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살면서 닥치는 대로 그냥 그냥 거기다가 놔라!

싹은 제 뿌리로 인해서 사는 거니깐
그 싹이 제 뿌리를 믿고 제 뿌리에 모든 걸 맡겨 놨을 때
바로 그 몸속에서 모든 의식들이 작용을 해 줍니다.

(지난 호에 이어서)
여러분이 대충 공부하는 그 과정에도 그러한 일이 그렇게 많으니 실수하지 말고 속지 말라 이런 겁니다. 그건 그렇고, 이 지금 어떠한 감응이 돼서 이렇게, 지금 뜻으로 이렇게 감응이 되는 사람이 있고, 뜻으로 확실히 감응이 돼서 이렇게 왕래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그냥 그렇게 그대로 지금 기르고 가는 사람이 있고, 여기 (대중 스님 쪽을 가리키시며) 많이 있죠.

그러니까 우리 조그만 스님네들이, 조그맣다고 조그만 게 아니라 내가 (가슴을 가리키시고) 먼저 나서 있으니까 조그맣다고 하겠죠? 조그만 거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저 어린애라도, 스님네들이 나이가 적어서 어린애라도 바로 부처님으로 보실 수 있다면 바로 자기가 부처입니다. 이 도리를 상세히 알아야지 무시하고, 이거는 뭐 염불을 제대로 못하니깐 뭐 어쩌고, 이거는 뭐 아직도 멀었고…,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왜 산중에 올라가서 돌에다가 물을 떠놓고 정성을 들입니까? 왜 그럽니까? 돌이 무슨 말을 하고 돌이 무슨,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어서 그렇게 돌에다가 하겠습니까? 돌도 생명이 있고 돌도 부처라는 생각에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올바른 길로 올바른 역할을 받아서 잘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도리를 확실히 참…, 물에서는 용신(龍神)으로서 한마음이 돼 주고, 들에서는 또 들에서 한마음이 돼 주고, 허공에선 허공대로 한마음이 돼 주고, 은하계에선 은하계대로 한마음이 돼서 그 수천 은하계를 다 한마음으로 보필하면서 이렇게 나가는 것을 바로 아셔야 합니다. 그 은하계를 대치해서 나갈 수 있는 그 자체가 바로, 뭐 요새 시쳇말로 블랙홀이라고 합디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불바퀴라고 했죠. 우리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도 그냥 알아들을 수 있죠. 블랙홀이라고 안 그래도 그냥 큰 별이라고 하는 소리가 그냥 그 불바퀴라고 하는 거나 같죠. 불바퀴가 그냥 생산처기 때문에 불바퀴를 얘기 안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랬겠죠.

그러니까 우리가 물바퀴, 불바퀴, 수레바퀴를 잘 얘기하는데 수레라는 뜻을 가진 거는 끊임없이 돌아간다는 뜻에서 수레를 말씀하신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자나 깨나 어떻게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밤과 낮이 갈려서 둘이 돼서 이렇게 따로따로 떨어져서 돌아가겠습니까? 그러니까 수레라고 했죠. 수레로 이름을, 수레를 방편으로 쓴 거죠. 그래서 “너희 마음들이 있걸랑은 내놔 봐라. 답답한 마음, 욕심나는 마음, 관습 되는 마음, 이 의식적으로 나오는 그 마음이 있걸랑은 내놔 봐라. 이 세상에 수레바퀴가 돌아가듯 쉴 사이가 없건만, 어찌 거기에 먼지 묻을 자리가 있다더냐. 네 마음도 그러하거니와 모든 사람들의 마음도 수레바퀴처럼 돌아가나니라. 그런데 그 마음자리에 어찌 먼지 앉을 자리가 있다더냐.” 했거든.

