⑫ 순천 송광사 국사전과 16국사 진영

국사전 전경. 선원공간을 불전보다 높은 곳에 배치했다.
국사전, 승보종찰 송광사 근본
수행선원, 가람 최상단에 위치

보조국사 비롯 16국사 진영
1995년 열세 분 진영 도난

송광사의 근본정신은 참선수행
불교 교단의 삼보는 불(佛), 법(法), 승(僧)이다. 통도사와 해인사, 송광사가 각각의 삼보를 보장한 삼보사찰이다. 저마다의 근원을 가람의 최상위에 신성한 영역으로 경영하고 있다. 통도사의 금강계단, 해인사의 장경판전, 송광사의 국사전이 그 신성의 건축들이다.

국사전(國師殿)은 승보종찰 송광사의 뿌리이자 근본정신이다. 조선왕조의 왕들의 위패를 모신 종묘와 같은 위상이다. 송광사가 우리나라 불교 역사에서 전면에 등장한 것은 1200년에 보조국사 지눌스님께서 정혜쌍수와 돈오점수의 기치로 정혜결사(定慧結社)의 중심지로 팔공산 거조사에서 옮겨오면서 부터다. 지눌스님은 정혜결사문을 통해 명리만 쫓는 세태를 비판하며 고요에 들어 선정과 지혜를 동시에 닦는데 힘쓸 것을 주창했다. 즉 선정과 지혜 닦는 수행자의 본연에 전념해서 부처님 법대로 살자고 사자후를 토한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 세속화와 명리추구에 대한 엄중한 경계를 천명했다. 그 결사운동의 실천이 수선사, 곧 송광사에서 펼쳐져 16국사의 배출로 이어졌으니, 송광사의 근본정신은 참선수행의 수선(修禪)이자, 결사(結社)에 연결될 수밖에 없다. 곧 송광사는 수행근본도량의 귀감인 한편, 청정 승가공동체 구현의 동력으로 작동하면서 한국불교 조계종의 근본도량으로 거듭났던 것이다. 수행근본도량의 핵심적 원동력은 바로 국사전에 모신 16국사 선맥의 유구한 전통에서 우러나온다. 세세생생 정법을 이어온 사자상승(師資相承)의 생명력을 지닌 까닭이다.

송광사 가람은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동심원 형태로 배치했다. 의상스님의 화엄일승법계도 형식의 구도에 따랐다고 알려진다. 건축 밀도가 높고 복잡하지만 상, 중, 하 높이 차등에 따른 삼단구성은 분명히 실감할 수 있다. 하단영역은 일주문과 천왕문 등 진입영역, 중단영역은 대웅보전, 승보전, 약사전 등 불전영역, 그리고 상단영역은 국사전, 하사당, 수선사 등 선원공간이다. 선원 및 참선공간이 대웅보전 등 불전건물보다 높은 곳에 위치한 점이 파격적이다. 일반적인 배치 규범과 상당히 다른 양상이다.

수행본연의 승보사찰의 위상을 뚜렷이 보여주는 사례다. 의도된 의지의 경영으로 볼 수밖에 없다. 청정 승가실현을 표방한 승보종찰의 보다 분명한 자기신념을 반영한다. 그것은 불보종찰 통도사의 정점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이 있고, 법보종찰 해인사의 최상위에 팔만대장경을 보장한 장경판전을 배치한 원리와 같다.

국사전 내부. 1세 보조국사부터 16세 고봉국사까지 16국사 진영을 봉안하고 있다.
국사전 정면 한 칸 확장 추정
국사전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정면이 4칸인 짝수칸인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 같은 이유는 건물 확장과 관련 있어 보인다. 정면이 홀수 3칸이 아닌 4칸인 것도 국사 영정을 추가로 봉안할 때 부족한 공간을 확장하면서 나타난 모습으로 추정한다. 맨 왼쪽 칸의 폭이 다른 세 칸의 폭보다 짧은데서 확장의 흔적을 찾곤 한다. 신위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종묘 정전의 칸 수를 계속 확장해간 사례와 같은 이치다. 국사전의 첫인상은 지붕이 낮아서인지 단정하고 단순한 느낌이다. 건축에서 꼭 필요한 요소만 간결이 갖춘 고전주의적 분위기가 흐른다. 수행공간 속에 위치해서 내밀하고 고요하다. 미술사학자 빙켈만이 말한 ‘고귀한 단순과 위대한 고요’의 정서가 물씬 묻어난다.

국사전은 송광사가 배출한 16국사를 모신 전각이다.

국사전에 모신 16국사는 1세 보조국사부터 16세 고봉국사까지 열여섯 분인데, 15세까지는 고려시대 국사이고, 16세 고봉국사는 고려와 조선의 과도기에 걸친 분으로 국사급으로 추앙받던 화상으로 알려진다.

