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정되게 있다는 상(相) 때문에 고통도 있는 겁니다

아무리 급한 일이라도 내 주인공에 다 맡겨 놓고
‘당신밖에 할 수 없어!’ 하고선 가볍게 뛰어 보세요.
그러면 그것은 그대로 부드럽게 돌아갈 거예요.

음식물을 섭취할 때의 마음 자세
질문 마음공부를 해 나가다 보니 세상 만물에는 다 생명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육식은 자주 하지 않지만 식물을 섭취할 때도 ‘분명 이것도 생명이 있는 것이지만 내가 먹고 살기 위해서는 이 생명들을 취할 수밖에 없지 않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런 논리로 그들을 내 몸속에 무조건 집어넣어도 되는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과연 어떤 마음으로 음식을 섭취해야 하는지요.

답변 우리가 식사를 할 때도 수많은 밥과 반찬, 또 간식으로 실과들, 또 어떤 땐 육식을 이렇게 먹습니다. 그것들도 생명이 있고 피가 있고 마음이 있고 살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것을 먹을 때 공덕이 되느냐 안 되느냐는 바로 그 한 생각에 달려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식사를 하실 때도 항상 고맙게 생각을 하고 감사히 생각을 하는 그 마음을 변치 않아야 됨을 진정으로 진실히 생각해 볼 일입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우리가 하다못해 실과를 먹는다 하더라도 그렇고 밥을 먹는다, 반찬을 갖추어서 먹는다, 또 때에 따라서 몸이 좀 이상하면, 먹고 싶다 하면 육식도 먹습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식사를 할 때에 그 또한 생명, 피, 살, 마음…. 이 마음이 없는 줄 아시지만 마음이 다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한테 바치듯이 여러분한테 다 송두리째 바칩니다. 바친다고 해서 바치는 게 아닙니다. 스스로입니다. 그것은 낮은 식물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것이 스스로 낮으면 낮은 대로 높으면 높은 대로 이렇게 올라오게 돼 있는 거죠. 그런 관계상 그것을 먹을 때에 우리가 ‘야, 먹었더니 배부르고 참 흐뭇하고 좋더라.’ 이것만 있는 게 아니라 쓰라리고 아프고, 괴로움이 거기에 뒤따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먹는다고 하는 것만 생각하지 마세요. 그 먹는다는 것 때문에 남을 칼로 찌를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고 밟고 일어설 수도 있고, 또는 남을 욕을 할 수도 있고 남하고 싸움을 할 수도 있고, 고통을 겪게 되는 이치가 한두 건이 아닙니다.

그건 뭐 때문에 그럴까요? 우리가 먹고 살기 위해서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가 하다못해 참외 하나를 깎아 먹는다 하더라도 내 몸뚱이의 내 중생들이, 바로 나를 형성시켜 놓은 나의 그 중생들이 이 몸 안에서 자기를 위해서 많이 운동을 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 관계상 자기는 운동을 해 주는 그 중생을 위해서 그것을 갖다가 먹습니다. 뭐 배가 고프면, 사흘 굶어서 도둑질 안 하는 사람이 없다고 하는데 그것도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도둑질을 안 하고도 먹을 수 있는 문제지마는, 도둑질을 안 했다 하더라도 그것도 엄연히 생명이 있고 다 있기 때문에, 지금 내 육신과 더불어 내 살이요, 내 생명이요, 내 피요, 바로 내 마음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도 업신여기지 않고 동시에 둘로 보지 않는 그 마음을 갖는다면 그것이 바로 나한테 이롭게 되고 갈등이 생기지 않고 어떠한 부작용이 생기지 않으며 모든 게 합류화돼서, 바로 나로 인해서 그 식물도 모두 다 융합이 돼서 한 사람의, 즉 말하자면 무주상으로서 공덕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먹어도 식물이나 그런 것은 다 진화돼서 나와 더불어 바로 인도환생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살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꽃 한 송이를 보고도 이 꽃이 우리 인간의 노예라고 생각을 한다면 노예지마는 우리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얼굴이 웃으면 꽃이 핀 거와 같고 우리가 늙어서 찌부러지면 이것도 스러지는 것입니다. 그와 똑같이 우리는 조화를 이루고 이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도 업신여길 게 없다는 얘깁니다.

그러니 그전부터 얘기해 왔지마는, 수억겁을 거쳐서 진화돼서 우리를 이날까지 형성시켜서 나온 그 주인을 자기가 업신여겨서도 아니 되지마는, 모든 식물 이 자체를 먹는 데도 둘로 보지 말고 자시라 이겁니다. 그래서 항상 밥상을 놓거나 간식을 먹거나 할 때 “참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겁니다. 이 ‘감사합니다’ 한마디가…. 그와 나와 둘이 아닌 까닭에 ‘감사합니다’ 하는 걸 진실로써 느끼고 먹습니다.