그런데 자기가 마음을 지어 가지고 그냥, 여기 스님네들도 이렇게 앉아 있지마는…. 모든 사람들이 다 그래요. 벌써 가정에서도 그렇고, 어떤 도량에서도 그렇고, 그냥 듣기 싫은 소리를 하면 “어이구, 저 사람은 왜, 저 스님은 나를 가지고 왜 저렇게 미워할까?” 이렇게 생각할 거라고. 그러나 미워하든 안 미워하든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 그 미워하는 그 소리가 어디서 왔느냐는 거야. 자기한테서부터 온 거라, 그게.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둘로 보지 않고 모든 거를 자기 탓으로 돌리고 그 모든 거를 순응하고 돌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앉은 자리를 아주 그냥 금방석으로 만들어 놓는 자리가 되겠죠, 움죽거리지도 않는 자리.

하여튼 여러분이 공부하실 때에 어떠한 문제가 닥쳐오더라도 가는 거 잡으려고도 하지 말고 오는 거 막지도 말고 어떠한 용도든지, 상대방에게 어떠한 문제가 있든지 밉게 볼 그런 사이가 없습니다. 이쁘고 밉고 이런 사이가 없다고요. 그럴 사이가 없다고요. 지금 문 없는 문으로 그냥, 죽고 사는 거를 다 걸고 넘어가는 판국에 그렇게 빨리, 빛보다 더 빨리 들어가는 판국에, 빛보다 더 빨리 돌아가는 판국에 무엇이 거기 걸리고 거기 뭐가 있습니까? 살기 위해서요? 먹기 위해서요? 잘 입고 잘 살기 위해서요? 천만의 말씀이에요. 사람 되기 위해서죠. 허허허. 하여튼 이 양면을 다 놓지 않는다면 그 가운데서 불이 일어날 수가 없죠. 이것이 전자와 전자 줄을 갖다가 딱 이어 놓고는 불이 들어온다면 그 이어 놓은 자체는 바로 이 컵과 같죠. 이것도 무시할 수가 없고 불 들어오는 것도 무시할 수가 없죠. 우리는 항상 밝게 살 수가 있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과거에 살던 나와 현재에 사는 나가 둘이 상봉을 못하면 임신이 될 수가 없고, 임신이 안 되면 어린애를 낳을 수가 없고, 어린애를 낳지 않는다면 어린애를 기를 수도 없고, 어린애를 기르지 않는다면 사람 될 수가 없고, 사람이 되지 않는다면 자유인이 될 수가 없죠, 알기 쉽게 말하자면. 세세생생에 끄달리지 않으려면, 아니 세세생생의 모습을 이걸로 저걸로 요걸로 그냥 바꿔 가면서 한 발도 빼지 못하고 그런다면 자기 중생도 건지지 못해.

여러분이 기어코, 기어코 ‘허! 오늘 죽든지 내일 죽든지 죽는 거야 상관이 없다!’ 하고 덤벼야죠. 그래서 어떤 분들이 “아이고!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 하고 오면 너무 답답해요, 그 자체를 볼 때. 살려 주고 죽여 주고 이런 거를 양면을 다 거기다가 집어넣고 그냥 떡을 만든다면, ‘하이고! 거 뭐, 살고 죽는 게 어디 따로 있느냐?’ 이렇게 할 때, 제 몸을 제가 간수하지 않는 놈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 제 몸을 제가 간수하겠죠. 껍데기가 껍데기를 간수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간수는 안 됩니다. 자기가 자기 껍데기를 간수하려고 해야 되는 거지, 우리가 우리 집을 사서 사는데 집이 무너진다, 이럴 때는 주인이 집을 간수하죠? 그 집 껍데기가 무너진 거를, 그 무너진 껍데기가 껍데기를 고쳐 낼 수 있겠습니까? 제 손가락이 제 손가락을 꺾지 못하듯. 우리는 그 도리를 완전히 터득하기 위해서는 꼭 임신을 해서 어린애를 낳아야 합니다. 어린애를 낳아서 어린애를 잘 키워야 합니다. 그럼 질문들 하세요.

질문자1(男) 스님, 낙태에 대해서 어떻게 보아야 됩니까?

