데 어떻게 마음으로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들어야 하고, 봐야 하고, 먹어 봐야 맛을 알고 하는 도리가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 자체가 꼭 알아야 할 일이 너무도 많고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그냥 갈 수는 없는 도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 수, 화, 풍 이 자체가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몸뚱이, 이것의 바탕이 돼서 있는 겁니다. 이 지수화풍이 인연에 따라서 즉, 물과 흙과 바람, 이것이 암흑세계에서부터 그 인연에 따라서 같이 뭉치다 보니까 온기가 생기고, 그래서 바로 불도 거기에 잇따라서 네 가지가 돌아가게 되니까 즉, 미생물이 생기게 된 것이라고 봅니다. 그 미생물로 인해서 바로 우리가 암흑 속에서 광야를 찾았고, 또는 광명을 찾았고 자력을 찾았고, 통신력을 찾았고 전력을 찾았고, 모두가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이 바탕, 이 지금 지수화풍의 바탕이 그냥 아무것도 아니라고, 허무하다고 하진 마세요. 허무하다고 그러는 게 아닙니다. 허무한 게 아니라 불을 들어오게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어떠한 물질체라고 볼 수 있겠죠.

그러니까 우리가 있기 때문에 지수화풍이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지수화풍이 있기 때문에 그걸 바탕으로 해서 자력 광력 전력 통신력, 이 네 가지가 여러분 앞에, 각자의 앞에 주어져 있습니다. 물이 있어야 전력이 있듯이 말입니다. 네 가지 요소로 인해서 우리는 마음대로 자유스럽게 살 수 있는 여건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은 ‘할 수 없다’라는 것의 관습에 의해서 ‘이거는 할 수 없고 이거는 할 수 있고’ 이런 문제가 천차만별로 돌아가기 때문에 거기까지 넘어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네 가지 요소가 여러분 앞에 주어져 있느니만큼 우리가 이름해서 오신통이라고 하는 이름을 가졌습니다. 그것도 역시 별다른 게 아닙니다. 여러분 각자에게 다 주어져 있는 이름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이름입니다. 정신계와 물질계가 서로 작용해서 우리가 살아나간다는 그 요소만 안다면 바로 ‘마음의 눈. 일체 모든 것을 다 들을 수 있는 마음의 귀. 남의 속을 모두 읽을 수 있는 마음, 또는 과거에 내가 나기 이전에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지를 알 수 있는 거,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악업 선업이 주어진다는 그 사실을 알 수 있는 것, 숙명통.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오는 그 자체가 신족통. 천안통, 천이통. 천이통은 들을 수 없는 걸 듣는 것. 천안통, 천이통, 타심통, 신족통, 숙명통.’ 이 다섯 가집니다. 이 다섯 가지를 그냥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겁니다, 가지고 있는 거.

아까도 얘기했듯이 ‘네 가지 요소가 주어져 있기 때문에 즉, 지수화풍이 우리에게 바탕이 돼 있기 때문에 광력이나 전력, 자력, 통신력은 주어져 있다. 광력이나 전력, 자력, 통신력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오신통을 그대로 우리가 굴리고 돌아가는 것이다.’라는 얘깁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물질계의 50%만 알거나, 정신계의 50%가 같이 상응하면서 작용하는 줄 알면서도 실천을 할 수 없는 이런 데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기울이질 않기 때문입니다. 한 번도 거기에 기울임이 없기 때문에 한 짝 절름발이입니다. 발 하나는 요만하고 발 하나는 이만하고 그래서 절름발이입니다, 이게. 절름발이로 사니 얼마나 부자유하겠습니까. 그래서 오신통이라는 이름 자체가 주어져 있는 게 아니라 근본, 실천할 수 있는 그 자료들이 여러분에게 그냥 주어져 있다는 얘깁니다. 이 마음의 공부를 해서 실천을 할 수 있는 그 실험을 해 본다면 그대로 주어져 있다는 것을 아마 본인들이 더 잘 알고 갈 겁니다.

그런데 그 다섯 가지 가운데 숙명통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지금 시쳇말로 비교한다면 컴퓨터입니다. 이 컴퓨터에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일거일동이, 아주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이 일거일동 거기에 입력이 돼 있습니다. 입력이 돼서 솔솔 현실에 나오는 것입니다. 나오니까 여러분한테 얘기하기를,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입력이 돼서 자꾸 현실에 나와서 애고, 업보, 또는 유전성 또는 영계성, 세균성, 이 모두가, 애고가 그냥 차례차례로 나한테 입력된 대로 나오는 것입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느냐. ‘나오는 것을, 그 입력이 돼서 나오는 데다 다시 입력을 해라.’ 이 소립니다. 다시 입력을 해라. 그 속에서 나오는 것을 그 속에다가 다시 입력을 해라. 거기다가 입력을 다시 하면 앞서 입력된 게 없어짐으로써 그릇은 항상 빈다. 넣으면 비고 넣으면 비고 항상….

