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제불의 마음은 내 마음따라 찰나찰나 들고 나신다!

이 한 철 사는 동안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현실이 주어졌고
현실에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미래가 주어집니다.

L.A. 사는 여러분과 같이 한자리 한 것을 참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 모든 여러분의 마음이 한마음이 돼서 이렇게 서로 같이 하시니 참 기쁩니다. 진리가 하나이지 둘은 아니니까요.

그런데 우리 이 불교라는 것은 어느 한군데 국한돼 있는 게 아니라 진리인 까닭에 불(佛)은 일체 만물의 생명이 불이요 교(敎)는 우리가, 일체 만물이 살고 있는 바로 이 삶의 터전입니다. 여러분이 사시면서 느끼고 알고 배우고 이렇게 하시는 게 그대로, 그대로 교예요. 영원한 자기의 각자 불성 역시 생명의 근원, 불이라고 하죠. 그렇다면 이 불교 안에서 여러분이 다 살지 불교를 떠나서 사는 사람은 없어요. 천차만별의 생명들이 말입니다. 이름을 불교라고 해 놓은 것이지 그건 진리인 것입니다. 지금 현실을 잘 살펴보도록 하십시다.

지금 우리는 지구를 집을 삼아서 사는 생명들입니다. 그것도 인간뿐만 아니라 사생의 모든 종류들이 말입니다. 그런데 사생의 모든 종류들이 살고 있는 그 가운데 불교라는 단어가 바로 진리라는 단어입니다. 불교라는 단어와 진리라는 단어가 둘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항상 그렇게 합니다. 기독교나 가톨릭교나 불교나 어느 종교를 막론해 놓고 이건 둘이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가 지금 지구를 집을 삼고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가 공기주머니 안에서 산다고 해 보십시오. 사실이 그렇죠. 이 공기주머니가 버스라면 우리는 한 버스 안에 타 가지고 어디로 그것이 돌아가는지 모르고, 초월해서 어디로 도는지도 모르면서 걸상 하나 가지고 내 거니 네 거니 하는 겁니다. 사람이 고등 동물로서 태어났으면 그런 인식과 더불어 전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것쯤은 좀 알아야 하겠기에 부처님께서는 누누이 “너부터 알라.” 하셨습니다. “모두 각자 너한테 주처가 먼저 있다, 못났든 잘났든. 네가 없고는 상대가 없느니라. 그래서 자신을 믿지 않고 타인과 이름과 형상을 믿는다면 그건 도깨비장난과 같으니라.” 했어요.

우리가 법당을 해 놓고 교회 강당을 해 놓고 이렇게 하지마는 ‘자기부터 알아야 하느니라.’ 하는 부처님의 말씀을 한번 생각해 보고, 그 부처님의 말씀을 따라가라는 게 아니라 생각해 보면 그대로 맞다는 얘기죠. 없는 말씀 하신 게 아니니까 말이에요. 그런고로 우주 삼천대천세계의 근본도 인간 각자 근본에 집결돼 있습니다. 일체의 만물, 즉 말하자면 사생의 종류가 다 우리들의 근본과 더불어 가설이 돼 있는 거와 같고요.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하다못해 꽃나무도 서로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듣지 못해서 그렇지 말을 하고 율동을 하면서 말입니다. 아무리 멀리 있어도 배나무는 배나무대로 같이 사랑을 하면서 열매를 맺습니다.

