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부사 성여신
22. 부사 성여신
  • 박동춘 소장
  • 승인 2016.05.27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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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 유람하며 神仙 꿈꿨던 자유인

전공 세워도 에 무관심
향리 풍속 순화 힘쓰면서
한때는 불교 배척했지만
만년에 승려들과 교유해

64세가 되어서야 겨우 사마양시에 합격했던 성여신(成汝信, 1546~1632)은 불세출의 문장으로 세상에 회자되었다. 이러한 그의 역량은 어린 나이에 신숙주의 증손인 신점(申霑)의 문하와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며 배태된 것인지도 모른다.

임진왜란과 당쟁으로 얼룩진 시절을 살았던 그의 행로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한때 신선세계에 빠져 산천을 주유했다. 하지만 나라가 위난에 놓이자 분연히 일어나 곽재우(郭再祐, 1552~1617)와 함께 왜군을 무찌르는 전공을 세우면서도 논공행상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은일하는 선비로 돌아갔다. 이뿐만이 아니다. 전쟁이 끝난 후의 사회적 질서와 풍속은 문란할 대로 문란해 기강이 바로 서지 않았다. 이를 바로 잡기 위한 그의 헌신적인 노력은 바로 자신의 향리에 소학과 대학의 법도에 따라 양몽재(養蒙齋)와 지학재(志學齋)를 세워 후학을 양성하고 이들이 학문적으로 성숙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한편, 서로 돕고 격려하는 풍속을 만들기 위해 여씨향약(呂氏鄕約)과 퇴계동약(退溪洞約)을 본떠 향리의 풍속을 순화하게 한 일에서도 드러난다.

이런 그의 노력은 10여 년이 지난 뒤에야 그 빛을 발하여 향리의 풍속이 서서히 변화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만년은 당쟁의 피해로 어려운 고비를 넘겨야 했다. 바로 정인홍(鄭仁弘, 1536~1623)을 위시한 대북정권에서는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가 폐하는 등 정치적인 폐해가 커져 갔다. 처음엔 그도 정인홍과 함께 뜻을 같이 했던 적이 있었지만 얼마 후 정온(鄭蘊, 1569~1641)의 정치적 입장을 따랐기에 행로에 어려움을 겪는다. 아마 그가 신선세계를 흠모하여 산천을 주유한 것도 정치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그 나름대로 내린 처신의 방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가 만년의 지리산을 유람한 기록은 그의 삶에 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다.

그의 유두류산시(遊頭流山詩)’에는 수편의 장시와 그를 따라 지리산을 유람한 인물을 소상하게 밝혔는데 정대순(鄭大淳, 1552~?), 강민효(姜敏孝), 박민(朴敏, 1566~1630), 이중훈(李重訓), 문홍운(文弘運, 1577~1610), 성박(, 1571~1618), 성순(成錞, 1590~1659) 등이 그들이다. 이들의 여정은 성여신의 거처인 부사정(浮査亭)을 출발하여 사천을 거쳐 하동 횡포로 들어갔다가 다시 삽암(鈒巖)에서 쌍계사로 들어가 불일암을 유람한 후, 신응사를 거쳐 집으로 돌아왔고 최치원이 노닐던 쌍계사와 불일암을 두루 답사하였다. 그가 청학을 타고 노닐던 최치원을 흠모한 것은 신선세계를 동경했던 그다운 행적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들은 신선을 상징하는 호를 지어 불렀으니 이는 방장산선유일기에서 확인된다.

▲ 신선세계를 동경한 성여신은 쌍계사와 불일암을 두루 답사하며 자유로운 감성으로 삶을 살았다. 사진은 쌍계사 전경.

한편 신선이 되길 희망했던 성여신의 이상 세계는 신선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호는 부사소선(浮査少仙)이라 하였고 정대순은 옥봉취선(玉峰醉仙), 강민효는 봉대비선(鳳臺飛仙), 박민은 능허보선(凌虛步仙), 이중훈은 동정적선(洞庭謫仙), 성박은 죽림주선(竹林酒仙), 문홍운은 매촌낭선(梅村浪仙), 성순은 적벽시선(赤壁詩仙)이라 불렀다. 이처럼 혼란한 세월을 피해 신선을 동경했던 그도 선비로서의 명분을 잊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방장산선유일기말미에 적어둔 글에서 선비의 한 몸은 경제를 그 계책으로 하고, 선비의 한 마음은 겸선(兼善)을 그 뜻으로 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산에 들어갈 수 있겠으며, 어찌 신선을 배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한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지리산 유람은 스승 남명 조식의 청학동 유람을 계승했다는 평가를 받는데 이는 조식이 유두류록(遊頭流錄)’을 남겼고 그 또한 방장산선유일기를 남겼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지리산을 단순히 유람하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역사적 인물의 생애를 회고하고 이를 자신의 삶에 이정표로 삼으려했던 자세는 그가 신선세계를 동경하면서도 유학자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으려했던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실제 그는 불교를 배척했던 인물이었다. 그가 산사를 유람하고 승려들과 교유했던 흔적은 만년 산천을 유람했던 시기라 여겨진다. 특히 금오산 용장사(茸長寺) 승려 설잠(雪岑), 즉 김시습(1435~1493)을 그리며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나이 겨우 다섯 살에 문장으로 이름난 사람(年才五歲擅文章)
만년까지 미친척했던 절개가 어찌 미친 것이랴(晩節佯狂豈是狂)
불가로 도피한 그 뜻을 누가 알리오(逃禪誰識逃禪意)
다만 옛 임금을 끝까지 잊지 못했던 것을(只爲舊君終不忘)

