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 동국대 경주캠 불교학부 교수

참불선원 불교인문학 강좌중관논리와 역설

대승불교의 기초가 되는 공사상은 인간을 포함한 일체만물에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가르침이다. 하지만 이를 두고 많은 사람들은 허무주의를 떠올리곤 한다. 과연 공사상은 허무한 것일까? 김성철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는 627일 참불선원 불교인문학 강좌서 중관논리와 역설을 주제로 강의했다. 김 교수는 중도적 사고방식은 구분이 야기하는 허무함을 폭로해서 감성·지성 번뇌를 사라지게 하고, 결국에는 열반에 드는 길로 안내한다고 설명했다. 정리=이승희 수습기자

 

서양, 수학적 논리 한계에 봉착
근대에 불교 접목해 해결책 모색
논리로 구축된 분별된 개념 모두
연기설에 위배돼 역설드러나

▲ 김성철 교수는… 서울대학교 치의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에서 〈용수의 중관논리의 기원〉이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중앙승가대와 동국대학교 서울캠퍼스 강사를 거쳐 현재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불교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티벳장경연구소장, 불교사회문화연구원장, 계간지 〈불교평론〉 편집위원장을 역임했다.
가장 심오한 ()’ 사상
흔히들 수학을 서양과학의 꽃이라고 말합니다. 수식으로 자연현상을 모두 표현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근대에 들어서 수학은 논리적 한계에 부딪힙니다. 수학자들이 만고불변의 법칙으로 여겼던 수학적 사유에 한계를 느낀 겁니다. 머릿속에서 관념으로 사유하던 수학자들은 반성하기 시작했고, 근대에 와서야 수학에 불교를 접목해 해결책을 모색했습니다. 불교에선 사람이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을 믿지 않습니다. ‘머리 굴리며 사는 것은 세상의 진실과 전혀 관계없다는 부처님 가르침을 무명타파의 지혜로 여깁니다. 반야심경금강경같은 경전에서 다루는 ()’ 사상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한 것이 중관학입니다.

중관은 범어로 ‘Madhyamaka’입니다. ‘Madhya’가운데혹은 중간을 의미하는 형용사인데 여기에 최상급어미 ‘ma’가 결합된 단어입니다. 뜻풀이 그대로 가장 가운데 것을 추구한다는 의미입니다. 창시자는 용수 스님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800년 전에 태어난 용수 스님은 제2의 부처 혹은 대승불교의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불화 속에선 지혜를 상징하는 뱀과 함께 묘사되는 스님입니다. 그리고 용수 스님의 사상을 조론(肇論)으로 펴내고 중관이란 단어를 최초로 쓴 분이 승조 스님입니다. 서양철학자들은 중관학을 가장 심오한 사상이라고 꼽아 연구에 매진했습니다. 사실 신라 때 원효 스님이 중관에 대해 해석한 책을 냈지만 소실됐습니다. 그 후 천 년 동안 연구되지 않다가 근대에 다시 중관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불교계에서 가장 중요한 사상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용수 스님은 중론회쟁론을 저술했습니다. 중론은 ()’을 파헤쳐 해명한 학문입니다. 당시 중론이 널리 퍼진 이후 공사상에 대한 오해도 함께 퍼졌습니다. 다시 말해 모든 게 공하다면 부처님 말씀도 공한 것 아닌가?’ 혹은 모든 게 공하다는 말 자체도 공하지 않은가?’ 등 의견이 난무했습니다. 회쟁론에선 이러한 의혹들을 차근차근 해명했습니다.

