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개천 국민대 공간디자인학과 교수

참불선원 불교인문학 강좌불교건축의 위대한 성취

건축은 그 시대의 문화와 사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유적과 같다. 특히 과거 한국불교가 추구한 건축양식은 고정돼 있지만 시선과 환경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수 있도록 조화를 중시했다. 그렇기에 한국불교 건축은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여여한 모습으로 대중과 호흡한다. 김개천 국민대 공간디자인학과 교수는 530일 열린 참불선원 인문학강좌에서 불교는 본질적으로 믿는 것을 갖지 않기에 존재적 삶에 충실할 수 있게 한다한국불교 건축은 고정된 상식이 아닌 본연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시도가 엿보인다고 설명했다. 정리=이승희 수습기자

 

▲ 김개천 교수는… 동국대 선학과에서 동양철학과 선사상을 전공했다. 〈명묵의 건축〉 〈미의 신화〉 〈선의 건축미학에 관한 연구〉 등 한국 미(美)의 조형사상과 현대건축 사상에 대한 저서와 논문들을 발표해 왔고, 이를 기반으로 현대적인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대한민국 디자인대상 대통령 근정포장, APSDA EXCELLENT AWARD, RED DOT DESIGN, IFI AWARD를 수상했다.

정형화된 형식 버리고,
본질에 충실하니 生動
무수한 변화 포용하며
주변과 조화 이뤄내

오늘은 한국불교 건축이 이룩한 위대한 성취에 대해 말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익히 잘 알고 있는 불교건축 중에서도 최고 수준의 성취를 이룬 건축을 살펴보고, 그것들이 갖고 있는 매력을 어떻게 현대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지 알아보겠습니다.

한국이 추구한
우리나라 미인도 중 가장 대표적인 신윤복의 미인도는 유가(儒家)적 그림을 설명하기 좋은 예시입니다. 사실 동아시아 주요 종교인 유, , 선은 공통의 지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 종교는 진리가 무엇인지, ‘진리가 어떤 식으로 현실에서 발현될 수 있는가를 고민합니다. 다시 말해, ‘진리현실이 둘이 아닌 하나로 체화하는 형식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단지 구체적 체화 방법에서 종교간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미인도를 보면 그린 것은 별로 없이 배경과 얼굴이 비어 있습니다. 유가에서는 리()를 무형과 무짐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형은 형태가 없다는 뜻이고, 무짐은 조짐조차 없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니 불교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 그림은 무형하고 무짐하긴 하지만 여인의 기품, 품위, 인품 등을 그대로 전하고 있습니다. 거의 그린 것 없이 여백으로 이루어진 그림인데도 그 인물됨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유가가 이룩하려던 지극한 아름다움의 경지였습니다.

한편 수묵화는 불교적 그림입니다. 텅 빈 산에 물이 흐르고, 꽃만 펴있다는 내용의 시가 적힌 수묵화는, 설명답게 사람도 없고 사실 꽃이나 물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매우 공적한 그림으로, 글로써 정황을 전하고 있습니다. 거의 흔적처럼 사물들이 존재하지만 우리는 물이 흐르고, 꽃이 피고, 저 집에 사람이 사는 것 같은 느낌을 전달받습니다. 구체적 형상으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더 많은 것들을 상상하게 하고, 볼 수 있게 만드는 불교적 아름다움의 형식입니다. 불교에서는 구체적으로 대상을 직시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직시한다는 것은 목적과 목표가 분명해서 그것을 구체적인 관념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구체적인 관념을 갖지 않은 상태가 더 자유롭고, 따라서 더 많은 것을 포함할 수 있는 형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고려불화들은 거의 다 비슷한 형식입니다. 공통된 특징은 옷과 피부 등을 투명하게 표현해서 아주 얇고 가늘게 대상이 존재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거의 존재하지 않는 투명한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투명하다는 것은 어떤 대상이 마치 부유하는 듯해서 계속 흔들리는 것 같고, 따라서 마치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자아내는 효과를 냅니다. 없는 듯 느껴져 쳐다보기만 해도 신비스런 영역을 느끼게 합니다. 왜 고려불화를 이런 식으로 그렸는지 아십니까? 당시에는 그림을 단지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예배의 대상으로까지 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화엄불교의 철학이 건축에는 어떻게 투영될까요? 투명하고, 화려하고, 부유하는 듯 아주 가볍게 존재하면서 신적 경지를 불러일으키는 건축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요?

