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 신비주의에 빠져
자비 실천행이 절실할 때
종합학문적 접근도 필요하다

지난 526일 조선일보와 경찰청이 주관하는 청룡봉사상 50회 수상자가 발표되었다. 수상자의 면면을 보니 탐욕과 분노로 얼룩진 각종 범죄의 아수라 같은 세태 속에서 오랜만에 가슴이 따뜻해진다.

경찰관의 박봉 속에서도 불우한 청소년을 위해 20여 년간 돌보고 보듬는 선행을 한 분, 수많은 어려운 노약자에게 무료 안과 시술과 각종 의료봉사를 국내외적으로 하며 생명의 빛을 전하는 의사, 생선가게를 하면서도 어려운 이웃을 돕는 기부천사 같은 분, 불우하고 외로운 학생들을 돕는 하숙집 여주인 등. 이들의 행적 하나하나를 읽어 보면서, ! 이 분들이 바로 부처님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부처님이 아직 이 세상에 계시니 그래서 우리는 아직 절망할 필요가 없겠다는 위안이 든다.

동시에 연기니 무아니 자비니 하면서 붓다의 사상을 읊조리면서 어려운 이웃에 소홀한 내 자신이 초라해 진다. 동시에 붓다의 자비 정신이 살갑게 다가온다.

근래에 한국 불교계에서는 깨달음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새롭게 거론되면서 다양한 논쟁이 제기 되었다. 이 논쟁의 긍정적인 의미를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이 문제가 거론되는 것은 한국불교가 가진 문제점이 거론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불교는 깨달음 지상주의 또는 깨달음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필자는 자비 없는 불교는 없다고 단언한다. 깨달음과 자비는 일란성 쌍둥이와 같다. 깨달음에서 자비가 나오고 자비에서 깨달음이 나온다. 그런데 한국 불교에서는 상구보리는 잘난 형님이 되었고 하화중생은 못난 동생이 되어 깨달음의 그늘 속에서 자비는 그 위대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붓다 사상의 근원은 모든 존재가 행복하게 살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터전, 정토를 만드는 자비 정신에 있다.

이제 한국 불교에서는 자비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지고 이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해야 한다. 이것은 한국불교의 나아갈 바를 가름하는 중요한 과제이다. 자비는 사랑, 배려, 겸양, 절제, 용기 등 일반적인 윤리적 덕목을 포괄하고 통합하는 덕목이다. 때문에 그 만큼 추상성이 높다. 이 추상성을 일상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체험하고 실천할 수 있는 과제를 찾는 치열한 노력이 필요하다. 자비 실천은 깨달음보다 어렵다고 본다. 또한 자비 실천의 방편은 깨달음의 방편보다 어렵다고 본다. 한국불교의 긴 흐름 속에서 큰 깨달음을 얻은 고승들은 많은데 왜 큰 보살행을 한 스님들은 왜 많지 않은가? ‘마더 테레사같은 사랑의 실천자를 왜 불교는 가지고 있지 못하는가?

불교는 자비라는 큰 그릇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처럼 큰 그릇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강물을 뜰 생각은 안하고 그릇 자랑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비 실천은 결코 구호로 되는 것이 아니다. 자비라는 큰 그릇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자비 윤리학을 정립시키고 자비 정신을 실천하기 위한 정교한 틀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자비에 대한 종합학문적인 접근도 필요하다. 즉 현대사회에서 작동할 자비의 역할과 기능이 무엇인가에 대한 통섭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한국불교는 깨달음에 대한 다양한 이론과 방법론을 가지고 있지만 자비 실천에 대한 것은 미흡하다고 생각한다.

자비실천은 깨달음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자비란 무엇인가?’ 이것이 한국 불교를 살리는 화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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