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좌 정과 스님

참불선원 불교인문학 강좌선의 세계(선시감상)’

파격적 표현법 통해 전하는 선시
속박벗어나란 의도 헤아리면
난해해도 어느 순간 깨닫게 돼
진리 깨달으면 위안이 필요없다

()은 오묘한 진리를 단순히 문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해서 불립문자를 강조한다. 그럼에도 선사들은 격식을 벗어나 깨달음을 추구하는 선적 사유를 시에 담곤 했다. 그런데 선시는 어려운 단어도 없건만 마치 선문답처럼 난해하게만 느껴진다. 수좌 정과 스님은 59일 열린 참불선원 인문학 대강좌에서 선시감상을 주제로 강의했다. 스님은 선시에 담긴 속박을 벗어나라는 의도를 헤아리면 이해가 쉽다진리를 깨닫는 순간 더 이상 위안이 필요없어진다고 설명했다. 정리=이승희 수습기자

▲ 정과 스님은… 1985년 송광사로 입산 출가했다. 일각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자운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봉암사·해인사·칠불사·송광사 등 제방선원에서 화두수행을 하고 있다.
특별한 뜻 쉬운 단어로 전해야
선시란 선사 스님들이 시의 형식을 빌려 쓴 짧은 글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무궁무진합니다. 그러나 내용 대부분은 선사가 아닌 일반인들이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노래하고 있기 때문에 난해합니다. 더구나 선() 세계는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 敎外別傳)’이라는 대명제를 두고 있기 때문에 언어라는 도구를 거의 부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사들이 가장 많이 빌려 쓰는 도구가 언어입니다. 부처님 말씀을 일반 민중이 쓰는 구어체나 속어가 아닌 성스러운 언어로 전하고자 하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특별한 도구로 빚어야 더 성스러워 보인다는 생각 그 자체가 유혹임을 알기에 부처님은 그 의견을 수용하지 않으셨습니다. 특별한 그릇에 담겼다고 특별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용 자체가 특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사람들에게 쉽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스러움이나 특별함에 빠지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 본론인 선시를 감상해보겠습니다.

우리를 뛰쳐나온 소/ 석씨네 약초밭을 망치는데/ 콧구멍이 없구나/ 삼세제불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네

시에서 사용한 단어는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장난기가 배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마치 천진난만한 어린아이가 연필 가는대로 꾸밈없이 쓴 것 같습니다. 선시라고 해서 대단히 어려운 용어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나마 삼세제불이라는 단어가 없으면 이 시를 스님이 썼는지도 모를 판입니다. 그래서 선시가 어려운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감상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다른 시 두 개를 예로 들어 먼저 알아볼까요.

옳으니 그르니 상관 말고/ 산이건 물이건 그대로 두라/ 하필이면 서쪽에만 극락세계라/ 흰 구름 걷히면 청산인 것을

그 유명한 임제 스님의 시입니다. 이 시도 어려운 단어는 없습니다. 뛰어난 선사일수록 쉽게 얘기하는데, 왜 뒷사람들은 어렵게 얘기하려는지 모르겠습니다. 보통 우리는 서쪽에 극락세계가 있다고 하죠? 표현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서방정토에 가고자 하는 것이 불자들의 염원입니다. 그런데 임제 스님이 여기에 시비를 거는 겁니다. 왜 하필 거기만 극락세계라고 하느냐면서요. 굳이 거기까지 갈 필요 없이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흰 구름만 걷히면 여기가 바로 극락인데, 왜 먼 곳에다 극락을 설정해 놓고 그곳에 가려고 하느냐 물은 것이지요. 그럼 여기서 말하는 청산이 우리의 참성품, 불성을 뜻하는 것일 테고, ‘흰 구름은 우리의 참성품을 가리는 숱한 망념을 말합니다. 이렇게 보니 임제 스님이 시를 지은 의도가 바로 드러납니다. 망념만 없애면 불성이 스스로 드러나 그 자리에서 부처로 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망념을 없애는 방법은 뭘까요? 그것도 임제 스님이 바로 앞 구절에 드러내놨습니다. 옳으니 그르니 상관 말고 산이건 물이건 그대로 두라고요. 보고 들은 온갖 것들에 대해서 자신의 기준을 대어 맞지 않으면 숱한 망념들이 올라오는데 그러지 말라는 겁니다. 물론 알아도 실천이 되지 않아 답답하시겠지만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입니다. 알고 끊임없이 노력하다보면 서서히 변화는 일어나니까요.