정지하며 생동한다
일단 조각을 예로 들어서 이해를 넓혀 보겠습니다. 태종무열왕릉비에 새겨진 용의 모습을 예로 들겠습니다. 태종 무열왕은 신라를 통일한 강력한 왕으로, 당시 신라는 문화적으로도 가장 전성기였습니다. 그러나 왕의 비석에 조각된 여섯 마리의 용들은 마치 멸치처럼 빼빼하고, 서로 딱 붙어서 머리를 모두 땅을 향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측면에 몸통을 보면, 팔이 아주 심하게 꺾여 몸에 완전히 붙어 있습니다. 이보다 더 정지할 수 없는 형식으로, 마치 살아있는 듯한 생생한 용을 볼 수 있습니다. 동아시아 용 중에서 이보다 이 완벽히 발현한 경우는 없습니다.

건축으로 치면, 저는 불국사가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불국사는 정면에서 쳐다보면 높이가 일정하지 않고 전체적인 모양도 대칭이 아닙니다. 불국사에서 유일하게 똑같은 두 개의 누각(범영루와 좌경루)조차 아래 석조기둥을 다르게 조각했습니다. 좌경루의 기둥은 팔각형으로 단순하지만 범영루는 마치 허리가 잘록한 항아리 모양처럼 조각을 쌓아 올렸습니다. 심지어 바라보는 거리에 따라 펼쳐지는 풍경도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멀리서 볼 땐 양 옆에 계단을 거느리고 있는 대칭형이지만 가까이 진입하면 양 옆의 건물은 안보이고 대신 중앙 계단이 하나 있는 자하문 한 채와 양 옆에 두 개의 누각만 보입니다. 고정적이고 완전한 형식이 아니라 있는 위치와 상황에 따라서 계속 변화하는 건물입니다. 불교에서 아름답다고 하는 형식은 완전하고 영원한 형식이 아닙니다. 세상 이치도 관계맺음이라는 측면에서 무수히 변화하는 인드라망 같은 형식으로 설명 가능하듯이, 불교에선 건축 역시 완전하고 고정적인 실체가 아니라, 스스로는 고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동하는 형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음은 통도사입니다. 통도사 입구에 서 있는 비문에 영축산 통도사라고 적혀있습니다. 영축산은 인도에 있는 영산회상의 장소인데, 그곳에서 이름을 따왔습니다. 통도사는 일주문을 들어서고 나서도 약간 곡선으로 뻗어 있는, 전나무 빽빽한 길을 걷도록 방문객을 인도합니다. 아마도 사찰 입구에서부터 영축산 초입에 들어온 느낌을 조성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통도사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습니다. 대웅전 문을 열면 너머로 진신사리탑이 보입니다. 혹자들은 통도사 대웅전에 부처님이 없다고 하지만, 대웅전 문을 열고 보이는 어린 연꽃잎 모양의 진신사리탑을 보면 저는 그곳에 부처님이 살아 있다고 느낍니다. 인도 영축산에서 범왕이 부처님께 설법을 청하며 바친 연꽃 한 송이를 대중에게 들어보이자, 오직 가섭존자만이 그 뜻을 이해하고 미소를 지었다는 염화미소의 순간! 아마 방문객 중 가섭존자 같은 사람이 있다면 이 어린 연꽃탑을 보면서 미소를 지을 겁니다. 저는 이곳을 둘러보면서 건축이 이룩한 이토록 큰 종교적 희열이 있을까하며 감탄했습니다. 다시 말해, 진신사리의 가치를 넘어 진신사리의 주인을 살아있도록 만드는 초월적 경지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름다움 여부를 떠나, 통도사는 부처님을 살아있게 만든 공간이 됐습니다.