그리고 너무 과도하게 내가 내 욕심만 채우고서 남의 살과 남의 피를 배불리, 배가 넘치도록 먹어서는 아니 된다 이런 뜻이 있습니다. 그것도 역시 욕심으로 인해서 남의 생명과 남의 살과 피를 그대로…. 그냥 많이만 먹으면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억지로 많이 먹을 필요도 없고, 억지로 줄일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항상 중도로서 마음을 항상 향기롭게 두고 겸손하게 두고, 하다못해 뭐 하나 깎더라도 이것이 바로 내 살이요, 내 마음이요, 내 피가 아닌가. 그것을 일부러 생각을 하라는 뜻이 아니라 그 생각을 한번 음미해 볼 수 있다면 전체 우리가 살림살이할 때 그것이 다 그렇게 공덕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살생이 아니라 바로 즉석에서 요리를 해서, 자기의 모든 이 중생들이 이 안에 들어서 자기를 크게 인간으로서 형성시킨 것처럼 그 식물도 다 거기에 융화가 돼서, 다 인연이 돼서 역시 인도환생을 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또 육식도 그렇습니다. 고기가 고기로 보여서 못 먹을 때는 둘이지마는 우리가 내 살과 내 피, 내 마음, 내 생명이라고 생각했을 때 즉석에서 바로 인간으로 진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여러분이 그렇게 기복으로만 나갈 게 아니라 이것이 바로 공덕이 되는, 전체가 둘이 아닌 까닭에 우리는 한 길이요, 한 진리요, 한 벗이요, 형제 아님이 없는 것이요, 사랑 도의 의리, 이것을 떠나지 않는 것이 존엄성 있는 고등 동물인 인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어디까지나 그렇게 해 나갈 수 있는 그 마음과 더불어 폭이 넓고 지혜가 넓고 물리가 터지고 이렇게 해야만이 무(無)의 세계 50%, 유(有)의 세계 50%를 맞쥐고서 내가 자유권을 가지고 자유자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딴 사람은 그렇게 생각 안 하고 아무렇게나 먹어 치우는데 야, 저 사람은 저렇게 나와 똑같이 둘이 아니게 볼 수 있으니…. 참, 그 섬기는 마음은, 자기를 송두리째 바치면서도 그 섬기는 마음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서 이 몸에 들어가도 스스로서 살이 되고 스스로서 좋은 피가 돼 주고 그렇게 체하는 법도 없고 그렇게 이 몸을 나쁘게 만들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병이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이 감사하고 그런 거죠.

조직에 소속돼야 공부가 잘되나요?
질문 선도 수련을 하다가 선원을 알게 되었고, 지금은 나름대로 열심히 주인공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부하는 사람들이 모인 신도회에 소속되어야 바람직한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구도자들의 모임이라도 조직에서는 좋지 않은 타성이 생긴다고들 하는데요, 생활에 쫓기다 보니 법회에도 참석하기 힘듭니다. 큰스님께서도 혼자 공부할 수 없다고 하신 것 같은데,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선원의 모임에 가입해야 하나요, 아니면 가끔 법회만 찾아가도 괜찮은 건가요?

답변 그것은 물어보고 하는 게 아니에요. 자기 자신의 신념으로 하는 거죠. 부처님의 마음과 자기 마음이 하나로 통하려면 자기 신념이 필요한 거지, 이 공부는 누구에게 물어봐서 할 수가 없어요. 어느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공부이기 때문이죠. 부모가 대신해 줄 수도 없고 부처님이 대신해 줄 수도 없고, 또 내가 대신해 줄 수도 없어요. 자기 자신만이 얻을 수 있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물러서느냐 물러서지 않느냐, 또 시간이 부족하다 할지라도 도반들 모임에 참석을 해서 열심히 하는 도반들의 모습을 보고 더욱 발심을 해서 정진을 하느냐 안 하느냐는 자기한테 달려 있는 거죠.