마음이 멈춘 경지
선시는 비유, 상징, 반어, 파격법들이 종횡합니다. 시라는 형식 자체가 위와 같은 기법들을 즐겨 사용하지만 선시는 특히 그런 경향이 강합니다. 그래서 이해하기 난해할 때가 많습니다. 아래 시를 보시죠.

옛 부처 나기 전/ 뚜렷이 둥근 한 물건/ 석가도 몰랐거늘/ 가섭이 어찌 전하랴

진주 스님이 지은 시입니다. ‘옛 부처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투시기 전 과거칠불을 의미합니다. ‘뚜렷한 둥근 물건은 명백하고, 모자라다든가 이지러짐이 없는 참성품을 뜻한다는 것은 다 아시겠죠? 그런데 문제는 다음 구절부터입니다. ‘석가도 몰랐거늘 가섭이 어찌 전하랴’. 누가 봐도 이 구절은 무언가 강하게 부정하고 있습니다. 대체 진주 스님은 무엇을 부정하려는 걸까요? 쉽게 이 시를 풀어보면 옛 부처님도 나기 이전의 아주 오래 전부터 의심할 수 없이, 분명히 존재해 온 참성품은 부처님이라도 알 수 없으며, 남에게 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석가모니 부처님이 가섭에게 전할 수 있었겠으며 가섭은 또 전해 받지도 못한 그것을 어찌 아난에게 전할 수 있었겠느냐는 뜻입니다.

천하가 공인하는 전법의 계보를 이렇게 정면으로 부정하는 진주 스님 시의 핵심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여러분들은 정에 들었다는 말을 알고 계실 겁니다. 보통 정에는 초선정, 이선정, 삼선정, 사선정의 4단계가 있다고 전해집니다. 초선정이란 자기가 사라져 버리는 황홀경의 순간을 잠시 맛보는 단계입니다. 부처님께선 초선정이란 세간을 초월한 지복의 한 형태일 뿐 이보다 더 뛰어난 단계가 많이 있다고 설명하셨습니다. 이선정에 진입하면 초선정에서의 미세한 요동이 사라지고 마음이 흔들림 없는 바위와 같아집니다. 완벽한 고요함과 멈춤 속에서 삼매에 잠겨 마음의 모든 움직임이 사라지게 됩니다. 마음의 움직임이 멈춰버렸다면 저승사자도, 귀신도 최소 이선정 이상의 경지에 들어선 사람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성인조차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진주 스님의 글을 읽으면 이제는 이해가 되실 겁니다. 다시 말해, 전법 계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스님이 정의 경지에 들어섰다는 우회적인 표현을 하고 있는 겁니다. 진주 스님의 진정한 의도는 본래 우리 자체가 참성품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몰라 중생들이 수많은 생을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려는 것이 아닐까요.

끌려 다니지 않는 삶
워밍업을 했으니 본격적으로 첫 번째 선시를 알아보겠습니다. ‘우리를 뛰쳐나온 소에서 우리란 가축을 보호하거나 통제할 목적으로 울타리를 쳐 만들어놓은 공간을 일컫습니다. 여기서는 물리적인 공간이 아닌 구속된 상태를 뜻합니다. 기분, 감정, 신념, 철학 등이 이끄는 대로 갇혀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우리들의 삶입니다. 사람들 대부분은 이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이들은 이것을 갇혀 있는 상태로 보고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일체의 분별, 망념, 호불호의 감정을 다 벗어버린 상태를 우리를 뛰쳐나온 소로 비유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소는 당연히 실제 소가 아닌, 구속에서 모두 벗어난 사람을 뜻하겠죠. 그런데 뛰쳐나온 소가 석씨네 약초밭을 망친답니다. 여기서 석씨는 석가모니 부처님입니다. 참 재미있죠? 위대한 성인을 석씨쯤으로 말하다니요. 석가모니 부처님이 언제 약초를 재배한 적이 있나요? 부처님을 칭하는 명칭 중에 대의왕, 대약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은 중생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약방문으로, 84천 가지나 되는 약방문을 모아 놓은 것을 우리는 팔만대장경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약방문을 이 시에서는 약초밭이라고 합니다. 선가에서는 흔히 부처님 가르침을 부정하는 듯한 말을 자주 합니다. 한 예로, 황벽 희운 스님은 말하길 부처님 가르침은 우는 아이를 달래는 가짜 놀음과 같아서 울음이 그친 아이에게는 쓸모가 없다고 했습니다. 애초부터 번뇌가 없다면 깨달음인들 어디 있겠느냐. 육조혜능께서 말씀하시길 내게 일체 마음이 없으니 일체 법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셨다고 말하셨습니다. 호불호와 시시비비를 모두 없앤 사람이 나에게 부처님은 필요치 않다며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는 모습을 석씨네 약초밭을 망친다고 표현한 겁니다.

