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강신주 박사

참불선원 불교인문학 강좌불교와 서양철학

흔히 불교사상 혹은 불교철학을 두고 많은 사람은 난해하다고 느낀다. 수많은 경전과 단박에 뜻을 이해하기 어려운 선문답, 화두 등은 불교를 알아가고 싶은 이들에게 거리감을 주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조금 쉽게 이해할 순 없을까? 철학자 강신주 박사는 613일 참불선원에서 열린 인문학강좌에서 불교와 서양철학을 주제로 강의했다. 강 박사는 우리가 서구적 사고방식에 훨씬 더 익숙하기 때문에 서양철학의 개념을 빌리면 불교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된다고 조언했다. 정리=이승희 수습기자

▲ 강신주 박사는… 연세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서 「장자철학에서의 소통의 논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희대, 상상마당 등에서 철학을 강의하고 있으며 출판기획사 문사철의 기획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우리 삶의 핵심적인 사건과 철학적 주제를 연결시켜 포괄적으로 풀어낸 철학서를 다수 펴냈다. 동양철학 전공자이면서 서양철학의 흐름에도 밝아 쉽게 읽히는 철학을 지향한다. 주요 저서로는 〈철학이 필요한 시간〉 〈철학, 삶을 만나다〉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상처받지 않을 권리〉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등이 있다.

서양철학 요지 잘 담은 불교
나 이외 권위 버리라강조
남 따라하면 자신 잃기 쉬워
자기 삶 주인의식 필요하다

외부서 바라본 4개의 불교
오늘은 불교와 서양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여러분들 러셀(russell)’이 뭔지 아십니까? 겨울철 눈 쌓인 산을 헤쳐 나가며 선두가 길을 다지는 행동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눈길 뚫기. 러셀의 도움을 받으면 눈길을 오르기 한결 수월해집니다. 불교철학의 이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교철학 자체는 굉장히 깊고 방대해서 이해하기 난해한데 서양철학의 몇몇 개념들을 빌려 설명하면 이해가 훨씬 수월해짐을 느낍니다. 그래서 오늘 수업에서는 서양철학 개념들을 러셀삼아 불교철학을 설명하겠습니다.

베단타는 인도 전통 철학 중 하나입니다. 싯다르타는 베단타 철학의 전통에서 탈출하고자 했습니다. 아트만(진정한 자아)과 브라만(궁극적 실체, 유일신)을 강조한 이 철학은 현재의 기독교와 모습이 닮았습니다. 싯다르타의 철학은 아트만과 브라만에서 모든 고통이 나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개념들을 붕괴시키며 출발합니다. 무아(無我)라는 개념도 여기에서 나옵니다. 부처는 나 이외에 그 어떤 권위도 날려버리라고 말했습니다. 임제 스님이 말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야 부처가 된다가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부처에게 절하는 인간이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을까요. 불교는 여러분 스스로에게 절하라고 가르칩니다. 그게 아니라면 기독교나 브라만과 다르지 않게 됩니다.

12세기 마드바라는 인도 철학자가 전철학강요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안에 정리한 내용을 보면 불교를 크게 6가지로 구분해놨습니다. 그 중에서 중요한 내용 위주로 압축하면 4가지가 됩니다. 베단타 학파인 마드바가 생각한 가장 매력적이고, 그래서 본인 철학에 가장 위협이 될 것으로 보이는 불교철학의 핵심을 4가지로 정리한 겁니다. 첫째는 설일체유부’, 둘째는 경량부’, 셋째는 유식학파’, 마지막으로 중관학파가 이들입니다. 산스크리트어 그대로 풀이하면 설일체유부는 외부대상감각성’, 경량부는 외부대상추론성’, 유식학파는 외부대상비실재성’, 중관학파는 모든 것들의 비실재성이 됩니다.

