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내 마음을 한마음으로다가 흡수해서 조복을 받아라!

짧으면 짧은 대로 네가 짧아져라.
길면 긴 대로 네가 길어져라.
둥글면 둥근 대로 네가 둥글어져라.

(지난 호에 이어서)
질문자1(남) 질문이라고 하기보다는 스님의 법을 청하겠습니다.

큰스님 말이 안 들리는데요.

질문자1(남) 불교의 사상을 흔히 공의 사상이라고 합니다. 공이라 하면 ‘사람의 마음을 비워라.’ 하는 공도 있고, ‘우주 공간’이라고 하는 공도 있습니다. 공의 크기를 말하면 ‘너무 커서 밖이 없고 작게 말하면 너무 작아서 안이 없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공 말고 또 하늘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늘을 숭배하고 하늘을 믿으며 하늘을 종교로 삼는 그런 단체도 있습니다. 그러면 불교에서 말하는 공과 하늘이 차이점이 있다면 어떠한 차이가 있느냐? 동일한 거냐? 이 법을 설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큰스님 네, 부처님께서는 말입니다, “너를 알면 이 세계가, 이 우주가 하나로 돌아가는 섭류를 알 수 있느니라.” 그랬습니다. 이 각자 주처의 주님은 나한테 있는 거고, 이 이름이 주처의 주님이다 하는 것도, 부처님이다 하는 것도, 자부처님이다 하는 것도 통틀어 이게 혼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몸뚱이도 이 생명들이 같이 있기 때문에, 혼자가 아니기 때문에, 더불어기 때문에 주님이라고 하는 겁니다. 또 부처님이라고 하는 겁니다, 자부처라고. 자기 정신계를 말하죠. 그것이 통신이 되면, 그래서 부와 자가 통하면 이 전 우주의 과거 미래 현재가 같이 하나로 돌아가는 섭류를 알 수 있느니라. 너무 커서, 과거 미래 현재가 삼합이 한데 합쳐서 하나로 돌아가는 이 섭류를 아느니라 했습니다.

그거를 불교는 불교대로 기독교는 기독교대로 하나님이라고 했고 주님이라고 했고 우린 자부처라고 했고 또는 일체제불이라고 했는데, 우리가 진리를 좀 파악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게 진리에서 벗어나는 일이라면 아니 되니까요. 지금 우주 전체가 하나로 돌아갑니다. 하나로 돌아가는데 부처님께서는 “그 하나마저도 없느니라.” 이랬습니다. 왜?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초월해서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나부터 주님을 알고, 자동차가 육신이라면 자동차 속의 운전수가 바로 주님이니까 주님부터 알아 가지고 보면 모두, 일체가 눈이 뜨여서 보이고 귀가 뜨여서 보여요. 절름발이가 절름발이가 아니고요. 그렇게 될 때에 과거나 미래나 현실을 똑바로 볼 수 있죠. 그럼 또 누가 없으십니까?

사회자 질문 있으신 분은 마이크 앞으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큰스님 내가 잘 안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 내가 한다고 하지도 않습니다. 왜냐? 내가 그랬죠. 이 몸뚱이가 다 공했다고. 여러분이 사시면서 한번 생각해 보세요, 공하지 않았나. 만날 보는 사람만 보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듣는 것만 항상 듣고 있겠습니까? 가는 데만 만날 갑니까? 말 한마디 하면 그 말만 합니까? 여러분은 그렇게 고정됨이 없이 자연스럽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생각하시기 나름입니다. ‘이 진리가 어떻게 돌아가나. 또 우리는 어떻게 길에서 와서 길을 걷다가 길로 가는가.’ 이런 점을 말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는 점이 있어야 그런 안도 생기고 그런 물리가 터지고…. 여기 여러분이 나보다 모자라서 이렇게 계신 게 아니죠. 오히려 저보다 일등 나가게 더 잘 아시는 분들이 여기 계십니다, 다. 나보다 못한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종교를 가지고 이거니 저거니, 이게 옳으니 이게 옳으니 하고 따지는 데는 난 아주…. 그러고는 모두 배척하고. 부처님께서는 말입니다, “짧으면 짧은 대로 네가 짧아져라. 길면 긴 대로 네가 길어져라. 둥글면 둥근 대로 네가 둥글어져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사생자부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요것이 틀리면 전자의 그렇게 틀렸을 때 내 모습으로만 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모자라는 것도 전자의 내가 모자랄 때 ‘아이, 저 모습이로구나.’ 하고 마음을 쓰면 공부도 좀 유순하고 자식들도 잘 길러지고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이거는 하나 보면 하나 끄집고 둘 보면 둘 끄집고 이렇게 하니, 지금 시공을 초월해서 그냥 찰나에 들어가는 이런 공부인데 그냥 이것 말하고 저것 탓하고 이거 하고 저거 하고, 언제 저승에 들어가서 저승 공부를 하렵니까? 살아서 열반을 못한다면 죽어서도 열반이 아니 되죠. 경전을 통해서 통달을 한다 하더라도 그거는 이론에 불과하지 실천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심성 해탈이라야 그게 통할 수 있겠죠. 그리고 자유롭고요.

