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과 현대미술 - ⑪ 로버트 라우센버그 (Robert Rauschenberg)

중국·티베트 등 아시아 여행
내면적 가치 대한 성찰 계기

흰색 캔버스에 흰색을 페인팅
먼지 등 보이지 않은 것 표현
백남준에게도 깊은 영감 영향
예술은 정신의 자유서 나온다

길을 가다가 무심히 바라본 높은 하늘은 텅빈 것처럼 맑고 깨끗하다. 눈으로 보이는 파란색의 하늘은 모든 형상의 모습에서 벗어나 청명함으로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그 청명함이 무엇인지 궁금해진 예술가는 명상을 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보이지 않는 힘을 찾아 그는 예술가의 길을 만들어 가기로 한다.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 1925~2008, 미국)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하여 젊은 라우센버그는 중국, 티베트, 베트남 등 아시아를 여행하게 되며 전통적인 문화를 체험하여 많은 감명을 받게 된다. 당시 아시아 역시 전쟁이 끝나고 혼란한 사회의 모습이었지만 그러한 가운데 평온함을 찾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서 그는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는 그 무엇인가가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난한 삶을 살아가지만 그들은 불평이 없다. 또한 보이는 화려함보다 내면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 같다고 그는 나중에 자신의 여행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 하였다. 이러한 자신의 여행을 통하여 경험한 정신적인 논점들은 자신의 삶과 예술의 뿌리가 되었다.

▲ 라우센버그의 대표작 <White Painting>은 7개의 흰색 캔버스에 흰색을 칠해 완성했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도 존재하고 있음을 표현한 것으로 백남준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White Painting(1951, Oil on canvas, 182.9x320cm)>은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흰색그림이다. 흰색 캔버스(동일한 크기의 7개)에 흰색의 물감을 칠하여 모두가 흰색의 캔버스로 되었을 때 작품은 완성이 된다. 얼핏 보면 그냥 흰색의 캔버스 7개가 옆으로 진열되어 있는 모습이다. 7개의 캔버스를 약간의 간격을 둠으로 해서 벽과의 관계성을 새롭게 하고 있다. 하지만 색에서는 벽의 색과 거의 차이가 나지 않아 벽의 또 다른 유형으로 볼 수도 있다.

라우센버그는 무슨 생각으로 이 작품을 하였을까? 백남준은 이 작품을 보고 크게 영향을 받아 <영화를 위한 선(1962~64)>을 제작하기도 하였을 정도로 이 작품은 당시에 커다란 논란과 찬사를 동시에 받았다.
라우센버그는 자신의 흰색 캔버스에는 무수히 많은 먼지와 미생물 등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존재하는 존재성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백남준은 흰색 스크린에 영사기를 비춤으로 해서 보여 지는 공간의 먼지 등에 대하여 실질적으로 보여준다. 즉, 보이지 않는 것이 존재하며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사라진다. 시간성의 차이를 가지고 있지만 먼지처럼 흩어지며 인연에 의하여 다시 새로운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선(禪)적 사유는 당시에는 많은 논쟁이 되기도 하였다. 지금도 일정부분 이어지고 있다고 보여지지만, 서양인의 관점에서 이러한 인식과 이를 작품으로 보여주고자 하였던 것은 작가의 커다란 인식의 전환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여 진다.

그림은 무엇인가를 화면에 그려야 한다는 고정된 관념을 한 순간 무너뜨린 것이다. 예술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대상의 형상이 아님을 보여준 것이다. 득의망상(得意忘象-뜻을 얻으면 상을 버림)처럼 뜻을 얻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예술행위가 행하여지며 작품이 탄생하는 것이다.

라우센버그에게 흰색캔버스는 화두처럼 인식되었던 것 같다. 수행자들이 화두를 들고 깨달음을 향하여 길을 가는 것처럼 그는 관객들에게 화두처럼 작품을 제시함으로써 생각의 전환을 가져오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것도 행하지 않음으로 해서 모든 것을 행하게 하는 그의 화법은 많은 예술가들에게 예술의 시대적 관점을 인식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가 단색이 아닌 흰색을 선택한 것은 나름대로 명상에 대한 인식과 아시아에 대한 문화적 인해가 선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동양에서는 흰색은 무색이 아닌 유색이며 흰색에는 모든 색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여행을 통하여 인식한 것으로 보여 진다. 흰색은 원초적인 색이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모든 가능성을 수용하는 색이다. 즉, ‘직심(直心)으로 가능한 색이 흰색’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보고 있는 모든 대상은 나의 마음이다. 또한 지금 눈으로 보이지 않는 대상 또한 나의 마음작용이다. 즉, 마음을 떠나지 않으면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에 한정하지 않고 존재성을 인식하게 되며 살아있음을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흰색의 캔버스는 지금 이 순간도 변화한다. 무수히 많은 먼지들이 머물다 흩어지는 과정을 반복하며 자신의 본래 자성은 그 어떠한 것으로도 물들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라우센버그의 1953년 작품 . ‘삶의 무게는 누가 만든 것인가’라는 의문을 던지고 있다.
<Untitled(Elemental Sculpture), 1953>는 라우센버그의 대표적인 조각 작품 중의 하나이다. 제목을 ‘무제’로 한 것은 이전 회차에서 다루었던 것처럼 작가는 다양한 관객의 의견과 관점을 존중한다는 것이다.