만물만생이 다 내 아래에 있는 게 아니라 모두가 스승입니다. 돌 하나라도 스승이에요. 그게 없다면 우리가 보고 배울 수가 없거든요. 그리고 나쁜 사람 좋은 사람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보고 배울 수가 있겠어요? ‘저렇게 나쁘게 해선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그런 것까지도 다 스승일 수밖에요. 매사를 그렇게 해 나간다면 좀 더 우리가 빨리빨리 결사적으로 ‘내가 이 길을 걷지 않는다면 세세생생에 끄달릴 거다. 그리고 내가 위로는 빚을 갚아야 할 부모도 건질 수가 없고, 아래로는 뿌려 놓은 후손들의 모든 업보도 해결할 수가 없다. 그러니 이거는 결사적으로 해야 한다.’ 하는 이런 마음으로 결연하게 살아갈 수도 있을 겁니다. 내가 어디에 속해 있나 하는 문제 이전에 말입니다.

우리 인간뿐만 아니라 일체 만물만생이 다 허공에서 자유스럽게 사는 것 같지만 우리는 무엇 하나도 마음대로 못하고 삽니다. 그리고 벗어나질 못해서 자유스럽게 살 수가 없습니다. 이 지구덩어리 자체도 자유스럽게 구르지를 못하고 매여서 삽니다. 우리도 매여서 살고 있고요. 한 치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무슨 또 다른 고정관념을 만들어서 거기에 들어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왜 고민해야 하는 겁니까? 그대로 인연이 주어지는 대로, 내 의지가 굳어지는 대로 그냥 집어삼키며 가는 거지요. 이것은 중(中)세계의 진리이기에, 삼세를 돌아가는 수레와 같은 진리이니까 보고 듣는 그 속에서 삼세를 뛰어넘는 공부를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것만을 말씀드리고 싶군요.

한밤중에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질문 저는 스물여덟 살의 취업 준비생입니다. 큰스님 말씀은 언제나 기쁘기 그지없는 감로수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공부가 잘 안될 때도 있지만, 스님 말씀대로 성실히 ‘관’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한밤중에 갑자기 심한 두려움에 휩싸이곤 합니다. 저의 두려움이 흔히 느끼는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쩔 방도가 없어서 이렇게 여쭙고 있습니다. 욕심도 그냥 두려고 하고 있고 믿음도 가지려고 노력하는데 여전히 그렇습니다. 간절하게 가르침을 청합니다.

답변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것은 삶의 수레바퀴를 벗어나서, 공기주머니를 벗어나서, 수레가 아니라면은 살 수가 없이 되어 있는 상황 속에서 공기가 없어도 우리가 모든 거를 다 볼 수 있고 할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이렇게 벗어나는 거를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있는 마음을 자꾸 축소시킨다면 ‘너는 그렇게 될 수 없으니까 너는 항상 중생으로만 살아라. 거지로만 살아라.’ 이렇게 하는 거나 뭐가 다릅니까?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인식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마음이 좁고 옹색해지는 것이죠.

그래서는 ‘내가 이렇게 조그마한 건 되는데 큰 거는 안 될 거다.’ 요런 생각, 또 ‘요렇게는 되는데 이런 거를 힘없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나?’ 이렇게들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리고 ‘내가 과거에 얼마나 업을 지었기에 이런 고통이 오나?’ 요런 생각들을 해요. 그런데 업 붙을 자리는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생각해서, 어떤 생각이 입력이 되었으면 그 입력을 지워 버리는 데 내가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가 달려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어떠한 문제가 생겨도 내 마음 주인공에다, 모든 거를 거기에다가 일임하고 입력을 한다면, 쉽게 말해서 믿고 거기다 놓으면은 그냥 거기서, 즉 말하자면 큰 회사라고 한다면 사원이 수백 명이 있다 하더라도 원자에서 수백 명의 입자로 화(化)해서 들어가서 조절을 하기 때문에 해결이 되는 거죠.

내가 고정되게 있다는 상(相)이 있기 때문에 고통도 있는 겁니다. 내가 없다면 부처님 법도, 가톨릭 법도, 기독교 법도 다 없는 거예요. 그러니 나 이외의 어떤 것에 끄달려서, 기복으로 가서는 절대 나를 발견할 수 없고 나를 이끌어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요. 나한테 재료를 다 두고도 먹고 싶은 대로 다 해 먹을 수 없다면 그것은 사람다운 사람이라고 할 수 없지 않겠어요?

인간까지 오기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이렇게 인간까지 와서 다시 밑으로 좌천할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 주인공을 믿고, 모든 아프고 괴로운 것, 공부하는 것, 내가 행동 하나하나 하는 것 등 모든 것을 다 내 주인공 안에다 맡겨 놓으세요. 아무리 급한 일이라도 내 주인공에 다 맡겨 놓고 ‘당신밖에 할 수 없어!’ 하고선 가볍게 뛰어 보세요. 그러면 그것은 그대로 부드럽게 돌아갈 거예요. 그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안 되는 것 뿐이지, 진실로 믿고 내 안의 근본에 모두 맡겨 놓을 수만 있다면 자유스럽게 살 수 있을 겁니다.