부처님께서 태어나셔서 열반하시기까지를 팔상성도라고 합니다, 이름해서. 부처님을 왜 ‘사생자부(四生慈父)’라고 하는가. 모두 사생자부라고 하셨죠? 왜 그랬는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생각해 볼 때에 부처님께서는 그 과정을 찰나 전으로 생각하고 찰나 후로 생각하고 현재에도 공해서 그냥 내가 한 일도 없고 내가 할 것도 없고 하는 일도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그건 무슨 까닭인가? 미생물에서부터 수억겁을 거치면서 진화되고 형성돼서 인간까지 형성이 돼서 왔다면 말입니다, 그 사생의 종류와 다 둘 아니게 일대사의 인연을 맺으셨기 때문입니다. 인연을 지으셨다고 해야죠, 흡수해서. 그런고로 부처님께서는 “내 모습 아닌 게 없고 내 도량 아닌 게 없고 내 아픔 아닌 게 없고 내 자식 아님이 없고 내 부모 아님이 없고 내 형제 아님이 없느니라.” 했습니다. 그렇게 가설이 되고 그렇게 근본끼리 근본끼리 연결이 돼서 집결이 돼 있고 그러니 일체제불의 마음은 여러분이 마음먹는 대로 찰나찰나 들고 나시는 겁니다.

여러분의 생각이 참 중요합니다. 한 생각이 여러분을 구덩이에서 꺼낼 수도 있고 구덩이로 틀어박는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처님을 믿는다 하고 절에만 왔다 갔다 하면서 항상 자기는 빼놓고 ‘부처님, 날 좀 살려 주십시오. 날 좀 알게 해 주십시오. 날 좀 깨치게 해 주십시오.’ 아무리 그래 보세요, 그게 공덕이 될 수가 있는가. 법당에 들어가면 부처님의 모습과 부처님의 마음, 부처님의 생명을 받드는 나와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해야죠. 변소에 가도 본인이 갔기 때문에 부처는 거기에 있다고 합니다. 길을 지나가기 때문에 부처는 거기 있고 누워서 본인이 자기 때문에 거기 있고, 앉았기 때문에 거기 있고 법당에 갔기 때문에 거기 있고…. 그래서 자삼보(自三寶)에 귀의하라고 하는 겁니다.

불교라는 그 자체가 어마어마하고 광대무변하기 이를 데 없는, 말로는 다 못하리만큼 정말 무변한 겁니다. 여러분이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지금 몸, 모습 하나를 가지고도 그냥 공생·공심·공체·공용·공식화 하고 돌아가지 않나 한번 보십시오. 물 한 컵을 먹어도 내가 먹었다고 할 수 없겠지요, 더불어 같이 먹었으니까. 일을 해도 내가 했다고 할 수가 없죠, 더불어 같이 했으니까. 여러분 오장 육부 안에, 세포에 갖은 각색의 소임자가 있고 대뇌에 또 통신처가 있고 또는 정수에, 지금 현실의 용어로다 말을 하려면 입력되는 컴퓨터가 있다는 얘깁니다. 우리 스님들의 모습은 고깃덩어리와 같은 겁니다. 고깃덩어리를 믿지 말고 따르라 이랬습니다. 따르라! 여러분한테 관하라고 하는 이치는 바깥으로 끄달리지 말고, 믿는 거는 자기가 자기를 믿어서, 자기 육신이 자동차라면 그 자동차를 이끌어 가는 운전수가 참나이니 자동차는 바로 운전수를 믿어야 한다는 얘깁니다, 비유하자면.

그리고 찰나찰나 우리가 어떤 걸 내가 했다고 할 수 없으리만큼 고정됨이 없이 돌아갑니다. 발자국 떼는 거를 여기 들어오시면서도 생각해 보셨는지요? 한 발 떼어 놓으면 한 발 없어집니다. 바람처럼 말입니다. 한 발은 떼어 놓지 않았기 때문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일 초 전 일 초 후가 없다고 그랬습니다. 삼천 년 전이라도 없는 것입니다. 초월해서 그대로, 그대로 비행기 프로펠러 돌아가듯이 돌아가는데 어디 거기에 먼지 앉을 자리가 있고 번뇌가 붙을 자리가 있고 그렇습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 여러분이 말입니다, 보는 게 고정된 게 있습니까, 듣는 게 고정된 게 있습니까? 말하는 게 고정된 게 있습니까, 만나는 게 고정됨이 있습니까? 움죽거리고 사는 게 하나도, 일거수일투족이 고정된 게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색은 공이요 공은 색이라 했습니다. 그 도리를 안다면 그대로 여여하고 그대로 갖추어 가지고 있고 그대로 만법을 들이고 낼 수 있는 겁니다.

