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대사와 깊은 교유 나눈 文人

뛰어난 능력으로 관직 섭렵
파직되는 변고도 수차례 겪어
승려들과 오랫동안 정 나누며
승속 넘어 진정한 벗 거듭나 

▲ 월정 윤근수의 글씨.
조선 중기의 문신 월정 윤근수(月汀 尹根壽, 1537~1616)는 영의정을 지낸 윤두수(尹斗壽)의 아우다. 어린 시절 김덕수(金德秀)김덕무(金德懋) 형제에게 공부했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 남명 조식(南冥 曹植, 1501~1572)뿐 아니라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 우계 성혼(牛溪 成渾, 1535~1598) 등과도 교유했다고 전해진다.

1558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주서와 연천 현감을 지냈으며 기묘사화에 사형을 당한 조광조의 신원을 상소했다가 과천현감으로 좌천되는 등 정치적으로 곤란을 겪었다. 이듬해인 1563년에 임금의 총애를 받던 이량(李樑)이 그의 아들 이정빈(李廷賓)을 이조좌랑에 천거하자 박소립(朴素立), 기대승(奇大升) 및 그의 형 윤두수가 반대했다. 이로 인해 형이 파직되는 변고를 당함에 따라 그 또한 파직된다. 그가 다시 복권되어 홍문관 교리에 제수된 것이 1565년경이다. 이듬해 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는데 당시 그의 벼슬은 지제교 겸 교서관교리(知製敎兼校書館校理)였다.

이후 검상, 사인, 장령 등을 역임했으며 1572년에는 대사성에 중임(重任)되었다. 또 다시 그가 정치적인 위기를 맞게 된 것은 1591년경이다. 당시 그는 우찬성에 재직하고 있었는데, 정철(鄭澈)이 세자의 책봉 문제로 화를 당함에 따라 그 또한 삭탈관직 되는 변고를 겪는다.

한편 그가 외교적으로 눈부신 활약상을 보인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이다. 예조판서로 부임된 그는 명나라와의 외교적인 문제를 원만히 해결했는데 이런 성과는 중국어뿐 아니라 시문에 능했으며 임진왜란 때 파병된 명나라 장수들과 깊이 교유했기 때문이다.

그는 탁월한 문장력뿐 아니라 그림과 글씨에도 능해 예원의 종장이라 칭송되기도 하였다. 그가 주역을 교정하고 해동시부선(海東詩賦選), 신찬 삼강행실도(新撰三綱行實圖)를 편찬하는데 참여했던 것이나 명종과 선조가 사망한 후에 이와 관련된 기록을 정리하는 데도 그의 힘이 필요했던 것은 학문적 토대가 단단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의 문하에서 김상헌(金尙憲), 장유(張維), 정홍명(鄭弘溟), 정엽(鄭曄), 조익(趙翼), 김육(金堉)과 같은 명사들이 배출되었는데 이는 서인계의 주요 인물을 배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그는 주자학을 중시했으며 사림계 인물들과 교유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그의 생애에서 주목되는 것은 승려들과의 교유다. 그 중에서도 임진왜란 때 승병을 모집하여 맹위를 떨쳤던 사명당 유정(惟正) 스님과 교유했다는 사실이다. 그의 문집 월정집에는 일본으로 떠나는 유정 스님을 위해 쓴 증유정산인왕일본(贈惟正上人往日本)’ 2수가 눈에 띤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머나먼 만 리 길 해 뜨는 동녘(萬里扶桑域)
외로운 배 섬나라로 향하네(孤帆積水鄕)
석장을 저으며 가는 행차 깨달음의 길이고(錫飛猶覺路)
작은 배로 가는 길 바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함이라네(杯渡卽慈航)
해 가리켜 맹세하면 큰 파도 잦아들고(指日鯨波晏)
사람들을 놀라게 할 문장 솜씨 드날리리(驚人藻翰揚)
선기(禪氣) 서린 구름이 잠시 머무른 곳에(禪雲暫駐處)
이방(異邦) 사람 얼마나 많이 향 피우며 예불할까(殊俗幾拈香)

▲ 제7차 교육과정 <중학교 국사>에 실린 사명대사 진영.
이 시는 일본으로 떠나는 유정 스님을 위해 쓴 전별시로 석별의 아쉬움을 드러낸 작품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유정 스님은 조선 중기의 고승 사명대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을 이끌고 전공을 세웠던 그는 여러 차례 일본을 방문하여 외교적 성과를 거뒀는데 특히 1604년 사신으로 일본의 정치적인 실력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조선인 포로 3500명을 석방시켜 이듬해 돌아왔다. 그러기에 윤근수는 유정 스님이 석장을 짚고 일본으로 가는 여정은 깨달음의 길이며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라 했던 것이다. 더구나 유정 스님은 도력 높으신 수행자이니 그가 머문 곳엔 분명 선기(禪氣) 서린 구름이 잠시 머문 듯 했을 것이란다. 따라서 외로운 섬나라 일본 사람들은 너도나도 스님을 찾아가 향을 사르고 예를 올렸을 것이라고 하였다. 무엇보다 유정 스님이 타고 간 배를 배도(杯渡)라고 표현한 것이 이채롭다. 원래 배도란 남북조시대 어떤 고승이 항상 나무로 만든 잔(木杯)을 타고 물을 건넜기에 그를 배도화상(杯渡和尙)이라 불렀다는 고사(故事)에서 연유된 것인데 이는 고승전 신이하 배도(高僧傳 神異下 杯渡)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증유정산인왕일본(贈惟正上人往日本)의 마지막 1수를 더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푸른 바다 외로운 섬을 둘러쌌는데(碧海環孤嶼)
아득한 그곳 향해 긴박한 여정 떠나네(嚴程指杳冥)
배를 타고 지나가면 뭇 괴물들 피할 것이고(行舟群怪避)
게송(偈頌)을 강설하면 늙은 용도 경청하리(說偈老龍聽)
제천의 달을 괴로이 생각하노라면(苦憶諸天月)
이역 땅의 명협 풀은 자주 시들리라(頻凋異地蓂)
자비의 마음으로 강론을 열고나면(慈悲開講後)
생령들이 안정되는 것을 응당 보겠지(應見奠生靈)