큰스님 아주 간편하게 그냥 낙태라고 한마디로 해 버리네. 하하하. 사방에 붙어 들어오는 게 낙태인데, 허 참! 이거 봐요. 낙태를 한 번 시키려면 그 영혼 자체가 인간으로서 화(化)했을 때 어떤 영혼이 어디에서 왔나를 알아야 하고, 그렇죠? 그리고 이 집안 조상들은 어떤 문제의 연관을 가졌나, 이거를 알아야 대처를 해요. 그러기 때문에 낙태를 지금 산부인과에서 한다지만 이 공부하는 사람들은 열 개든 스무 개든 백 개든 만 개든 상관이 없어요. 크나 작으나 많으나 적으나 그 수효는 따로 없으니깐요. 예를 들어서 만약에 자기 주인공에 모든 것을 일임하고 낙태를 시킨다면은 그거는, 즉 말하자면 물질적인 형상은 그냥 낙태를 시키고 그 영혼은 건져서 자동적으로 다시 재생이 돼 나가게 되니깐요. 용광로에다가 무조건, ‘용광로에 넣으면 무조건 녹아서 모두 가공돼 가지고 저절로 생산이 돼서 나간다.’ 이런 거를 아니까 용광로에다 다 넣거든요. 용광로에다 다 넣는다면 그냥 자동적으로 생산이 돼서 나가요. 생산이 돼서 나갈 때 어떤 걸로 나가느냐가 문제죠. 즉 말하자면 용광로가 금(金)의 용광로냐 무쇠의 용광로냐, 여기에 따라서.

여러분도 공부하면서 차원이 다 있습니다. 없는 게 아닙니다, 역력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다 알기 때문에 나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 못하는 이유가 있죠. 말을 하면은 아니 되니깐요. 그러니까 여러분, 그 낙태라는 문제가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낙태를 한다 하더라도 첫째는 물질세계에 사는 사람의 그 삶을 위해서, 둘째는 그 영혼을 건지기 위해서, 셋째는 내가 넓어져서 지혜롭게 대치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 그러니까 모든 게 삼합(三合)이 맞아야 되듯이, 이것이 모든 걸 거기다 놓고 가면은 공부가 완전히 된 사람은 금(金) 용광로일 테고…. 금 용광로에 넣어도 브로치가 되느냐, 목걸이가 되느냐, 반지가 되느냐, 귀걸이가 되느냐의 문제가 또 있죠.

그런 데다 또 습이 덜 떨어지고 아주 그, 참도리의 완성이 되지 못한 사람들에 한해서는, 갈팡질팡하는 사람은 그것이 금 용광로가 아니라 그냥 무쇠 용광로가 돼 버려요. 그건 자동적이에요. 이거는 오신통(五神通) 자체가 컴퓨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들어가면 쇠로다가 재생이 돼서 나가죠, 또.
사람들이 많고 많아도 차원이 다 있습니다, 얼굴이 다 다르듯이. 요만큼도 똑같은 거는 없어요, 하여튼. 묘하죠. 그렇듯이 우리가 이렇게 한마디를 방편으로 했으면 천차만별이라는 걸 아셔야 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생명을 걸고 공부하셔야 됩니다. 생명을 건다고 해서 뭐 금방 죽을 거 살아나고, 금방 살아날 거 죽는 게 아닙니다. 죽을 사람은 아이, 그냥 방안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죽습니다. 그러니까 “이 절에 다녀도 죽더라.” 이러진 마세요. 허허허. 그러니까 죽고 사는 거 개의치 마시고 그냥 열심히 하시되, 낙태라는 것도 그러한 요소 요소가 있으니까 될 수 있으면 그….

그리고 또 이런 게 있죠. 낙태에 대해서 한마디 또 할 게 있는데, 부모든지 자식이든지 생명을 건지기 위해서 산 목숨을 죽인다 이럴 때 주인공에다 놓고 하면 그 무명을, 그 짐승의 무명을 벗겨 주고 사람으로서 한 찰나에 되는 겁니다. 한 찰나에 사람의 용광로로 들어가서 재생돼서 사람으로서 환토를 하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이 공부를 아주 모르는 사람에 한해서는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무조건 생명을 그냥, 그걸 건지지도 않고, 둘 아니게 건지지도 않고 그냥 생명을 죽이니까 살생이 되는 겁니다. 낙태시키는 것도 그렇습니다. 여러 가지로 다 그렇습니다. 지나가다가 뱀 한 마리를 죽여도 꼭 그렇습니다. 이거는 요만큼도 에누리가 없습니다. 개구리 한 마릴 죽였어도 에누리가 없는 겁니다. 개구리도 자기 어미를 알고 자기 아비를 알고 자식을 알고, 우리와 똑같은 그런, 바로 살림살이를 하고 있는 거고 마음들을 그렇게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원한이 없겠습니까? 식구들을 다 때려죽여 보세요. 거기에 언제든지 두고 보자 하는 그 마음이 철통같이 들어 있을 겁니다, 아마.