왜 아까 머리에, 정수에 컴퓨터가 있다고 그랬느냐 하면 이 불가에서는 오신통이라고 하는 이름이 있습니다. 남의 마음을 아는 거 타심통, 또 천이통, 듣는 거 말입니다. 천안통, 보는 거 말입니다. 숙명통, 내가 어디서 온 줄 아는 그런 마음 말입니다. 이 다섯 가지를 이름해서 우리가 오신통이라고 하는데 여러분이 다 오신통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왜 벗어나지 못하느냐? 오신통 안에서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통 안에 들어서 그 통을 굴릴 수 있을까요? 내 이 육신통 속에서 내 이 통을, 이 육신을 마음대로 자유스럽게 굴릴 수 있을까요? 마음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하시겠죠? 그러니까 ‘그 통에서 나와야, 육신통에서 벗어나야 이 지구 대기권의 공기주머니 안에서도 벗어날 수 있느니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자체의 육신이 이렇게 움죽거리고 모두 하는 것이, 그것이 바로 이름해서 자기의 오신통이라고 하는데 누진까지, 즉 말하자면 육신통이라고 하죠. 그런데 말입니다, 못났든 잘났든 자기가 없는데 뭐가 있겠습니까? 부처가 어딨으며 진리가 어딨으며 세상이 어딨으며 상대가 어딨습니까, 내가 없는데. 내가 있기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부터, 스님네들을 따르되 믿는 것은 너를 먼저 믿고 발견을 해야 하느니라. 없는 걸 찾는 게 아니라 본래 있는 건데 그걸 발견해서 너를 알라. 너를 알게 되면 내 마음과 네 마음이 모두가 둘이 아니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죠.

어느 종교를 막론해 놓고 말입니다. 나도 전에 가톨릭교에 다녀 봤죠. 신부님한테 고해 성사 하라고 그러면 가서 하되, 나는 어느 땐가 나올 때 눈물을 흘리고 나왔어요. 왜? 이 어리석은 게 이렇게 못났던가 하고요. 왜냐하면 내가 죄는 지어 놓고 신부님한테 다 떠다 안기고 그러고선 뭘 잘했다고, 그게 없어지는 줄 알고 그렇게 하느냐 이런 말이에요. 그건 절대입니다. 자기가 한 건 자기가 꼭, 악이든 선이든 받게 돼 있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한테 관하라고 하는 것은 아까 얘기했듯이, 나무에 싹이 있으면 그 싹의, 자기의 뿌리 없는 거 못 봤죠. 자기 뿌리만이 자기 싹을 푸르게 살게 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걸 자부처라고도, 뿌리라고도, 주인공이라고도 하고 자아라고도 하고 여러 가지가지, 불성이라고도 하고 그러죠. 그러면 자기 싹은 종교를 믿든 안 믿든 여하간에 자기 뿌리를 믿고 의지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거기다가 의지하고 ‘너만이 이끌어 줄 수 있어. 이끌어 갈 수 있어.’ 하는 것이지 ‘이끌어 주시오.’가 아닙니다. ‘이끌어 갈 수 있어.’ 왜? 자기가 형성시킨 거니까. 자기를 자기가 형성시키기 위해서 정자 난자를 빌려서 삼합이 합쳐서 이게 잉태가 된 거거든요. 그러니까 자기가 자기 형성을 시켜서 자기가 지금 끌고 다니는 겁니다, 차 주인이 차 빼서 끌고 다니듯이. 뿌리가 싹을 살리듯이 말입니다. 진짜로 관하면 우리가 무의 세계로 가는 길과 유의 세계, 즉 말하자면 물질세계와 정신세계 양면이 있는데 양면의 구멍은 한 구멍밖에 없어요. 여러분의 그 마음자리, 깊숙한 마음자리 말입니다. 거기가 교차로거든요, 이승 저승 교차로.