중관사상은 제법무아에 대해 끝까지 분석해 폭로합니다. ‘부처님법조차 초탈한 법무아의 경지를 열반이라고 칭하며, 소승불교가 놓쳤던 부분들까지 상세히 짚어냅니다. 대승불교야말로 철저히 부처님 근본 가르침으로 돌아가는 사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티베트 불교에서 중관학은 매우 중요합니다. 티베트는 드러낸 가르침인 현교와 아무에게나 가르치지 않는 밀교로 나눠 가르침을 전수합니다. 현교를 수행하는 사람 중에서 자비심이 넘치고 이기심이 전혀 없는 사람을 골라 밀교를 전합니다. 현교 가르침 중 최고로 치는 것이 바로 중관학입니다. 현교 수행법은 내가 죽는다는 생각을 자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죽음에 대한 명상을 완성해야 합니다. 죽음에 대한 명상이 없는 종교 활동은 동아리 활동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기 죽음에 대해 철저히 자각할 때 진정한 신심이 생깁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의 가르침은 하늘나라에서도 태어나지 말라고 합니다. 하늘나라에서 복이 다하면 다시 지상으로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상대적 행복의 세계는 항상 무상하기 때문에 벗어나는 것이 해탈입니다. 머릿속에서 빚은 탐욕이 모두 허구란 사실을 폭로하는 것이 중관학입니다. 삶과 죽음조차 원래 없는 것인데 머리가 만든 것이란 사실을 깨달으면 탐욕이 저절로 없어지며 흔히 말하는 아라한이 돼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모든 논리학의 허점 자가당착
중관학은 초기불전의 연기설에 근거해서 공사상을 논증하기 때문에 연기의 논리학혹은 공의 논리학으로 불립니다. ‘()논리학이라고도 합니다. 인간의 논리적 사유 전체를 비판하기 때문입니다. 중관학은 삼단논리 중 어떤 단계도 실체가 없으며 다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개념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인간의 논리적 판단은 총 4가지 관점에서 비판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증익방(增益謗, 의미 중복의 오류 비판)’ ‘손감방(損減謗, 사실 위배의 오류 비판)’ ‘상위방(相違謗, 상호 모순의 오류 비판)’ ‘희론방(戱論謗, 언어 유희의 오류 비판)’입니다.

예를 들어 비가 내린다는 문장을 볼까요? ‘내린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그래서 내리는 비가 내린다는 의미가 중복됩니다. 그렇다면 내리지 않는 비가 내린다는 말이 안 되죠. 사실에 위배됩니다. ‘내리면서 내리지 않는 비가 내린다는 더욱 말이 안 됩니다. 상호 모순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내리는 것도 아니고 내리지 않는 것도 아닌 비가 내린다는 말장난에 가깝습니다. 모두 오류에 빠진 문장들입니다.

문제 하나를 내겠습니다. 여러분, 수평선은 하늘에 속할까요, 바다에 속할까요? 틀림없이 하늘과 바다가 모여 수평선을 만들었지만 어느 한 쪽에만 속하지도, 양쪽 모두에 속할 수도 없습니다. 물론 양쪽 모두에 속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이렇듯 세상 모든 논리는 언어도단에 빠져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세상 자체는 분절된 언어로는 도저히 사실 그대로 표현이 불가능한 불가사의의 세계입니다. 화엄학에서 세상 모든 것들이 법신(法身)인 비로자나 부처님의 중도 설법이라고 설명한 까닭입니다.