그러니깐 낙태시키는 것도 이런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다 문제가 되어지죠. 정말입니다. 또 짐승이나 어떠한 고기를 물에서 잡아서 그냥 죽이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산 짐승을, 산 것을 사다 먹지 마라. 산 것을 사다 먹지 말되 죽은 것도 네 살로 생각을 해라. 주인공에다 모든 것을 맡기고. 그래서 기도할 때 그냥 ‘주인공, 감사합니다!’ 하고 먹어라.” 채소들을 끊어다 먹는 것도 생명을 죽이는 거지 생명을 안 죽이는 겁니까? 그러나 연쇄적으로 먹고 살게끔 다 돼 있는 것이니, 차원이 아주 낮은 거는 높은 놈한테 잡아먹히게 돼 있으니깐요. 그렇게 진리가 그렇게 돼 있으니깐요. 그러되 내 생명으로 알아라 이거죠. 그럼으로써 모든 걸 빨리빨리 진화시킬 수 있고, 빨리빨리 화할 수가 있고, 빨리빨리 창조력의 그 자유스러운 능력을 가질 수 있다 이거죠.

그러니까 이치에 닿지도 않는데, 자기한테 아쉬움도 없는데 포수가 나가서 총질을 한다거나 낚시질을 한다거나 이래 가지고 죽일 필요가 없죠. 반드시 두 가지,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두 가지가 있어요. 할 수 없이 먹고 살기 위해서 생명을 죽인다거나 이런다면 반드시 주인공에 일임하고서 그대로 하셔야 그 무명이 벗겨질 수 있죠. 그래 첫째는 무명을 벗겨 주니까 자비고, 또 그 살은 약으로 대치를 하니까 자비고, 전부 다가 더불어 같이 자비다 이 소립니다. 그 도리를 모르는 사람은 아예 그냥 살생이 되고, 인과응보가 되고 업보가 되는 겁니다.

질문자1(男) 한 가지 질문을 더 드리겠습니다. 전생에 배운 공부, 예를 들면 역사나 외국어 실력 같은 것들을 그냥 가지고 태어난다면 다시 그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요. 옛날에 율곡 선생님은 태어나자 우는 소리가 글 읽는 소리라고 이렇게 들으셨다고 그러고 또 일곱 살 때 시를 지은 것을 보면 전생에 공부한 것을 그냥 가지고 태어난 것 같거든요. 그런데 전생의 것을 그대로 가지고 태어난다면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이 생각을 어떻게 봐야 됩니까?

큰스님 부처님께서 전생으로부터 부처님 될 그 이름을 타고났다 이랬는데 왜 그렇게 고생을 했소? 하하하. 이거 봐요. 이 무(無)의 세계에서 아무리, 전생에 유(有)의 세계에서 공부를 잘했다 하더라도 바로 탑은 쌓아야 탑이지, 예를 들어서 다 알아도 다시 한 번 방편으로 나와서 그 길을 더 멋지게 걸어야 돼요. 얼른 쉽게 말해서 더 고생을 해야 돼요. 더 그거를 열심히 해서 보여 줘야 모든 사람의 마음들이 한마음이 될 수 있지 아니, 보여 주지 않는데 어떻게 한마음이 될 수 있겠소? 그러니까 율곡이라고 해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소? 석가모니 부처님이라고 그래서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전생에 배웠다고 해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소? 이런 게 있죠. 전생에 다 알고 했으면 물리가, 그만큼 지혜가 넓고 물리가 터져서 그냥 하나를 이렇게 보면은 벌써 열 가지까지, 이 벽을 치면 봇장까지 울린다 이럴 수는 있죠.