1세 보조국사 지눌스님 진영.
16국사 영정은 쾌윤, 복찬의 작품
국사전의 16국사는 족자에 그린 진영(眞影)으로 모셨다. 진영은 ‘참모습’이라는 뜻이다. 고승대덕의 초상화 형식을 진영이라 부른다. 한가운데에 보조국사 진영을 배치하고, 향좌측에 2세, 4세, 6세..., 16세 순으로 짝수 번을, 향우측엔 3세, 5세.7세,...,15세 순으로 홀수 번 진영을 배치해서 중앙에 시선이 모이게 했다. 가로 77cm, 세로 135cm로 동일한 규격이라든가, 표현기법, 장황(표구) 제작양식, 의도된 기획배치 등을 고려할 때 동일시기에 동일화원이 그린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보조국사 진영에 남아있는 화기에 의하면, 건륭 45년(1780년) 4월에 금어 쾌윤과 복찬이 그려서 영당(影堂)에 안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화기에 나오는 쾌윤은 18세기 중엽 전남의 선암사, 태안사, 흥국사 등을 중심으로 활동한 불모(佛母)다. 삭발염의(削髮染衣)한 스님은 아니었지만 절에서 평생 ‘윤총각’으로 살면서 오직 불화만 그렸다는 기인으로 통한다. 평소에는 불화 그리는 오른손은 흰 천으로 감은 채 살았다고 한다. 불화를 그릴 때만 목욕재계하고, 오른손을 풀어 사용했다는 이야기다. 불화 그리는 화원을 일러 화사(畵師), 금어(金魚), 편수(片手) 등으로 부른다. 그 중 편수는 ‘한쪽 손’을 의미하는데, 쾌윤의 불심 깊은 기행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니 후세 사람들을 숙연케 한는 대목이다.

진영은 16국사 모두 의자에 앉아 계신 전신상을 그렸다. 그 중 아홉 분은 신발을 벗고 의자에 가부좌를 틀었다. 손에 든 지물을 살펴보면 보조국사만 지팡이 주장자(柱杖子)를 짚었고, 열 분은 불자(拂子)를 손에 쥐었으며, 나머지 다섯 분은 아무런 지물을 갖추지 않고 선정인의 수인을 취하고 있다. 보조국사는 열반에 드실 때 마지막 설법을 하고 주장자를 잡은 채로 법상에 앉아서 열반에 드셨다고 전한다.

진영 속에 주장자를 짚고 계신 장면도 그를 모티프로 삼은 것인지 궁금하다. 진영의 복식은 장삼에 가사를 걸친 예복 형식으로 통일적이다. 채색에서 진영의 바탕 배경은 짙은 갈색을 풀었고, 붉은 색과 초록의 단청을 주된 색조로 입혔다. 16세 고봉국사는 긴 머리카락과 수염을 표현해서 눈길을 끄는데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급변하는 시대정신이 설핏 스쳐 지난다. 진영의 모본은 알려진 바 없어 안타깝다. 단지 보조국사 진영만 대구 동화사 보조국사 진영(보물 제1639호)을 모본으로 해서 그렸다고 전해지고, 그 외 진영은 모두 관념의 상상인물화로 구전한다.

보조국사 진영은 동화사본과 부분 색채만 다를 뿐 완전 판박이다. 그런데 안타까움을 더하는 것은 1995년에 열여섯 진영 중에서 1세, 2세, 14세를 뺀 열셋 진영을 모두 도난당했다는 사실이다. 승보종찰 송광사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것이니 상처와 안타까움이 어찌 깊지 않겠는가?

천정엔 옴 마니 파드 메 훔 진언
텅 빈 국사전 내부에서 진영 외에 눈길을 끄는 대목은 천정문양이다. 천정은 우물반자로 가설한 우물천정이다. 천정의 바탕은 검정의 현묘함이다. 파계사 기영각과 통도사 삼성각의 검은 바탕을 닮았다. 그 바탕에 육엽연화문을 금니로 베풀었다. 여섯 연잎엔 ‘옴 마니 파드 메 훔’의 육자진언을 새겼다. 진언은 비교적 입체감이 나오도록 두터이 금니를 입혔다.

천정에 금빛 육자진언이 일승의 원음으로 파다하다. 대들보의 머리초에도 금니를 풀었다. 대들보 계풍엔 붉은 서기가 흐르는 용들이 용틀임하고 있다. 용틀임의 곡선이 대단히 율동적이고 우아하며 기운생동하다. 국사전 내부는 비었다. 그 곳에서 텅 빈 충만을 느낀다. 고전주의 건축의 군더더기 없는 간결함과 절제의 아름다움이 빛난다. 짙은 침묵과 고요가 살아있는 깊은 공간이다.

1190년 늦봄, 보조국사 지눌스님께서 1만 자 가까운 장문의 <권수정혜결사문>을 발표하셨다. 문장의 말미에 기원을 담았다. ‘동승법우(同承法雨)’, 함께 진리의 법비에 젖게 함이라. 국사전 옆이 수행자의 선원 수선사(修禪社)다. 지눌스님께서 기거하신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하안거 수행승들의 면벽이 불철주야로 이어지고 있다. 달사(達士)와 진인(眞人)의 높은 수행을 따르는 하안거 스님들의 모습에 송광사 유월의 청산은 푸르고도 푸른 빛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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