그리고 ‘모든 망상을 끊는다’라고 하는데 끊는다가 아닙니다. 망상이 나질 않으면 법을 이룰 수가 없고 목석입니다. 망상이라는 이름은 이름해서 망상이지, 우리가 정신계와 물질계가 작용하는 그 과정이, 자기도 모르는 문제들이 자꾸 꼬리에 꼬릴 물고 나오는 거죠. 그런데 자기 마음으로 자기를 다스리는 법이 있습니다. 나쁘게 돌아가거나 남을 해하게 돌아가거나 우리 가정에 해가 될 수 있는 문제라든가 또 모순이 있는 문제라든가, 어떠한 문제라도 잘못되는 것은 ‘아, 이러면 안 돼! 이런 것도 주인공에서 나오는 거니까 주인공에서 해결해야지.’ 하는 것은 자기 자성, 이 내면세계에 모든 것을 맡겨 놓고 ‘거기서만이 해결을 할 수 있다. 거기서만이 애고를 무너뜨릴 수 있다.’ 하는 거죠. 기도가 아닙니다. 관입니다. 즉발 들어가는 관입니다. 기도라는 건 둘이 되니까요.

그래서 항상 그렇게 놓으면서 맡기면서 실험하고 체험하고 또는 관해 보고, 이렇게 하는 것이 참선입니다, 참선. 좌선 입선 와선 행선, 이것만 참선이라고 오해해서는 아니 됩니다. 좌선을 하고 앉아만 있다고 해서 ‘아, 이럭하면 그 무상 시대를, 모든 걸 간파할 수 있겠지.’ ‘나를, 참나를 찾을 수 있겠지.’ 하는 건 오산입니다. 왜냐하면 벌써 사람들이 좌선을 하게 되면 좌선을 한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어갑니다. 그렇게 좌선을 한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어가면서 또 다 했으면 다 했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어갑니다.

그렇다면 앉았을 때만 지구가 돌아가고 다 했을 때는 지구가 안 돌아가나요? 이 세상만사가 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기 때문에 “색은 공이요 공은 색이니라.” 했던 겁니다. 이 모두가 그렇게 해서 돌아가는데, 참선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천하면서 관해 보고 물러서지 않는다. 믿는다. 자기 자성불을 믿어야지 뭘 믿습니까? 이름을 믿습니까, 허공을 믿습니까, 형상을 믿습니까, 중들의 고깃덩어릴 믿습니까? 뭘 믿습니까? 무식한 말로 예전에 어떤 사람이 “당신은 뭘 믿소?” 하니까 “내 주먹을 믿습니다.” 이러더군요, 하하하.

그런데 그렇게 좌선이라는 것도 참선의 한 부분이요, 와선이라는 것도 한 부분이요, 행선이라는 것도 한 부분이요, 입선이라는 것도 한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모두를 첨보해서 “일상생활이 즉 참선이니라.” 했던 겁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살아 보시지마는 뛰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뛰는 이런 시대가 됐습니다. 그렇게 안 하면 안 되리만큼 말입니다. 그 생각하면서 뛰는 것이, 뛰면서 생각하는 것이 그대로 참선이며, 그대로 여러분의 정신계와 물질계가 작용하는 바로 삶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선이라는 것이 무엇을 가지고 참선이라는가. 일상생활 자체를 그대로…. 자기가 즉, 이 나뭇가지, 이파리, 이것이 그대로 뿌리 때문에 자라는 거기 때문입니다.