그러니깐 여러분이 자식들이 공부를 못한다 뭐 어쩐다 이런 거를 생각할 때 과거는 지나갔으니 없으니까, 과거의 업보를 생각하고 그러지 말고 과거의 업보는 내 몸속에 다, 여러분이 악업 선업 뭐, 모자라는 의식들을 다 가지고 있어요, 지금. 그러니까 그냥 그저 내가 살면서 닥치는 대로 그냥 그냥 거기다가 놔라. ‘너만이, 네가 그렇게 저지른 거니까 너만이 해결할 수 있다.’ 그러고 그냥 되놓는 거죠. 그래야만이 앞서 입력된 게 없어지거든요.

그러니까 과거라고 멀다고 생각하지도 말고요. 어저께인데도 내가 탄생하기 이전과 똑같다 이겁니다, 어저께인데도. 거리가 가깝고 멀고가 없다. 일 초 전만 하더라도 과거예요, 벌써. 그만큼 빠르기 때문에 우주하고도 직결이 돼 있고 이 세상 전체가 가설이 돼 있는 거예요. 그거를 진짜로 느끼지 못하겠걸랑 공부 열심히들 해요. 아무리 전자에 탑이, 잘 쌓아졌던 탑이 있다 하더라도 이 생에 다시 탑이 쌓아져야 더 잘, 전자에는 탑이 오층탑이었었는데 십이층탑으로다가 잘 올릴 수도 있는 거거든요. 누구나가 다 쳐다보게 다 알고, 다 배우고, 다 보고 그래야만이 다 한마음이 돼 주지, 보여 주지도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그거는 목석인가요? 오히려 전자에 알았다고 할 수가 없죠. 부처님께서는 부처님이라고 최초에 나와서 이름을 만들어 놨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든지 다 깨치면 부처입니다. 그래서 부처가 꽉 찼죠. 하하하.

질문자2(女) 저는 저 설악산 기슭에서 왔습니다. 여기 다니는 신도님께서 『한마음』이라는 책자를 보내줘 가지고요, 그걸 수도 없이 읽었습니다. 그래도 제 나름대로 이제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읽고 또 읽고 하다가 만날, 여기를 한 번이라도 와서 법회하시는 걸 듣고자 수없이 별렀는데 오늘 처음으로 와서 큰스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제가 의문 나는 점은 저의 손녀딸이 지금 두 살인데, 구개열이라고 입 천장이 열려 가지고 지금 백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있거든요. 의사 선생님 말씀은 “언어의 장애가 올지도 모른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원인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돼서 그 어린 것이 그렇게 되는지 그게 궁금해서 왔습니다.

큰스님 이 진리의 뜻에서 보면 어리고 늙고 점잖고 이런 게 없습니다, 평등합니다. 자기가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끼리끼리 모이기 때문에 그렇게 오는 겁니다. 자기 속에, 자기 몸속에 다 들어 있거든요. 그러니깐 누구가 갖다 준 것도 아니고 누가 뺏어 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관(觀)하라고 할 때, 모든 것을 그 용광로에다가 놔라 이런 겁니다. 그렇게 그 모든 걸 일임시킨다면 앞서의 그 인과응보가 그냥 무너지면서 이것이 새 사람이 될 수가 있다 이런 거죠. 그러니까 언어의 지장이 있을 것이다 하더라도 그 언어의 지장이 없도록 관하세요. 이 관하는 것에 모든 것이 달려 있습니다. 모든 것에서 진짜로 이 싹이 제 뿌리를 믿어야 되는 겁니다. 싹은 제 뿌리로 인해서 사는 거니깐 그 싹이 제 뿌리를 믿고 제 뿌리에 모든 걸 맡겨 놨을 때, 그렇지 않도록 하는 것도 너밖에 없다고 맡겨 놨을 때 바로 그 몸속에서 모든 의식들이 바로 모자라는 걸 채워 주고 이렇게 작용을 해 줍니다.