콧구멍이 없는 소는 경허 스님의 일화에서 빌려온 말입니다. 경허 스님이 전염병이 창궐하는 마을에 당도해 노상에 있으면서, 자신도 병에 걸렸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떠는 경험을 하셨답니다. 결국 스님은 본인이 알고 있는 수많은 불교적 지식이 당면해 있는 공포와 두려움을 제어하는 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충격에 수행승들과 일체 마주하지 않으신 채 용맹정진에 들어선지 70여일이 지난 뒤, 우연히 동자승들이 하는 대화를 듣게 됩니다.

시주물 먹고도 방일하면 소가 된다는데 어쩌냐는 말에 소가 돼도 콧구멍 없는 소가 되면 된다는 대답을 들으시고는 그 자리에서 깨달음을 얻으셨다고 합니다. 이제 이 선시를 쉽게 풀어보면 호불호, 시시비비, 분별, 욕망, 집착으로 인한 온갖 속박에서 벗어난 이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라며 불법을 훼손하고 다니는데, 마음이 태산 같아 움직이거나 흔들리지 않으며, 자유로워 어디에도 막히거나 걸림이 없네. 최고의 깨달음을 성취한 이 사람에게 제대로 깨달았구나하는 인가의 표시로 삼세의 부처님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네라는 말이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제대로 깨달았다면 그 사람에게는 교의나 신조가 주는 위안이 더 이상 필요치 않습니다. ‘부처와 중생을 아무 차이 없이 똑같이 봐야만 비로소 안락한 경지를 완벽히 이룬 것이다는 원오 스님의 말씀처럼 깨달은 사람은 어느 것을 귀하다고 가지려 하지도, 천하다고 버리려 하지도 않습니다. 진리를 깨닫게 되면, 이미 자기 안에 다 갖춰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므로 두려워하거나 의존하려 하지 않게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골수는 이렇게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내 앞에 펼쳐진 삶이 왜 이리도 고통스러운지, 그리고 이 고통이 해결 가능한 것인지 궁금해 합니다. 이 같은 고민을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모든 문제의 근원적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없어지지 않는 7가지 재산을 쌓아 고통의 고리를 끊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의 재산, 계행의 재산, 양심의 재산, 잘못함에 대한 두려움의 재산, 배우고 들은 재산, 관용심의 재산은 사라지지도 않고 빼앗길 수도 없는 것들입니다.

불교에서는 편의상 사람을 나누는 9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상중하 세 단계를 다시 각각 상중하로 나눈 것입니다. 그런데 숭고한 자식사랑을 실천하는 부모님은 9번째 가장 아래 단계에 속합니다. 왜냐하면 정성들여 새끼를 키우는 것은 인간이나 짐승이나 하나도 다를 게 없기 때문입니다. 가장 위에 해당하는 최상등근기에는 부처님 가르침을 받들고, 그렇게 살겠다는 원력을 세운 사람들이 속합니다. 현재 삶이 우리의 의식이 만들어낸 세계라면 갖가지 고통스런 짐을 애써 짊어질 필요가 있을까요. 그릇된 사고방식들을 버리면 우리는 콧구멍이 없는 소처럼 그 어떤 것에도 끌려 다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자유롭고 마음이 열린 사람은 바로 최상등근기가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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