뿌리에다가 거름도 주고 물도 주고 모든 걸 이렇게 해야 할 텐데 그것은 어디로 갔는지 뿌리는 생각지도 않고, 어떠한 종교를 막론해 놓고 바깥으로 이 가지를 붙들고 이파리를 닦아 주고 씻어 주고 온통 이름을 부르고 타의에서 구합니다. 그럭해서야 어떻게 공덕이 되겠습니까. 공덕이라는 것은 정신계 물질계가 서로 같이, 우주 전체가 같이, 이 지금 블랙홀이 돌아가듯 같이, 생명의 근본이 같이 돌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공생·공용·공체·공식화 하고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도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 이 주인공 자체는 바로 생명의 근본이요, 마음 내는 거요, 마음을 내면 육신이 움죽거리는 거요, 이 삼합이 같이 작용하는 것을 주인공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것도 더 세밀하게 말하자면 고정됨이 없기 때문에 그냥 너의 주인이자, 주인이 고정되게 있는 게 아니라 그냥 공해서 찰나찰나 돌아가고 있다는 그 사실을 이름으로 지어서 주인공이라고 한 겁니다.

여러분 가정에서도 그렇듯이 아버지의 이름도 있고 남편의 이름도 있고 또는 형님의 이름도 있고 사위의 이름도 있고, 모두 이름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이름에 의해서 “여보!” 하면 “왜 그래?” 하고 자동적으로 말과 뜻과 행이 그냥 남편으로 돌아갑니다. 안 그렇습니까? “아버지!” 하고 들어오면 금방 그냥 걸림도 없이 찰나에 그냥 “어디 갔다 오니?” 하면서 아버지 노릇을 아주 천연덕스럽게 합니다. 부모가 “얘, 아무개야!” 부르면 “예, 왜 그러십니까, 아버님?” 하고 천연덕스럽게 아들 노릇을 합니다. 그렇듯이 이 부처님 법도, 부처님의 마음으로서 지어 놓은 그 이름도 바로 동방에는 아촉이요 서방에는 아미타요, 이 사바세계에는 관세음이요 지천국에는 지장이요, 바로 이렇게 이름이 있는 것입니다. 이 마음으로 이름을 지어 놓지 않아도 여러분이 장가가고 시집가고 뭐 그러면 이름이 오만 가지로 많아지죠. 그건 자동적입니다. 부처님의 그 마음에서 나오는 이름도 자동적으로 이름이 주어지는 겁니다. 칠성부처의 이름도 있고 약사부처의 이름도 있고 독성님의 이름도 있고, 용궁님의 이름도 있고 지신의 이름도 있고, 이름이 허다히 많습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이름이 있듯이. 어떤 사람이 병고에 휘달려서 오면 그냥 화해서 약사가 돼 버리고, 여러분도 “아버지!” 그러면 아버지가 돼 버리지 않습니까? “여보!” 그러면 남편이 돼 버리고요. 그러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모두가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선이라는 것은 어떠한 것이 참선인가. 실천궁행 하고 돌아가는 것이 참선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앉아서 좌선하고 또는 명상하고 단전호흡 하면서 자기를, 참자기를 찾겠다고 운운하는 거, 그건 어불성설입니다. 그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생활 속에서, 여러분이 이 땅을 걷다가 엎드러지면 어딜 짚고 일어나십니까? 어딜 짚고 일어나십니까? 땅을 짚고 일어나죠? 땅을 걷다가 땅에서 엎드러지면 땅을 짚고 일어나죠. 그거 기정사실입니다, 이열치열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런 거와 같이 여러분의 이 생활에서 일체 만법 천차만별로 나오는 데다가, 거기다가 되맡겨 놓는 것입니다. 맡겨 놓고 관해 보면서…, 그래서 관세음이라고 이름을 한 겁니다. 이 세상에서 지켜보면서 또는 체험하면서 그리고 말하면서 인간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즉 여러분이 보살입니다. 부처 속에서 중생이 나왔고 중생 속에서 부처가 있는 거지, 어디 부처가 따로 있고 중생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정신계, 정신계 하지만 정신계와 물질계가 어찌 따로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집을 짓는다고 마음으로 안에서 생각을 할 때 바깥으로 나와서는 설계를 합니다. 설계를 다 해 놓고는 안으로 또 들입니다. ‘저거를 어떻게, 돈 출처와 모든 것을 어떻게 채비를 해야 집을 다 지을 수가 있는가.’ 하고 안으로 들입니다. 안으로 들여서 바깥으로 또 냅니다. 집을 짓습니다. 이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의 일체 만법을 들이고 내는 데에 여러분의 정신계와 물질계가 같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같이 돌아가건만 여러분이 이 생각 자체로서 정신계는 하여튼 모르는 겁니다. 한 번도 생각해 보는 일이 없고 항상 이거를 ‘어떻게 돈을 벌어야 잘살 수 있나. 어떻게 자식들을 잘 가르칠 수 있으며 어떻게 잘되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가 고통을 안 받고 살 수 있을까.’ 그냥 오직 그것만 생각하는 겁니다. 뿌리에다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면 저절로 나무는 자라고 저절로 가지 이파리가 싱싱해질 테고, 열매가 스스로 열릴 테고 열매는 스스로 익을 테고, 제 나무에서 익어서 제 나무에서 맛을 내면서 온갖 사람들이 한생각만 해도 모두 공덕이 되게끔, 그 물을 못 먹어서 갈증나는 사람들에게 갈증을 면해 줄 수 있는 그 마음의 도리, 창조력이 있건만 말입니다.