질문자2(女) 그래 그 길을 몰라서 이렇게 왔습니다.

큰스님 예. 그러니까 관하시는 거를 똑바로 스님네들한테 물어서 가세요. 내가 “여쭤 봐서 가세요.” 이러려고 그러다가 그냥 “물어서 가세요.” 이랬어요. 이게요, ‘물어봐서’라고 할 수도 있는데 왜 내가 ‘여쭤 봐서’라고 이렇게 말을 할 수 있느냐 하면은 정말 그 한마디에 일생 동안 말에 장애가 올 거를 대치할 수 있으니까요. 대치만 된다면 그게 돈 주고도 살 수 있는 겁니까? 그러니까 여쭤 보라고 할 수밖에요. (대중 박수)

여기 우리 스님네들이 금덩어리입니다. 우리 저 신도님들도 금덩어리고요. 금은 금방에 모두 모이죠? 무쇠전에 모이지 않습니다. 하여튼 그렇다고 해서 우린 금이라고, 딴 사람은 금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금은 금인데, 다 금인데 어떻게 살아나가느냐에 따라서 무쇠도 되고 넝마도 되고 그러죠. 예. 또요?

질문자3(女) 저는 광주지원에서 왔습니다. 작년에 해남, 장흥 그쪽으로 갈 기회가 있어서 가 봤는데요. 산 곳곳이 굉장히 민둥산이 되어 있고요, 전부 다 소나무가 빨갛게 죽어 가고 있었어요. 그런데 지난번에 스님께서 광주 대법회 때 오셔 가지고 운주사에 가셨을 때도 제가 뒤에 같이 따라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가면서 보니까 소나무들이 곳곳에 거기도 많이 죽어 있어서 뒤에 가면서도 ‘아이고, 큰스님께서 저걸 보시고 한마음 내 주셨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계속 있었거든요. 그런데 앞서 텔레비전 뉴스를 들어 보니까 설악산 그런 전국 각지에까지 다 그 병이 번져 가지고 아주 경관도 다 해치고 몇십 년 된 소나무들이 다 죽어 간대요. 그래서 ‘전국 곳곳의 소나무들이 다 죽어 간다면….’ 하는 생각을 할 때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서 큰스님께 말씀드립니다.

큰스님 그것은 나라 나라마다 다 다르겠죠. 옛날부터도 그런 예가 있습니다. 소나무는 국보나 다름없다 하는 이야기요. 사철 사는 거기 때문에, 즉 말하자면은 소홀히 볼 수 없는 것이 소나무입니다. 사철 나무도 되고요. 그 여러 가지로 볼 때 그것은 아주 묘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의 어떠한 문제가 좋지 않다 좋다를 떠나서 소나무가 더 빨리 알고 있다, 이런 뜻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때에 따라서는, 즉 돌장승도 알고 있다. 돌장승도 알고 사람들도 전부 거죽으로는 모르나 속의 근본은 다 알고 있다는 얘깁니다. 마음들이 서로 그렇게 해서 통신이 돼서 서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렇다.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돌아간다. 그러니까 그것은 나라가, 나라의 국민이 어떻게 생각을 잘하느냐에 따라서 소나무를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 이런 문제가 있죠.

전체, 대통령이든 국민이든 전부가 다 한 사람이고 다 한 국민이죠. 국민이, 다 같은 마음들이 어떻게 마음을 쓰느냐에 따라서 그런 일들이 예전부터 많이 온다고 합니다. 그런 거를 난들 어떡합니까? 하하하. 그래서 운주사? 거기 가서도 누운 그 와(臥)부처님을 보고서 내가 얘기해 드렸지마는 그 누운 부처는 누운 부처가 아니고 앉은 부처도 아니고 선 부처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서 해 드린 말씀, 나는 내가 말한 거를 뒤 돌려서 다시 똑같이 할 수도 없어요, 도무지. 그리고 내가 한 말은 뒤돌아보지 않아요. 내가 한 게 아니기 때문이죠. 하여튼 열심히 잘 관하셔서 일체가 다 마음들을 잘 쓰도록 이렇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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