네 개중 유일하게 무상(無想)’을 주장하는 것이 경량부입니다. 나머지는 무아를 주장합니다. 5~8세기 인도 사람들은 무상을 치열하게 연구했습니다. 제행무상을 증명하면 초월적 신의 영원성을 믿는 사람들의 논리를 격파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무상은 자칫 허무한 것으로 이해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모든 불교의 가르침은 자비로운 행동으로 귀결되지 않으면 헛된 공부입니다. 다시 말해 여러분이 어떤 대상을 사랑하면 무상하다는 참뜻을 알게 되고, 그 대상을 향해 자비심을 낼 수밖에 없을 거란 뜻입니다. 꽃을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 꽃이 지는 것을 알고, 아이를 사랑하면 그 아이가 무상하다는 것을 알기에 사진을 찍어 간직하려합니다.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죽는다는 것을 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쓸데없는 탐욕을 부리지 않게 됩니다. 무상은 이렇게 강력한 진리입니다.

근대서양철학 핵심 품은 불교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정리해보겠습니다. ‘설일체유부는 가장 단순하게 우리의 감각이 있다고 주장하는 학파입니다. ‘경량부는 외부대상은 단지 찰나로만 존재하기에 그 존재를 확신할 수 없고, 추론만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유식학파는 우리 의식이 외부대상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합니다. 영화를 볼 때 우리가 실재하지 않는 사람들을 영사기를 통해 화면으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마지막으로 중관학파는 우리의 의식마저 공()하다고 주장합니다.

설일체유부는 영국의 경험론과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로크 혹은 흄이 대표적 경험론자들입니다. ‘경량부는 칸트의 주장입니다. () 자체가 나의 감각을 촉발한다는 뜻인데, 박쥐의 세계를 예로 들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만약 마지막 박쥐가 세상에서 사라지면, 박쥐가 보는 초음파로 구성된 그 세상은 사라지게 됩니다. 박쥐의 인식이 세상을 창조한 것입니다. ‘유식불교는 헤겔에 가깝습니다. 정신의 자기실현을 말합니다. ‘중관불교는 니체철학과 상당히 가깝습니다. 불교의 4개 학파에는 이렇듯 서양근대철학의 요지가 다 들어있습니다. 물론 불교철학이 훨씬 더 넓고 깊습니다. 다만 우리가 서구적 사고방식에 훨씬 더 익숙하기 때문에 서양철학의 개념을 빌리면 불교 이해의 폭이 넓어질 수 있습니다.

마드바가 알아채지 못했던 한 가지 불교가 더 있다면 그것은 선종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도에선 선()이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선불교로 참선하는 곳은 우리나라가 유일합니다. 우리 스님들은 동안거하안거를 통해 치열하게 화두를 수행하는 것 같습니다. 화두는 집착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풀 수 없습니다. 반면에 깨달은 사람들에겐 화두는 전혀 문제될 게 없습니다. 무문혜개 스님이 지은 무문관에서는 48개의 화두를 제시합니다. 무문관(無門關)이라니. 문이 없는 관문이란 뜻입니다. 문이 없는데 과연 어떻게 지나갈 수 있을까요? 문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 그냥 훅! 지나가면 됩니다. 여러분이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바로 문이 없는 관문입니다. 막막할 때 우리는 문을 찾곤 하지만, 삶 속 문제 대부분에는 문이 없습니다. 자식 문제로 고민한다면 사실 대책이 없지 않습니까? 방법은 뭘까요? 그냥 훅! 문을 건너는 겁니다. 물론 그게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서양철학 빌려 화두풀이
본격적으로 무문관속 화두 중에서 서양철학 개념을 통하면 이해가 수월해지는 내용 3개를 살펴보겠습니다. 22번째 비풍비번(非風非幡)’이 던지는 화두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두 스님이 바람에 나부끼는 사찰 깃발을 보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한 스님은 깃발이 움직인다고 말했고, 다른 스님은 바람이 움직인다고 했습니다. 서로가 옳다며 논쟁이 붙었는데 해결의 기미가 안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육조혜능 스님에게 판단을 부탁하니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고 말했답니다.