그래서 거기를 진짜로 믿고 의지하면서 ‘너만이 보디가드가 돼 줄 수 있어. 너만이 해결사가 돼 줄 수 있어. 너만이 이끌어 줄 수 있어. 너만이 가정을 화목하게 할 수 있어. 너만이….’ 뭐든지 너만이야, 너! 위로 보지도 말고 내려 보지도 말고 말입니다. 진짜로 그렇게 관했을 때는 어떻게 되느냐. 대뇌로 통신이 됩니다. 찰나죠. 통신이 되면 바로 사대로 통신이 됩니다, 대뇌에서. 사대로 통신이 되면 사대로 통신이 된 즉시 다 종합해서 대뇌로 다시 올라가서 정수에 입력이 됩니다.

여러분, 어저께 한 것 다 아시죠? 내일 뭐를 해야겠다 하는 것도 생각하시게 되고요. 자기가 어떻게 살고 어떻게 말을 하고 어떻게 행하고 사는가에 따라서, 그 차원에 따라서 입력이 되는 겁니다. 이거는 심성과학이라고 할 수도 있고 심성천체물리학이라고도 할 수 있고 심성의학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지금 살고 있고 그렇게 하고 있고 그렇게 진리가 돌아가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관하면 관하는 대로 그렇게 입력이 됨으로써 입력되면 현실로 나오게 돼 있습니다, 그게. 그래서 관하라, 관하라 하는 겁니다. 전자에 입력이 됐던 구정물은 새 물로다가 관하면 그냥 새 물로다 들어가지 구정물은 그냥 금방 없어지느니라 했어요.

우리가 이러니저러니 종교 이름을 붙여서 여기 이렇게 그냥 아주 펼쳐서 해 놨기 때문에 아마 더 공부하기가 어려울지도 모르죠. 우리는 공부라기보다도 자기로부터, 한 가정에서 보세요. 왜 보살들이 응신으로 화해서 그렇게 많은 용도에 따라서 따로따로 이름이 있는가. 여러분을 위해서 말입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식구가 몇이라 하더라도 “아버지!” 하면 아버지 행이 나오고 “여보!” 하면 남편의 행이 나옵니다. “얘, 아무개야!” 하면 아들 행이 나오고 그러니 어떤 행을 했을 때에 내가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그대로 여여하게 해 나가시는데도 불구하고 생각으로 그렇게 모두 착에 얽매이고 욕심에 얽매이고 집착에 얽매이고 이론에 얽매이고, 이거는 그르다 이거는 옳다에 얽매이고 그러니까 한 찰나를 못 넘어서는 겁니다.