본능대로 살면 안 되는 이유
질문 아직은 절에 나가지 않고 있지만 나름대로 불교에 큰 관심을 갖고 있고 대행 스님의 가르침을 따르려 하고 있습니다. 요즘 한마음요전을 두 번째 읽고 있는데 최근에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모든 것을 주인공에 맡기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하는 것과 본능대로 하는 것과는 무엇이 다른지요.

마음공부를 하지 않는 새나 구더기 같은 동물들에게도 불성이 있다고 본다면, 자신과 타자를 분리하여 인식하기 시작한 때로부터의 인간보다는 아주 어린 영아나 유아 그리고 새나 구더기 같은 존재가 더 주인공에 맡기고 사는 것은 아닌지요. 가르침 바랍니다.

답변 그래서 이런 말을 하지요. 우리의 인생은 마치 녹음테이프에 저장시켜서 입력된 내용이 흘러나오듯이 그렇게 산다고요. 그래서 팔자가 있고 운명이 있고 고가 있다고요. 그러나 이 마음공부를 한다는 것은 몰랐을 때 살아온 내용이 입력된 테이프에 다시 새로운 녹음을 함으로써 전자의 입력된 내용을 바꿔 나가는 공부라고 항상 말을 해 왔습니다. 그게 얼마나 큰 차이점이 있는가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인생에서 크게 본다면 분별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은 아무 생각 없이 산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것은 오산입니다. 오히려 어린아이 속에 허옇게 늙은 노인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진리에는 늙고 젊고가 본래 없습니다. 이런 얘기를 언젠가 했었죠. 어느 아이가 불집게를 가지고 놀다가 같이 놀던 아이 정수리를 찔러서 죽였어요. 그런데 문제는 죽이려고 해서 죽인 게 아니거든요. 불집게를 가지고 놀다가 어떻게 잘못해서 죽인 거지. 그런데 알고 보니까 전자에, 죽은 애가 찌른 애를 그렇게 죽였던 겁니다. 썰매 꼬챙이로요. 그러니까 이게 피장파장이 된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그 인연의 과보를 모르고 죽은 아이 집에서 보상을 해라 뭘 해라 한다면 도루묵이 돼 버리죠. 또 원수가 된다는 말입니다. 살생의 문제를 넘어서 인과성으로 또 엮어지는 거죠. 업보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일체를 주인공에 놓는 이 공부는 나를, 자아 완성을 위해서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얘기죠. 이것이 보통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내 안의 수없이 많은 의식들 속에 입력되어 있는 모든 일들을 근본에 되놓는 작업을 끊임없이 하지 않고 그냥 무사태평으로 살아가다가는 정말로 눈물 흘릴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래서 마음공부는 알음알이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쉽게 건성으로 믿고 놓고 맡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자기 뿌리를 믿지 못해서, 맡겨 놨다가도 되끄집어 내고, 또 맡겼다고 하면서 되끄집어 내고 그러는데 그게 아닙니다. 진짜로 믿는 사람은 한번 맡겼으면 맡긴 그 자체가 아주 뚜렷하게 정립이 됩니다. 그러니까 의심도 없고 근심도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좀 시일이 지나서 풀릴 수도 있고 단박 풀릴 수도 있는, 그런 천차만별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생활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믿지 못하니까 조급하게, ‘어이구, 이렇게 맡겨도 안 되는구나.’ 하면서 안달을 하는 거죠. 그렇게 자신을 못 믿으면 이 세상의 무엇을 믿겠습니까? 태어난 자체가 증거입니다. 뿌리로 인해서 싹이 났는데도, 자기 뿌리가 자기를 형성시켰는데도 그렇게 못 믿어서야 어찌 인간으로 태어난 보람을 느끼며 살 수 있겠습니까? 살아오면서 뼈저리게 공부를 해 왔던 분들만이 진정으로 이 도리를 알게 된 고마움을 알고 감사의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그러니 사량으로 생각을 짓지 말고 정말 지극하게 믿고 들어가세요. 공부를 하다 보면 주인공에 맡기는 것과 본능대로 사는 것이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될 것입니다.