전통적으로 서양에선 감각이 들어온 후에 마음이 판단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선사들은 마음이 먼저 움직인다고 말합니다. 마음이 깃발에 먼저 가 있는 겁니다. 서양에서는 20세기에 와서야 현상학이라는 철학적 한 갈래로 이 부분을 설명합니다. 독일의 후설이 주장한 현상학의 핵심은 ‘Noema(마음이 가는 대상)’‘Noesis(마음의 작용)’입니다. 후설은 노에시스 없이 노에마는 존재하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마음이 가지 않으면 눈이 가지 않습니다.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건 집착입니다. 마음이 고착되어 오직 한 가지만 보입니다. 한 가지에만 집착하면 마음은 죽습니다. 마음이 자유롭게 움직여야 하는데 그 말은 아주 찰나에도 마음이 살아있는 것을 말합니다. 매우 실천하기 힘든 경지입니다.

두 번째는 구지화상(俱指和尙)’입니다. 구지화상은 적절한 순간에 손가락 하나를 세우는 것으로 가르침을 전합니다. 어느 날 외부 손님이 동자에게 화상께선 어떤 수행을 하나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동자도 구지화상처럼 손가락을 세워보였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구지화상이 동자승의 손가락을 잘라버렸습니다. 동자승이 울부짖으며 도망가는데 구지화상이 다시 동자승을 불러 세우더니 손가락을 들어보였습니다. 그러자 그 동자가 깨우쳤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우리를 말로 가지고 노는 희론이 사라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입 다물고 있는 것이 보시행이란 뜻입니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그 사람 땀을 닦아주면 됩니다. 아낄 애자를 왜 사랑한다는 뜻으로 사용할까요? ‘아낀다는 마음은 행동으로 다 드러납니다.

한편, 이런 구지화상 스님은 철영 스님에게서 구지법을 배웠다는군요. 동자는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구지 스님 흉내를 냈기 때문에 구지 스님의 손가락과 마찬가지입니다. 본인이 본인 손가락을 자르는 게 무슨 문제가 되겠냐는 말입니다. 만약 동자가 자기 손가락을 들었다면 구지 스님은 그 손가락을 자를 수 없었을 겁니다. 손가락은 세 갠데, 두 사람만 자기 손가락을 들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본인의 손가락을 들어야 합니다. 자기가 자기 삶의 주인으로서 살아야합니다. 불교에서 제일 경계하는 것은 흉내내기입니다. 우리는 TV나 영화에서 본 것들을 흉내 내며 살고 있습니다. 만약 불경이나 남의 말을 앵무새처럼 줄줄 외기만 하면 목을 쳐야할지도 모릅니다. 여러분들은 온 몸으로 체험해 본 경험이 있나요?

20세기 현대 최고의 철학자 질 들뢰즈 철학의 핵심 개념은 차이와 반복입니다. 여러분들은 타인을 흉내 내지 말고, 차이를 반복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완벽히 다릅니다. 마치 들판에 핀 잡꽃들 같습니다. 만약 개나리가 엄청 잘 피어나면 나도 저 장미처럼 저렇게 피었을 것이라며 장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차이와 반복은 흉내 내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바보 같은 사람은 타인이 자기 말을 어기는 것을 싫어합니다. 교육의 목적은 내 말을 안 듣도록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무조건적으로 반복해온 내 것 아닌내 삶을 벗어나야 합니다. ‘을 피해야 자기 진짜 모습을 만날 수 있습니다. 역시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마지막 화두는 염화시중의 미소입니다. 싯다르타가 설법을 하는 도중 갑자기 꽃을 들어 제자들 앞에 들어 보였습니다. 제자들은 저 꽃의 의미는 뭐지생각하면서 일순간 긴장했습니다. 그 때 가섭이 싱긋 웃자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축복하는 의미로 가섭에게 가사를 벗어줬다고 합니다. 무엇을 깨달았다고 하는 것일까요?

만약 여러분이 산책을 하는데 꼬마 하나가 꽃을 한가득 들고 가는 모습을 보면 미소가 지어지겠죠? 그런데 그게 시어머니라면 꽃이 안보일 겁니다. 꽃을 들고 있는 상대를 무시할 수 있어야 미소를 지을 수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싯다르타의 존재에 집착해 꽃을 볼 수 없었던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들, 가섭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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