우리가 한 철 이렇게 살다가 이 모습으로는 다시 못 옵니다. 이 한 철 사는 동안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현실이 주어졌고 현실에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미래가 주어집니다. 그건 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차원이 주어지니까, 모습도 차원에 따라서 나올 것이고 삶도 차원에 따라서 나올 것이고 모두가, 생사에 관한 건도 차원에 따라서 주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본래 알고 본다면, 아까도 얘기했지만 고정된 게 하나도 없으니까 ‘죽는다. 죽는 고장이 어딘가? 사는 고장이 어딘가?’ 이거 물을 필요도 없죠. 이 자리에서 와서 이 자리로 가니까요. 아니, 도는 거죠. 그러니까 에누리가 있겠습니까? 신부님한테 고한다고, 내가 잘못한 거를 내가 해결하지 못한다면, 내 마음이 해결 못한다면 그게 없어질까요?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을 믿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지 않고 타인을 믿는다면 귀신과 같으니라. 타인을 믿지 말라.” 이랬는데 말입니다, 듣는 사람들이 어떻게 들었느냐. 예수님만 믿으란 걸로 알았죠. 부처님이나 예수님이나, 늦게 나오셨든 일찍 나오셨든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그렇게 지극하게 자기 삶을 다 버리고…. 그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걸 다 그렇게 들을 줄 알고 했겠죠. 그런데 각자! ‘각자’ 소리를 안 했기 때문에 이 정신계의 50%를 잊어버린 셈이죠. 정신계의 50%를 잊고 물질계의 50%만 가지고 하니까 자꾸 막히죠. 정신계와 물질계가 같이 이렇게 콤비가 돼서 돌아가야 되는데 콤비가 돼서 돌아가지 않으니까 걸릴 수밖에. 이 모두가 어떻게 생각하면 장난이라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장난이 아닙니다. 이 중세계에서 우리가 사는 것이 수억겁을 통해서 하세계로부터 이렇게 진화되고 이렇게 형성된 겁니다. 그것도 생략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지금 살아나가시는 데서도 내가 한 대로 꼭 이루어지고 내가 한 대로, 크면 큰 대로 받고 작으면 작은 대로 받죠? 그리고 자손들이 말을 안 듣고 제 나름대로 뛰고…. 요새 그 무슨 병이라나? 자폐증이라나 뭐, 이런 병들이 젊은 애들에게 무지하게 생겨요. 여기는 어떤지 몰라도 말입니다. 그게 왜냐? 이 마음에서 고장난 걸 마음으로 고쳐야 할 텐데 항상 거죽으로 말로 욕하고 때리고…. 입히는 거 잘 입히고 먹이는 거 잘 먹인다고 해서 교육이 잘되는 것도 아니고 그런 거예요. 마음은 자식이라는 마음, 부모라는 마음, 식구라는 마음이 있죠? 그래 식구라는 마음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가설이 된 겁니다, 벌써. 부모라는 것도 가설이 돼 있고, 자식 부모 이렇게 가설이 돼 있는 거죠. 그럼 우리가 전구를 여러 개 켜도 한 스위치만 누르면 전구에 불이 다 들어오게끔 돼 있는 거거든요, 그게.

그래서 부처님은 항상 “너부터 알라. 자성을 발견하라. 법당에 들어오면 모든 거를 따르되 믿는 거는 너를 믿어라. 너를 찾게 하기 위해서 이건 방편으로 모두 해 놨느니라.” 이랬으니 방편으로 법당에 들어오거나 강당에 들어가는 것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죠. 그 도리를 알라 이 소리죠.

그러니 우리가 부처님이 열반하실 때까지 그 과정을 수억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사생의 종류에 다 인연을 지으셨기 때문에 사생자부라고 하죠. 부처님께서 자기 제자들을 데리고 어느 길을 걷다가, 아주 생략하겠습니다, 이건. 뼈 한 무더기를 발견했어요. 지나가다 봤어요. 근데 거기다가 절을 하시거든요. “사생자부이신 어버이신데 어찌 뼈 무더기에다 절을 하십니까?” 했어요. 그러니까 그 말에 “얘야, 내 할머니일 수도 있고 내 아버지의 뼈일 수도 있고, 형제간의 뼈일 수도 있고 어머니나 아버지가 될 수도 있는데 어찌 그냥 갈 수 있겠느냐?” 하더랍니다.

그 말 한마디가 말입니다, 수억겁 광년을 거쳐 오면서, 즉 말하자면 그거를 우리가 생각할 때는 수억겁 광년이지만 그 수효도 없는 겁니다. 찰나기 때문이지요. 마음은 체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그 과정을 거치면서 진화가 되면서 미생물이나 벌레는 어머니 아버지가 없었겠습니까? 다 아시죠? 형제들도 있고 어머니 아버지도 있고 자식도 있다고요. 우리는 그런 것으로부터 진화되고 형성돼서 이렇게 사는 일등 동물이죠.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그 뼈 한 무더기로 그 과정을 다 일러 주신 거예요. ‘너희가 넓게 본다면 내 부모 아님이 없고 내 자식 아님이 없고 내 형제 아님이 없느니라. 좁게 본다면, 한 가정으로 본다면 지금 육의 부모만 내 부모가 아니라 모두, 어떠한 종류에 관한 건도 전부 내가 전자에 차원이 낮고 그랬을 때의 모습과 같으니라. 그러니 내 생명 아닌 게 없고, 모두 공생이며 공심이며 공체며 공용이며 바로 공식화하고 돌아가느니라.’ 했단 말입니다. 아니라고 하실 수 있겠습니까? 몸뚱이 속에도 천차만별의 모습들을 해 가지고 의식들이 많은데 말입니다.