하여튼 여러분께서 좀 더 그것을 생활로써, 누구를 막론해 놓고 그렇게 해 보세요, 어떻게 되나. 못난 제가 말을 했든 잘난 내가 말을 했든 말한 사이도 없어요. 지금 말하는 대로 자꾸 없어지는 겁니다. 그리고 내 몸뚱이에서도 많은 중생들이 더불어 같이 있는데, 생명들이 같이 있는데 내가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항상 “부처와 중생은 둘이 아니요, 둘이 아니게 사생의 종류에 다 부처님께서 인연을 맺으셨느니라.” 했죠. 하여튼 모든 거를 생략해서 뛰다 보니까 그냥 조금씩 조금씩 이치를 얘기했습니다마는 여러분이 지금 사시면서 이 몸에 대해서 아픈 것도 그렇고, 아픈 것만 낫게 해 주는 게 부처님 법은 아니거든요. 이 전체죠. 아까 얘기했듯이 입력이 잘됐으면 잘된 대로, 입력대로 나오니까요. 여러분이 할 일이란 말입니다, 그게.
지난번에 감기가 들어서 좀 쿨럭거리다 보니까, 하루 한나절을 견뎠는데 말이에요, 죽겠습디다, 그것도. 아, 그런데 여러분 생각이 안 나겠습니까? 그래서 삥긋이 웃으면서 ‘어, 네가 아파 봐야 남도 알 수 있느니라.’ 하고 이렇게 아주 종류별로 다 이러는구나 하는 거를 알아챘죠. 그러니 가만히 보면 그냥 길에 오다가도 이 다리 운동 하느라고 그냥 이렇게…. 아까 내가 얘기했죠. 다시 한 번 얘기하겠는데, 관하면 통신이 돼서 이 대뇌로 통신이 돼서 대뇌에서 사대로 하달이 된다 이겁니다. 하달이 되면 거기에서 직접 또 대뇌로 해서 정수에 입력이 된다. 입력이 되면 입력되는 대로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왜 그렇게 되느냐? 이 속에서 소임을 맡은 자들이 전부 작용을 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병원 의사한테는 50%만 하게 하고 50%는 자신들이 해야 될 게 아닌가 이렇게 봅니다.

어떤 애들은, 지금 갓 낳아서 일주일도 안 된 애를 수술을 한다는 그런 소리를 서울에서 듣고 왔어요. 세상에 애가 백 일이 될 때까지는 신명이라고 할까, 자기가 죽어서 형성되는 이런 때는 자기 형성을 자기가 해 놓고 백 일까지는 알게끔 지키고 있다는 얘기예요. 그런데 어린애를 그렇게 해서 어른들이 잘못되게 해서 죽이고 그래요. 50%의 상식만 있었다면 왜 그렇게 합니까? 여기서 지금 이런 공부 하고 나가는 사람들은요, 돈이 없어서 병원에 갈 수 없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어린애가 거꾸로 서도 자기가 관해서 바로 세워 가지고 순산해요. 그거뿐이 아니지만 말이에요. 이건 자랑이 아니라 대 자랑이죠. 부처님께서 그렇게 하셨으니까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무의 과학자며 유의 과학자며 유와 무를 겸비한 이 세상에 정말 찾아보기 드문 그런 분이죠. 그런 분이 삼천 년 전에는 있었고 지금은 죽고 없다 이렇게 하지 마시라고요. 삼천 년 전에 계셨던 분이 지금 현실에도, 여러분이 살아 계시니까 계신 겁니다. 풀포기 하나만 살아 있다 하더라도 불법이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영원하다. 사월 팔일 날도 ‘과거에 오셨다’ 이런 게 아니라 영원히 그냥 현실에 계시다는 얘깁니다. 모습이 안 보이니까 그러시겠지만 말이에요. 인제 그만 해도 됩니까? 한 거는 없지만 말이에요.