우주 본연 닮고자 한 건축
한국불교 건축물을 살펴보면 생동한다는 점 이외에도 비정형적 형태를 통해 우주 본연에 충실하고자 고심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저는 믿는 행위자체가 사람들이 추구하는 바를 목적으로 고정시켜두고, 이외의 것들은 구분해서 배척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교는 본질적으로 믿는 것을 갖지 않기에 존재적 삶에 충실할 수 있게 합니다. 무종교의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불교 건축 중에는 고정된 상식에 입각한 것보다는 본연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시도들이 엿보이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건축이 없나 생각해보니 해인사가 떠올랐습니다. 해인사 일주문은 들어서는 길이 U자 모양으로 살짝 위로 휘어 있습니다. 매우 독특한 형식인데, 마치 곡불장직(曲不藏直)’을 떠올리게 합니다. 해인사의 장경각전은 바닥이 흙으로 되어 있습니다. 귀중한 팔만대장경을 모셔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돌을 깔거나 장식을 화려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햇빛이 바닥을 비추게 하려고 한 듯 바닥에는 빛만 비치고, 위로는 처마의 그늘이 어둠처럼 깔려있습니다. 내부를 아름답고 특별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매우 검박해 보입니다. 여기서 검박이란 말은 단순히 검소하다는 뜻이 아니라, 우주의 본연과 일치한 정도를 이뤘을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들어왔을 때, 바닥에 빛의 양탄자가 깔린 듯, 창살로 인해 빛의 그림자가 깔린 듯, 빛을 밟으면서 흙길을 걷게 하는 이렇게 무던하고 덤덤한 건축이 과연 팔만대장경 판각을 모시고 있는 건축이라고 얘기할 수 있나 감탄하게 됩니다. 부석사의 안양루도 그러합니다. 큰 지붕이 뒤에 있는 산을 다 가려 오직 하늘만을 거느린 이 건축물은 마치 초라해 보이기로 작정한 듯 빈약한 기둥을 세웠습니다. 아무것도 주장하는 바가 없어 보입니다. 안양루 정면에서 보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의 범종각 또한 뒤쪽에서 본다면 초라하게 보입니다. 마치 화장실 건물처럼 말입니다. 건축에는 반드시 그 존재 이유가 있습니다. 앞에서 본 웅장한 지붕은 화엄정토를 표현한 것일 겁니다. 그러나 뒤에서 봤을 땐 건물 스스로가 한없이 작아지려고 합니다. 드러내지 않고 사라지려는 형식입니다. 저 멀리 보이는 자연을 건물로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마치 선()을 보는 듯 특별한 모습을 갖추고 있지 않기에 오히려 주변과 합쳐져서 빛이 납니다.

제가 건축한 정토사에도 이러한 정신을 담았습니다. 외관은 시멘트로 발랐고, 정교하거나 혹은 너무 투박하지 않도록 주의했습니다. 시공자가 마음대로 시공해도 괜찮았습니다. 내 의지를 벗어난 형식이라도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작가의 개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건축은 조금만 형식에서 벗어나도 불편해집니다. 제 건축물이 큰 포용력을 보여주는 작품이 되길 바랐습니다. 뒤에 있는 산이 그림자처럼 보입니다. 빛과 그림자가 구분 없이 한시적으로 존재하는 의 경지를 표현하기 위해 창살 틈으로 산의 그림자를 허락했습니다. 촘촘한 창살 사이로 산의 그림자가 벽을 꾸며주고, 부처님 계신 곳으로 시야를 돌리면 그 그림자는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보통 부처님 자리에는 연꽃 조각으로 장식을 하는데, 제 눈에는 먼지가 켜켜이 쌓인 모습만 들어왔습니다. 저는 전통을 계승만 해 나가기보다는 이 시대의 정신을 드러낼 수 있는 형식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전통적으로 연꽃을 조각하는 것으로 꽃비를 얘기했다면 저는 빛과 그림자가 함께 공존하는 방식으로 꽃비를 형상화했습니다. 빛에 의해 계속 바뀌는 그림자를 그대로 비춰서 매시간 바뀌는 문양을 드러내는 바닥을 표현했습니다. 정토사는 이렇게 자기 자신은 특별할 것 없는 건물이지만 주변을 자신의 것으로 포괄하는 형식을 보여줍니다. 현대적인 것이 단지 새로운 것만을 의미하진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적 표현법이란 시대정신을 담아 자신만의 것을 창조하는 것이 아닐까요. 주변의 어떤 소리에도 물들지 않고 오로지 자신에게만 집중해, 저절로 내 자신이 드러나는 건축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