유정 스님을 수행이 높은 승려로 인식한 그는 배를 타고 지나가면 뭇 괴물들 피할 것이고(行舟群怪避)/ 게송(偈頌)을 강설하면 늙은 용도 경청하리(說偈老龍聽)”라고 하였다. 이는 당시 유정 스님에 대한 유자들의 인식이었을 만하다. 하지만 고국을 떠나 일본에서 보는 달은 조선의 달과는 그 느낌이 다를 것이라 여긴 듯하다. 그러기에 제천의 달을 괴로이 생각하노라면(苦憶諸天月)/ 이역 땅의 명협 풀은 자주 시들리라(頻凋異地蓂)”라고 한 것이리라. 그의 위로는 명협마저 빨리 시들게 하여 일본에 머무는 시간을 단축시켰을 것이란다. 명협은 달력이 없던 시절 이를 알려준 풀의 이름으로, 1~15일까지 매일 한 잎이 났다가 16~30일부터 매일 한 잎씩 떨어졌다는 것인데 이는 요임금 시절에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와 교유했던 승려로는 화 스님(華上人), 덕연 스님(德連上人), 의수 스님(義脩上人), 법홍, , 지온, , 성주, , 쌍순 승려 등이 있고 이외에도 다수의 스님들과 교유한 흔적이 보인다. 특히 그가 덕연 스님의 시축 중에 운을 차운하여(次德連上人軸中韻)’라고 쓴 시에는 덕연 스님과 얼마나 깊은 정을 나눴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적막한 곳 그 누가 방문하리오(寂寞誰相問)
비낀 해만 저녁 창에 내려온다네(斜陽下夕)
귀밑머리 희어짐을 어찌 견디랴(那堪愁白)
푸르른 고향 산만 내내 그리네(長憶故山靑)
대궐에선 그래도 벼슬을 하고(
猶通籍)
현정에선 경서만을 끼고 있다오(玄亭獨抱經)
봄이 오면 그대를 찾아가려 생각하니(春來思訪汝)
장실에다 빗장일랑 걸지 마시오(丈室不須
)

덕연 스님은 수행승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그의 선방을 찾아가는 건 석양뿐이었을 것이다. 이런 고승과 교유했던 윤근수는 늙어가는 자신을 감당하기 어려워 늘 푸르른 고향의 산만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현정에선 경서만을 끼고 있는(玄亭獨抱經)” 자신일 것이다. 그러므로 혼탁한 세상을 사는 그는 봄이 오면 그대를 찾아가려 생각하니(春來思訪汝)/ 장실에다 빗장일랑 걸지 마시오(丈室不須)”라고 했다. 따뜻한 봄날, 덕연 스님을 찾아가 속진을 씻어내려 했던 그의 태도는 난세를 살아가는 이의 방편일 것이다. 한편 현정(玄亭)은 원래 한나라 양웅이 태현경(太玄經을 지으면서 머물던 집이다. 초현당(草玄堂), 초현정(草玄亭)이라고도 하는데 이를 줄여 현정(玄亭)이라고도 말한다. 일반적으로 학문하는 사람의 정자를 지칭한다. 다시 법홍 스님의 시축에 지어주다(題法弘上人軸)’를 살펴보자.

낙엽 지는 성 서쪽 마을에(落木城西巷)
맑은 가을 상쾌한 기운 더해 가는데(淸秋爽氣增)
부질없이 두 봉우리는 시야에 들어오건만(兩峯空在望)
서글프게 중양절에도 오르기 어려웠네(九日
難登)
절기가 지나가니 국화는 늙어가고(節去黃花老)
서리에 시든 듯이 흰머리만 자라누나(霜凋素髮仍)
서로 만나 빼어난 시구를 감상하니(相逢看秀句)
멀리서 온 스님, 몹시도 고맙네(多謝遠來僧)

이 시는 늦가을에 지었을 것이라 추정되는데 법홍 스님의 시축에 제시(題詩)한 것이다. 그가 절기가 지나가니 국화는 늙어가고(節去黃花老)/ 서리에 시든 듯이 흰머리만 자라누나(霜凋素髮仍)”라고 한 것에서 가을임을 드러낸 것이며 멀리서 온 스님에게 몹시도 고마워(多謝遠來僧)”하는 건 바로 서로 만나 빼어난 시구를 감상(相逢看秀句)” 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 하였다. 당시 시를 주고받는 일이 유불의 교유에서 얼마나 중요한 소통의 수단이었는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진정한 벗은 승속을 가리지 않는 법. 뜻을 나눌, 시를 함께 창수할 벗을 귀하게 여긴 뜻도 여기에 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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