질문자2(남) 저는 불법을 생전 처음 듣는 사람입니다. 지금 제가 스님으로부터 여러 가지 말씀을 듣고 느끼고 있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 모두 초월해서 하나 즉, 이 찰나가 모두 연결돼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인제 간단히….

큰스님 목소리가 잘 안 들리니 거기 좀….

질문자2(남) 예. 여러 말씀을 듣고 지금 제가 의문 나는 거는요, 지금 저희들, 중생이 시급하게 알고자 하는 것이 있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그 시급한 게 지금 깨달음 아닙니까? 그 깨달음의 마음을 어떻게 설법해 주실는지요.

큰스님 지금 이렇게 묻는 분이 깨달았다고 생각도 하지 마시고요, 깨닫지 못했다 하고 생각지도 마시고요. 아까 얘기를 해 드렸는데 못 알아들으신 것 같은데요, 내가 소로 비유해서 얘기했고요.

질문자2(남) 예, 말씀 들었습니다.

큰스님 소로 비유해서 얘기했고 누구나가 다, 즉 말하자면 내 마음을 한마음으로서 조복해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내 마음을, 즉 말하자면 한마음으로다가 흡수해서 조복을 받아라 이런 게 있어요. 그런데 지금 내가 진짜로 한마음을, 이게 얕다 높다 이런 게 없이, 중생이다 부처다 이런 게 없이 그대로 주인공이라고 믿고 거기다가 모든 거를 하게 되면 그냥 이 한 찰나에, 물러서지 않고 나가는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을 좇아서 그 의식들도 다 따라 준다는 얘깁니다.

질문자2(남) 그러면 지금 현재 네 마음에 따라서 네가 의식이 바뀐다 그런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되겠습니까?

큰스님 그렇죠. 찰나에 바뀌고 찰나에 구덩이에 들어갈 수도 있고 이러니까.

질문자2(남) 그럼 시급하다는 건 지금 그 말씀을 먼저….

큰스님 시급하죠. 모두 여러분이 살아나가는 데에 시급하지 않겠습니까?

질문자2(남) 그거를 깨달아라 그런 말씀입니까, 그럼?

큰스님 그거를 깨달으면 우주에 관한 것도 깨달을 거니까요.

질문자2(남) 아니, 제 의문은 그거였습니다. 여러분이 굉장히 시급한 게 있다는 그런 설법을 하시면서….

큰스님 지금 한두 건이 아닙니다, 시급한 게. 하하하. 지금 마음 하나로다가 그 많은 시급한 걸 다 할 수 있는 거니까 좀 심사숙고해 보십시오.

질문자2(남) 예, 알겠습니다.

질문자3(남) 안녕하세요? 저는 예수 믿는 사람인데요. 큰스님 하이고, 하하하. 아, 여기서 뭐, 예수 믿으면 어떻고…. 한 주머니 속에서 삽니다, 지금. 예.

질문자3(남) 예, 맞습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 예수님 믿은 지 한 7년 됐고요, 예수님 믿고서 죄 용서함 받고 새사람 돼서 이제는 거듭나고 천국에 가거든요. 그래서 저희 가족들도 다 예수님을 믿고 죄 용서함 받고 천국을 다 갑니다. 그런데 제가 듣기에는 불교에 구원이 없다고 들었거든요.

큰스님 뭐요?

질문자3(남) 불교에 구원이 없다고 제가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도 처음 이런 설법회에 와 봤는데요, 말씀을 들어 보니까 저한테는 좀 붕 떠 계신 거 같아요, 말씀들이요. 저희들 삶 속에 적용하기가 힘들고 저희들이 실천하기 정말 힘든 그런 말씀 같은데 과연 불교에는 구원이 있는지요?