자꾸만 중이염에 걸립니다
질문 저는 11살 된 남자 아이입니다. 할머니께서 신앙심이 대단하시고 저도 부처님을 참 좋아합니다. 제 동생은 배가 아플 때 “주인공, 안 아프게 해!” 하고 관하기도 한답니다. 그런데 저는 7살 때 귀 수술을 했는데도 자꾸만 중이염에 걸립니다. 부처님께 어떻게 관하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희 엄마는 저를 위해서 밤마다 천수경을 읽으시고 석가모니불을 하십니다. 저도 빨리 병이 나았으면 좋겠습니다.
답변 우리 학생이 자신의 문제를 남에게 의존해서 해결하지 않고 자신의 근본을 믿고 해결하려고 하는 마음이 참으로 갸륵하군요. 중이염이 자꾸 걸린다고 했는데, 우리 이 몸은 수없이 많은 손님들로 가득 찬 배와 같아요. 그 배의 선장이 바로 나의 주인공이고, 가득 찬 손님들은 내 몸 안의 의식들이고. 그러니 이 배가 넘어지지 않고 올바로 가려면, 그 배의 선장을 믿어야 하듯이, 나는 나의 주인인 나의 근본을 믿고 모든 것을 맡겨 놔야만이 건강하게 살아갈 수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 중이염이 또 걸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날 때마다 ‘주인공, 당신만이 당신을 아프지 않게 이끌어 갈 수 있잖아. 주인공,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이끌어 가.’ 하고 항상 맡겨 놓아야 해요. 그래야 나의 근본에 통신이 돼서 아프지 않게 이끌어 줄 테니깐 말이야. 그리고 나의 근본을 항상 믿고 어떤 문제가 생겨도 나의 선장이자, 나의 영원한 친구인 주인공에 맡겨 놓고 살아요. 꼭 그렇게 하세요. 알았지요?

줄어듦도 늘어남도 본래 없는 이유
질문 저는 주인공에 깊이 관하다고 하는데도 때때로 다가오는 삶에 대한 회의에 빠져드는데 이럴 땐 어떻게 해야 되는지요. 그리고 『뜻으로 푼 반야심경』에 “끊임없는 생명들의 줄어듦도 늘어남도 본래 없다.” 하셨는데, 눈에 보이는 세계의 인구의 격감, 온갖 동물 희귀종 멸종 등은 무의 50% 세계로 환원하는 현상인지요.
답변 사람도 그렇지만 짐승도 그렇고, 사람이 최초부터 사람이 된 게 아니라 우리도 벌레로부터 생겨나서 인간까지 이렇게 온 것입니다. 그런 거와 같이 짐승이 됐으면 사람으로 될 수도 있고 사람이 됐어도 짐승으로 될 수가 있고, 이렇게 해서 자꾸 변화가 오죠. 그러니까 그게 있는 고대로 있는 게 아니라 자꾸 바꿔진답니다.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바꿔지죠. 그러니까 만약에 토끼 그러면 토끼로만 있는 게 아니라 사람으로 태어나고 개로도 태어나고, 개가 사람으로도 태어나고 돼지가 사람으로도 태어나고 그렇게 소가 사람으로 태어나고, 이렇게 여러 가지 가지로 태어난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항상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그게 태어나고 권리도 주어지고 삶도 주어지고 모든 생김도 주어지고, 모두 그렇게 주어지죠. 그러니깐 여러분들이 잘 생각해서 사셔야 될 겁니다.
하여튼 마음 하나 이것도 마음이 마음이 아닙니다. 마음이 너무 여러 가지로 많기 때문에 마음이 아니라고 그러죠. ‘마음 아닌 마음을 진짜로 써야 된다. 마음 아닌 마음을 항상 둘 아니게 써야 된다.’ 이렇게 보죠. 그러면 여기 가서 이걸로 태어나고 저기 가서 저걸로 태어나고, 사람으로 태어나고 그러는데 어디 가서 태어나진 않았겠습니까? 그러니까 내 부모 아닌 게 없고 내 자식 아닌 게 없고 하여튼, 짐승 하나도 내 모습 아닌 게 없고 이렇게 되죠. 그러니 내가 아닌 게 하나도 없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모두 둘로 보지 말고, 그렇게 둘로 보지 않는 반면에 그냥 사랑 없는 그냥 사랑이 되죠, 자연적으로. 여러분이 ‘주인공 찾으려면 주인공 어디서 찾나?’ 이러지 말고, 자기 나무로 치면 뿌리라고 그러죠. 뿌리와 나무가 같이 붙어 있으니까 그냥 얼마나 편리합니까? 그렇게 편리한데도 ‘주인공이 어디 있나?’ 그러고선 찾거든요. 그러나 항상 나무가 뿌리에 붙어 있듯 주인공이 그렇게 있으니깐 걱정하실 게 없단 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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