어떤 종교를 막론해 놓고 ‘타의에서 구한다’ 이런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떡이나 해 놓고 밥이나 해 놓고 빌고 목탁이나 치는 것이 중의 노릇이 아닙니다. 중이라는 것은 희지도 않고 검지도 않고, 그 가운데 바로 중입니다. 순색입니다. 불교라는 단어가 어느 한군데 국한돼 있는 게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의 근본이 불이요, 정신계와 물질계가 서로 이 사생, 일체 우주 전체가 서로 교환하고 돌아가는 것이 바로 교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따로 있고 불교 따로 있고, 가톨릭교 따로 있고 통일교 따로 있고, 원불교 따로 있고 티베트 불교 따로 있고, 죄 따로따로 여러분이 마음으로 정해 놓은 겁니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그랬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으로 그렇게 정해 놓은 거지 지구가 반쪽 쪽쪽이 쪽쪽이 났습니까? 여러분은 한 치도 내다보지 못합니다. 이 지구가 버스라면 버스 안에 들어서 어디로 끌고 돌아다니는지 내다보질 못하고 가고 있습니다, 지금. 그러면서도 어떻게 종교인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래도 내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쯤은 알아야 종교인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바깥으로 끄달리고 신을 찾고 내 신은 팽개치고, 자기 자성신은 팽개치고 딴 신을, 이름 신(神), 그거를 찾느라고 온통 야단입니다. 내가 이 찾는 법을 그전에도 얘기했지만 한 번 더 얘기하죠. 여러분이 수박이라면 수박씨를 어디서 찾아야 되겠습니까. 작년 수박씨를 올봄에 심었는데 심은 것이 싹으로 화했습니다, 씨가. 인젠 씨가 아닙니다. 싹으로 화했습니다. 여러분입니다. 그 싹에서 수박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익었습니다. 익었는데도 아, 이 씨가 싹으로 화했는데도 불구해 놓고 내가 나오기 이전 싹, 씨를 찾느라고 바깥으로 온통 야단들입니다. 그게 되겠습니까? 일단은 나의 안에, 수박 안에 씨가 들어 있는 거를 탁 잘라서 그 수박 맛을 봐야, 수박 맛을 볼 줄 알아야 그 씨도 거기서 나오죠. 그럼 그 씨를 되심으면 이 일체 중생들을 다 먹이고도 또 그 씨는 되남습니다. 영원토록 말입니다. 이게 공덕입니다.

이게 천체가 내 손 아님이 하나도 없으며 내 도량 아님이 하나도 없고 내 아픔 아님이 하나도 없고 내 몸 아님이 하나도 없고, 모두가 나 아님이 하나도 없느니라. 그래서 이렇게 응해 달라고 염원하면, 그냥 이 마음의 주인공을 염원하고 모든 걸 거기다 맡겨 놓으면, 아버지 노릇 하고 남편 노릇 하듯이 자동적으로 찰나찰나 들고 나면서 바로 한마음으로서 작용을 하는 겁니다. 용광로에다가 쇠나 뭐 이런 거 넣으면 자동적으로 새 쇠로다가 생산이 돼서 나가듯이 말입니다. 말로 어떻게 다 하리까, 이 세상 팔만대장경을. 바로 이 세상 돌아가는 게 팔만대장경입니다. 그리고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이 끼리끼리 모여 있습니다. 시장 바닥을 가 봐도 끼리끼리 상점에 놓여 있고 금방에 가 보면 금이 모여 있고 또는 무쇠전에 가 보면 무쇠만이 모여 있고, 넝마전에 가 보면 넝마만 모여 있고 빈 병전에 가 보면 빈 병만 모여 있고, 허허허…. 사람들도 모두 끼리끼리 모여서, 상인은 상인들대로 모이고, 안 그렇습니까? 정치인은 정치인대로 모이고. 차원의 그릇대로요. 친구들을 이렇게 사귀어도 자기에게 알맞는 그릇대로 사귑니다. 이게 끼리끼리 돌아가고 있는 겁니다. 끼리끼리 돌아가고 있지만 모든 거를 본다면 둘이 아니게 또 돌아가고 있으니 ‘둘이 아닌 까닭에 바로 너가 있고 내가 뚜렷하게 있구나.’ 하듯이 말입니다.