큰스님 나는 절대로 그게 힘든 게 아니고, 여러분이 사시는데 붕 떠서 사십니까? 붕 떠서 살지 않죠?

질문자3(남) 말씀이 좀 붕 떠 있는 거 같은데….

큰스님 아니요. 여러분이 이 마음에, 한마음이라고 그러지만 마음은 너무 많아서 마음이 없는 겁니다. 어떤 마음을 가지고 쓴 거를 내가 내 마음으로 했다고 하시겠습니까? 그러니까요 지금 선생님이 볼 때는 붕 떴다고 그러는데 붕 뜨는 생각으로 댁이 그렇게 보는 것뿐이에요. 우리가 보는 사람에 따라서 달라지죠. 듣는 사람에 따라서 달라지고요.

질문자3(남) 대행 큰스님은 구원을 이루셨나요?

큰스님 구원을 얻었느냐고요?

질문자3(남) 예.

큰스님 허허, 아, 구원을 얻었으니까 나왔죠!

질문자3(남) 그러면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얻으셨나요?

큰스님 나로부터! (대중 웃음과 박수)

질문자3(남) 나로부터요?

큰스님 아, 내 종자가 아니라면 싹이 날 수 있겠소?

질문자3(남) 하지만 어….

질문자1(남) 잠깐 제가 거기에 대한 말을 좀 할까 해요. 지금 토론의 열기가 아주 달아오르는 것 같습니다. 참 좋은 현상이에요. 그런데 지금 예수교를 믿었다는 분이 나오셔서 의문을 제기하시기에 제가 제 체험을 말씀드려서 이분의 의심나는 것을 좀 풀어 드릴까 하는 생각으로 제 말씀을 드리려고 그래요.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이 공에는, 이 무지무지하게 큰 공에는 극락이 있습니다. 극락을 크고 또 부처님의 자비로운 품의 천의 눈으로 봐 갖고 하늘에도 억울한 길에 헤매는 중생이 있다면 건져야 되겠다 해서 천의 손을 주셨고 이래서 부처님은 너그러우시고 자비로우십니다. 그래서 나는 왜 하나님을 안 믿고 공을, 부처님을 믿었느냐. 공은 하늘에 있는 천당보다도 높고 크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거 믿는다 그겁니다. (대중 박수)

큰스님 지금 말씀들 잘 들으셨죠? 그런데요, 사실 부처라는 이름은요 너무 많아서, 이 몸뚱이를 본다 하더라도 더불어 같이 있으니 바로 부처라고 했던 거고요, 또 더불어 같이 모두가 하나로 돌아가니까 부처님이라고 했던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이라고 했고요. 그러니까 하나님이라는 이름도 없고 부처라는 이름도 없습니다, 진리에는. 그리고 아까 구원 얘기 하셨는데 만약에 여러분이, 지금 대답해 보십시오. 똥을 누가 대신 눠 줄 사람이 있는가, 먹어 줄 사람 있는가, 잠을 자 줄 사람 있는가, 아파 줄 사람이 있는가, 죽어 줄 사람이 있는가, 깨달아 줄 사람이 있는가? 이거 여섯 가지를 대답해 보십시오.

질문자3(남) 있습니다. 예수님이요.

질문자4(여) 저요, 잠깐만요. 죄송합니다. 질문을 해도 어느 정도의 기본적인 상식이 있어야 될 것 같아요. 왜냐하면 공이라 함은, 여기서 비워라 하는 것은 무엇이 있기에 비우는 거지 없는 상태에서는 비우라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분명히. 그러니까 반야심경에 보면 아까 스님이 수없이 말씀하셨듯이 고정관념이라든가 영원하다는 것은 없고, 우리 인간이 10년 전 사진의 내 얼굴과 지금의 내 얼굴이 다르고 세 살짜리 자식이 지금 열 몇 살이 돼 가지고 어른이 됐듯이 모든 것이 영원한 것이 없고, 세상 모든 것이 다 변하기 때문에 집에들 가셔 가지고 반야심경을 자세히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기 교회에 나가신다고 지금 구원이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버려짐이 없기 때문에 구원받을 일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기본적인 게 무엇인가? 지금 아주 간단하게 스님께서 지금 내가 똥이 마려운 게 급하지 예수님이 급합니까? 배가 고프면 내 배가 고프지 예수님의 배가 고프지는 않으실 겁니다. 그러니까 그거는 기본적인 상식에서 벗어나는 질문이고 지금 여기는 많은 사람들이 공부를 하러 온 거지, 그런 말장난 하러 온 것 같지는 않아요.