왜 그것을 또 조복이라고 했는가. 나의 자부처는 부처로 생각하고 이 육신 속에 들어 있는 생명들은 중생으로 비유했거든요. 그랬는데 그 마음이 선도자가 돼서 딱 나가면 거기에 이 의식들이 다 따라 주게 돼 있어요. 이 말 한마디를 마저 해 드려야 아실는지 모르겠네요. 소 떼가 가는데 말입니다, 소 떼가 물을 건너가야 할 텐데 악어들이 잔뜩 있어요. 근데 소 떼 왕초가 들어서지 않으면 전체 하나도 들어서지 않습니다. 왕초가 하나 탁 들어서니까 그냥 그 소 떼 무리들이 전부 같이 들어선 거예요. 오히려 악어들 잔등이나 머리나 막 밟고 그냥 넘어선 거죠. 그래서 소 떼 왕초는 그 소 떼를 한 놈도 악어한테 잡히게 하지 않고 건넜다는 얘깁니다.

그거와 마찬가지로 내가 어떠한 일에 대해서 관할 때 모두 비켜 놓고 나만을 또 가지고 하라는 게 아닙니다. 아까 공생이라고 그랬죠? 그 한마음 가운데 깊은 속에, 내게 만약에 어떠한 큰 일이 벌어졌을 때 그 마음이 말입니다, 육체가 뛰라는 게 아니에요, 마음이 딱 정립이 됐을 때는 이 속의 생명들의 의식들이 다 따라 줘요. 왜 따라 주느냐. 그 마음이 그렇기 때문에 그 마음의 소치라 의식들도 전부 화해서 보살로 화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한마음이 돼서 밀고 넘어서는 이런, 즉 말하자면 용무로서 공용으로서…. 그거를 평등공법이라고도 하죠. 하여튼 그 마음을 어떻게 해서 전자의 모자라는 마음을 지워 버리고 지금 이익 한 마음을 내서 입력이 돼서 현실로 나오게 하나? 지금 여러분은 이게 제일 시급할 거예요. 하여튼 여러분께서 또 질문한다고 그러니 말을 줄일까요, 좀?

자손들이나 어떠한 분들이라도 우리가 그렇게 지극하게 관해서, 몸뚱이를 끌고 오기보다는 마음을 끌고 오면 더 몸뚱이가 집으로 들어오기가 쉽죠. 우리가 발전을 하면 좀 살기가 쉽다고 하죠. 발전을 해서 더 어렵게 만드는 것도 있지만. 이 마음의 발전이라는 것은 물리가 터져야 하고 그러기 때문에, 지혜로워야 되고 이러는 까닭에 지금 현실에 우리 모두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안 된다고 봅니다. 우리 마음들의 차원이 높아야 이 허공에너지도 꺼내 쓸 수 있고 마음 차원이 높아야 일체제불의 마음하고도 통하고 우주의 모든 생명들하고도, 생명들이라 하면 별성이라든가 뭐 모든 게, 물도 그렇고 모든 게 다 생명이 있지 없는 건 없으니까요. 우리가 높아져야 높은 데 있는 걸 꺼내 쓰듯이, 우리가 연관이 되고 통하고 이렇게 하면 이 한 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도움을 받고 도움을 이룩하고 연구를 하고….

하여튼 여러 말을 너무 많이 하면 여러분이 외려 지루하고 들은 게 다 날아가 버리니 질문하실 거 있으면 질문하십시오.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1997년 6월 13일 L.A.지원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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