콘크리트와 돌덩어리, 철사, 못 등을 사용한 이 작품에서 사람의 형상을 발견할 수 있다. 일상의 삶의 과정에서 우리는 너무나 많은 관념적 사고로 인하여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모습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삶의 무게는 누가 만든 것인가’라는 의문을 던지는 라우센버그는 과거의 전쟁을 통하여 인간의 존재성이 너무 무거운 상태로 변화한 것에 깊은 고뇌를 느끼며 그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작품을 만든 것으로 볼 수 있다.

누구도 나의 삶에 무거운 짐을 지우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신이 처한 상황과 관점에 따라서 스스로가 자신의 굴레를 형성하고 나아가서 무거운 짐을 스스로 짊어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상황을 인식하는 순간 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자 하나 내려놓는 방법을 알지 못하여 고통스러워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문제는 왜 자신이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는지조차 모르기 때문에 그 해법을 찾는 것 또한 어려운 경우가 많다.

무거운 짐의 원인은 삼독심(三纛心-탐욕, 화내는 것, 어리석음)에서 비롯된다. 라우센버그가 이러한 삼독심에 대하여 명확하게 인지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작품에 나타나는 밑부분의 3단의 콘크리트는 삼독심을 표현하고자 하였다고 보여진다. 삼독심에서 벗어나고자하는 몸부림이 강한 콘크리트 벽을 뚫고 나온 발(거대한 못)에서 찾을 수 있다. 이처럼 삼독심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는 것을 작가의 예술적 감각을 통하여 보여주는 것이다.

머리 부분에 매달려있는 커다란 돌덩어리는 관념적 관점에서 습득된 지식이나 경험들을 지키고 활용 하려고하는 어리석음을 보여주고 있다. 자신이 경험하고 책이나 다양한 방법들을 통하여 습득한 지식들이 모두 옳고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비판적 관점에서 표현한 것이다. 지식은 과거의 흘러간 경험들을 축적한 것이다. 하지만, 축적된 경험이 오히려 현재의 현재성을 잃어버리게 하는 관념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경우는 많지가 않다.

현재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은 현재 지금의 관점이다. 과거의 지식이나 경험을 현재의 현상에 대입시키는 순간 오류는 커지는 것이다. 왜 그럴까? 답은 간단하다. 지금 이 순간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한 순간도 멈추어 서지 않고 흘러가는데 과거의 관점을 지금에 대입시키면 과연 그것이 어떠한 관계성을 형성하며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까?

창의성의 반대는 관념적 사고다. 창의적인 사고는 과거의 지식이나 경험을 모두 버리는 순간에 그리고 지금의 현재성을 새롭게 인식하는 순간에 나타난다. 이러한 특성을 가진 창의성은 때문에 종종 매도되기도 한다.

즉, 과거의 관점에서 보면 예술적 의미나 가치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논란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 바로 이 작품이 그러하다. 이 작품이 처음 공개 되었을 때 작품의 작품성과 예술가의 창의성은 인정되지 못하였다. 시간이 흐른 이후에 작품의 진정한 가치가 드러났지만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관념적 사고가 얼마나 고착화돼 있는 지를 인식할 수 있었다. 예술가들은 늘상 창의적인 작품을 하기 위하여 많은 고뇌와 명상을 통하여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아가고 나아가서 인간의 본래적 가치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때문에 동일한 작가의 작품일지라도 동일한 작품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이 오랜 시간 명상을 통하여 인식하게 되는 자유로운 사고는 늘 깨어있기 때문에 새로운 작품들이 탄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노력을 통하여 작가는 관객들에게 자유로운 인식을 공유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작가가 어떠한 의도나 관점을 정하지 않기 때문에 현대미술은 관객의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즉, 관념적 사고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자극을 주는 것이다.

높아 보이는 하늘을 보며 진정한 자유를 꿈꾸던 라우센버그는 자신의 작품을 통하여 진정한 자유를 찾아가고자 하였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사고의 자유를 가져다주었으며 명상을 통하여 관조되는 대상은 뜻을 얻는 방법으로 활용한 것이다.

시대적 관점을 뛰어넘는 그의 예술에 대한 생각들은 마치 한 수행자의 모습처럼 보인다. 진정한 자유를 찾아 자신의 예술에 대한 모든 열정을 바친 그의 노력은 현대미술의 변화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특히 흰색의 캔버스는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예술성과 정신성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많은 관객들과 후배 예술가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보여주고 있다. 진정한 예술은 표현이 아닌 정신의 자유에서 온다고 필자는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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