그리고 지금 여기 전생의 인연이 없고 복이 없으셔서 지금 진리의 인연을 맺지를 못하셨는데 지금의 씨가 되었기 때문에 언젠가는 꽃이 피리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반야심경에 모든 진리의 말씀이, 스님께서 지금 한 시간 넘게 말씀하신 것이 거기에 다 있으니 집에 가서 한 번 읽어서 모르시면 수 번, 백 번 만 번 읽어 보십시오. 왜냐하면 저도 교회를 가서 10년을 넘게 다니고 집사라는 증명을 받고 예수님 밑에서 일을 하고 그 모든 것이 전부인 줄 알았지만 제 의심이 끝나지 않아서 공부한 결과 불교라는 거기에 도착을 했고, 그리고 주위의 많은 사람들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제가 그나마 복이 있어서 이 자리에 이렇게 오게 된 것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대중 박수)

큰스님 저이가 멋진 말 한마디를 하고 가는데요,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할 것도 없다고, 허허허.
하나님은 진리예요, 진리. 하나로 돌아가는 진리. 하여튼 어떻게 됐든지 여러분의 마음에 달린 거니까, 참 멋진 대답을 하고 갔어요. 내가 없기 때문에 내가 구원받을 것도 없다 하고요. 이 모두가 여러분이 증명할 수 있는 거는 여섯 가지 그렇게 대신 못 받고….

부처님께서 비유하시기를 선장이 배를 끌고 가는데, 즉 말하자면 몸뚱이는 배로 비유를 하셨고 또 몸뚱이 속의 생명들은 중생으로 비유를 했거든요. 그리고 중심의 불성은 바로 선장으로 비유를 했고요. 그래 파도가 치고, 우리가 지금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인 인생살이입니다. 그런데 그 파도치는 바다에 그저 배를 타고 건너는 것과 같고요. 그런데 그렇게 진심으로 이 선장에다 의지를 하고 선장의 그 마음과 내 마음이 둘 아니게 항상 같이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파도가 아무리 일어난다 하더라도 가는 데까지 갈 텐데 그냥 이 보살 저 보살, 하나님 찾는 사람은 하나님, 또 부처님 찾는 사람은 부처님, 그냥 중구난방으로 붙이고 그냥 아우성을 치니까 가야 할 자리까지 갈 수가 없죠. 배가 뒤집히고요. 그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생각 자체가 해명을 해 주실 테니까 여러분 자체가 자유스럽게 하세요. 그렇게 하는 사람도 있고 저렇게 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다면 이건 에누리가 없습니다. 얼마만큼 자기가 그렇게 똑바르게 했는가를…. 남한테 이익 하게 하고 해롭지 않게 하고 헛다리 짚게 안 하고 이렇게 진실하게 하는 사람은 이 공법으로서, 무의 공법으로서도 오고 감이 없이, 함이 없이 할 수 있는 겁니다, 그 모두가요.

사회자 네, 감사합니다. 이제 시간이 많이 되었기 때문에….

큰스님 그런 말을 댁이 하니까 말이지, 여기 미국에서 “나는 지금 하혈을 해서 못 견디겠으니 어떡하면 좋습니까? 병원에 가도 안 된답니다.” 하고 전화가 왔어요. 그러면 “그래, 안됐구먼. 알았어.” 이렇게 그냥 하지, “내가 해 줄게.” 이런 것도 없어요, 부처님 법에는. 그런데 말입니다, 부처님께선 벌써 아시고 한 찰나에 가고 옴이 없이, 또 그 사람을 응신으로서 구해 주셨어요. 그렇게 되는 건데 뭐가….

그러니까 마음이라는 것은 그렇게 광대무변하고 묘법이라고 안 그럽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다 그렇게 묘하고 광대무변한 겁니다. 그 마음 하나 안으로 굴리는 거, 안으로 믿는 거 요것만 돌리면 되는 겁니다. 감사합니다.

사회자 감사합니다, 큰스님.

※위 법문은 1997년 6월 13일 L.A.지원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