이 세상만사가 다 그러한 것이니까 똑똑히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삶 속에서 바로 여러분부터 알아야 합니다. 소크라테스도 그러한 말을 해서 그만, 그때는 미거하고 어리석은 시절이 돼서 약사발을 안겼지마는, 달마 대사도 그러했고요, 그런 시대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기복으로 돌아가는 이 법은 조선 시대 초기 때부터 중간으로 들어서면서 탄압을 너무 세게 받은 터라 스님네들이 공양미만으로는 턱없이 모자라니까 여기 놓고 빌고 저기 놓고 빌게끔 해 놨던 것입니다. 그랬는데 그것이 관습으로 돼서 오늘날까지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불교뿐만 아니라 이것은 기독교도 그렇고 가톨릭교도 그렇고 모든 게…. 여러분, 보십시오. 자기가 잘못해 놓고도 신부님한테 가서 고해 성사를 합니다. 이것은 모두 가식입니다. 자기가 뿌려 놓은 거 자기가 거둬야지 어디 가서 하소연한다고 그 뿌린 것이 해결이 됩니까.

어저께도 얘기했지만 흑인이 흑인을 낳지 백인을 낳는 건 보지 못했습니다. 나는 어저께, 그렇게 알면서도 ‘참, 철두철미하구나! 어쩌면 이렇게 철두철미할까.’ 흑인이 어린애를 낳아서, 까만 사람이 까만 아이를 끌고 까만 초콜릿을 먹이면서 가는데 내가 너무 기가 막혀서 웃었습니다, 속으로. ‘허허, 세상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이 어쩌면 저렇게 한 치의 에누리도 없을까.’ 하고 말입니다. 이 세상만사가 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을 보고 인식을 하면서도 다른 거는 또 생각지 못합니다. 하나하나 내가 마음먹고 행하고 하는 것이 입력이 된다는 것을요.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서 자동적으로 요다음 생에 다시 진화돼서 바꿔 나올 때 바로 모습을 어떤 걸로 가져 나와야 될까도 생각 안 해 볼 수가 없죠. 물론 우리 같은 사람은 지렁이가 되든지 구더기가 되든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마는 말입니다. 삶은 다 똑같으니까 말입니다. 차원이 다르고 모습이 달라서 그렇지.

어떤 사람은 너무 불효를 저지르고 그래서 “저놈은 죽어서 꼭 소가 될 거야. 미련스럽기만 하고 말이야.” 이러고 항상 그랬는데 아, 딴은 죽어서 소가 됐답니다. 자기네 그 외양간에서 새끼를 낳았는데 말입니다, 그 새끼가 그 어미한테는 안 가고 자꾸자꾸 그 주인 부부한테 자꾸 비비고 그렇게 매달리거든요. 그래서 하도 신기하고 이상해서 아이, 매물을 주면 먹지 않고 말입니다, 아, 콩이나 이런 거 쒀서 다시 줘야만 먹고 이러니 아, 이것도 큰 문제가 아닙니까? 그래서 하루는 어느 스님이 오시니까 그 스님한테 여쭤 봤더랍니다. 그랬더니 “그 소는 당신이 죽으면 미련스럽게 소가 될 거라고 그러던 아드님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나니까는 너무나 엄청난, 기가 막힌 일이거든요. 그러니 그 소는 소의 모습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소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 아닙니까?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냥 그 콩하고 짚하고 썰어서 삶은 여물을 쒀서 먹이는 데도 새끼와 어미, 그것이 다 같이 먹도록 그 스님이 그냥 놔두라고, 그거는 자기가 해 놓고 자기가 받은 거기 때문에 자기가 그 길을 걸어 봐야 알 바가 있을 거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는 그냥 소의 모습을 가졌으니 소 행동을 해야지 별 수 있나요? 아무리 속으로는 ‘내가 사람이었는데….’ 하더라도 소 허물을 썼으니 소 행동을 해야지 별 수 없거든요. 그러니 아무리 애탄지탄하고 사람들한테 발버둥이치고 하소연을 하고 음매음매 하고 애를 써도 그거는 사람들한테는 아주 전연 다른 세계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1992년 7월 26일 모건힐지원 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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