역설은 자가당착에 빠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이들이 떠드는 교실에서 한 아이가 떠들지 마!”라고 크게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벽에 낙서금지라고 쓰거나, 사람이 붐비는 백화점에 있으면서 집에 있지, 왜 백화점에 나오는 거야하며 투덜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철학자 중에서도 역설임을 깨닫지 못한 채 철학적 논리를 펼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명제의 철학적 사용을 비판하는 철학을 펼친 비트겐슈타인, 로고스중심적 서구 사상사를 로고스를 통해 해체시키고자 했던 데리다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사실 역설은 항상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부처님 존재 또한 역설입니다.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살았는데 정작 본인이 더 유명해졌으니까요. 역설은 나쁜 게 아닙니다. ‘인과응보란 개념도 잘 생각해보면 역설입니다. 남에게 행한 행동이 내게로 돌아오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결국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했던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역설에 착안해 수학의 한계를 처음으로 발견했습니다. 러셀은 에피메니데스의 역설을 제시했습니다. 에피메니데스는 크레타 섬 출신의 현인인데, “크레타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다라고 말했답니다. 에피메니데스가 크레타 사람이므로 위의 주장은 거짓말이 됩니다. 그러면 또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가 아니므로 크레타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다는 발언은 진실이 됩니다. 이렇게 얼핏 듣기에 맞는 말처럼 보이지만 서로 아귀가 맞지 않는 논리가 바로 역설입니다. 러셀은 이 점을 수학 집합론에 적용했습니다. 모든 집합은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자기 자신을 원소로 가지지 않는 집합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을 원소로 가지는 집합입니다. 전자는 보통집합으로 도시들의 집합이 대표적입니다. 서울, 뉴욕, 파리 등은 도시들이지만 도시자체는 도시들의 집합에 속할 수 없습니다. 후자는 특수집합이고, 도서관에 꽂힌 도서관 장서 목록이 여기에 속합니다. ‘도서관장서목록이란 책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러셀은 보통집합들 전체의 집합은 과연 보통집합일지, 특수집합일지를 고민했습니다. 만약 보통집합들 전체의 집합이 특수집합이라면, ‘보통집합정의의 속성에 의해 자신이 속하지 않으므로 보통집합이 됩니다. 이와 반대로 보통집합들 전체의 집합이 보통집합이라면 여기에 속하므로 특수집합이 됩니다. 결국 역설적 결과만을 얻게 되는 겁니다.

분별심에서 벗어나야 열반
부처님은 이런 역설을 이용해서 교화를 행했습니다. 장조범지가 나는 그 어떤 법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자 부처님이 장조여, 그대가 말하는 그 어떤 법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견해는 인정하는가라고 되물었습니다. 장조범지는 고타마여, ‘그 어떤 법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런 견해 역시 인정하지 않는다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그렇다면 결국 인정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꼴이니 뭇사람들과 다를 게 없는데 어째서 스스로 뽐내며 잘난 체 하느냐며 장조범지에게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선가의 격언들은 얼핏 역설에 빠진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불립문자가 그 대표적 예입니다. 문자를 세우지 말라는 말을 문자로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원래 내용이 없다고들 합니다. 애초부터 모든 사람들이 아무 문제도 없는 비로자나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자신들을 중생이라고 착각할 뿐임을 알려주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입니다. 병든 마음을 고쳐주는 것일 뿐 도그마(교리)’는 아니란 뜻입니다.

공사상이 퍼진 이후 이를 공격하는 무리가 생겼습니다. 회쟁론처음 20개 게송은 용수 스님의 논법을 차용해 공사상을 공격합니다. ‘모든 것이 공하다면, 그 말조차 공해야 한다면서요. 물론 후반 50개 게송에 걸쳐 이런 공사상에 관한 오해를 모두 풀어냅니다. 중관학은 오류를 발견하는 기법을 익히는 학문입니다. 따라서 중관학을 익히면 그 어떤 사상철학의 모순이라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용수 스님은 역설이 발생하는 이유를 사유의 분별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연기의 사슬을 끊는 분별로 인해 역설이 발생한다는 겁니다. ‘낙서금지라고 쓰는 사람은 그것 또한 낙서라는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낙서금지문구는 낙서가 아닌 한 단계 위의 무언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러셀은 역설을 극복하기 위해서 언어 간 계층을 구분(계형 이론)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철학자 수잔 하크는 약속의 세계에선 계층 구분이 통할지 모르나 자연 세계에선 여전히 낙서일 뿐이라고 반박했습니다.

불교에서는 생각으로 세상을 가위질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머릿속 분별심으로 떠올린 그 어떤 개념도 연기설에 반대돼 모두 공허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흑백논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도의 길입니다. 물론 강의를 들었다고 분별심이 바로 없어지진 않을 겁니다. 우리들은 감성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오감은 개체를 구분해서 지각합니다. 중도적 사고방식은 구분이 야기하는 허무함을 폭로해서 감성·지성 번뇌를 사라지게 해, 결국에는 열반에 드는 길로 우리를 안내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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