오세동자 김시습은 세종이 아꼈던 동량이었다. 하지만 그가 거짓으로 미친척한 것은 세상에 경종을 울렸던 기개 있는 사람의 절절한 몸짓이었다. 하지만 그를 손가락질했던 당시의 소인배는 그의 큰 뜻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열렬한 충심과 정의를 실천하고자 했던 김시습은 아마 성여신의 표상이었는지도 모른다. 불가에 의탁했던 김시습의 처세를 보며 한때 신선세계를 동경해 지리산을 유람한 자신과 동질감을 느꼈던 것은 아닐까. 물론 처세의 방법은 달랐지만. 한편 그가 쌍계사에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새로 지은 쌍계의 절간에 뜬 밝은 달(明月雙磎新梵宇)
팔영루의 옛 신선 누각에 부는 맑은 바람이라(淸風八詠舊仙樓)
흥망이 수없이 바뀐 구름, 남으로 내려오고(興亡百轉雲南下)
누대를 돌고 돈 물, 북으로 흘러가네(世代千回水北流)
고요한 낮 단풍 숲엔 나막신 한 쌍 가지런하고(晝靜楓林雙蠟)
깊은 밤 소나무 평상엔 차 단지 하나 놓였네(松榻一茶)
누가 알았겠는가, 십 년 전 여산의 나그네가(誰知十載廬山客)
백발이 되어 다시 악양에 오게 될 줄을(重到岳陽雪滿頭)

쌍계에 뜬 달은 산뜻한 가람을 더욱 그윽하게 했을 것인데 더구나 밝은 바람이 산들 부는 팔영루, 이곳은 비경이며 선경이다. 그리고 선미가 장황한 공간이다. 그런데 누대를 흘러가고 있는 쌍계 계곡물은 예나 지금이나 흐른다. 단선의 선미는 바로 고요한 낮 단풍 숲엔 나막신 한 쌍 가지런하고(晝靜楓林雙蠟)/깊은 밤 소나무 평상엔 차 단지 하나 놓였네(松榻一茶)”일 것이다. 이런 아름다운 승경지를 백발이 되어 다시 찾은 성여신은 바로 선미(禪味)에 젖은 나그네였다. 법계사에 올라 지은 그의 시는 마치 신선을 방불한 것이니 그가 세상에 문재로 드러난 연유 여기에도 또렷한데 상법계사(上法界寺)는 다음과 같다.

초연히 이 몸이 인간세상을 벗어나니(超然身世出人)
가는 곳마다 신선 구역이라 경물이 한가롭네(隨處仙區景物閒)
바위가의 푸른 솔엔 열사의 기운 서려 있고(松碧巖邊烈士氣)
절벽의 단풍은 취한 사람의 얼굴 같아라(楓丹壁裏醉人顔)
아득히 먼 밖의 뭇 바다는 술잔처럼 보이고(杯看衆海蒼茫外)
뿌연 안개 속에 뭍 산은 흙덩이처럼 보이네(塊視諸山杳靄間)
선동을 불러서 타고 갈 학을 데려오게 하여(嗅取仙童來駕鶴)
내일엔 옥황상제께 알현하고 오리(明朝上謁紫皇還)

법계사는 지리산 천왕봉 아래에 위치한 사찰이다. 그곳을 찾아 인간의 속진을 벗어났던 그의 경계는 이미 신선이었으며 수행력이 높은 산승(山僧)이었다. 그러므로 물물이 다 한가롭고 아름다웠던 것이다. 더구나 천왕봉의 법계사는 아름다운 승경지. “바위가의 푸른 솔엔 열사의 기운 서려 있고(松碧巖邊烈士氣)/ 절벽의 단풍은 취한 사람의 얼굴 같아라(楓丹壁裏醉人顔)”라고 노래할만 한 곳이었다. 더구나 바위틈에 서 있는 푸른 솔은 아마도 그의 기상과 호연지기를 함의하기에 좋은 대상물이었으리라.

이외에도 그의 삶의 규모를 드러낸 글에는 강호의 어떤 늙은이 배웠는데도 때에 맞질 않아 십년동안 거문고를 연주했는데 흰 귀밑머리 바람결에 쓸쓸히 나부끼네(江湖有一翁 學焉而不適於時 十年操瑟兮 兩華髮風蕭蕭)”라고 하여 세상을 경영할 지혜를 길렀지만 때를 만나지 못한 채 쓸쓸히 늙어가는 신세임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도 한 가정을 이룬 가장임에 부인의 채근을 받아야했던 상황임에도 집안 살림을 경영함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이 책만 펴놓고 읽으며 자득했던(休休焉無營無思 對黃卷而囂囂)” 그였기에 안회(顔回)의 안빈낙도를 꿈꾼 듯하다. 그러나 아내의 현실적인 성화는 바로 밥을 지으려 해도 땔나무가 없으니 솥 안의 누런 기장 익지를 않고, 온돌에는 불 때는 연기가 없으니 밤 창가 어깨에선 두루 소름이 돋네. 심하구나, 당신의 우활함이여! 공자의 자리가 따뜻하지 않음을 배우고 묵자(墨子)의 구들이 그을리지 못함을 본받은 것인가. 추위가 이에 이르렀으니 당신은 어떤 마음인가요. 만약 당신이 나무하러 간다면 내가 당신을 위하여 저 솥을 씻겠소(有語曰 炊無薪 鼎裏之黃粱未熟 突無煙 夜窓之玉樓遍粟 甚矣子之迂也 學孔席之不煖 效墨突之不黔者耶 一寒至此 子何以爲心 子如薪之 請爲子漑彼釜)”라고 했다. 그의 아내 또한 그에 못지않은 입담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하기야 이 글은 성여신 자신이 도모해 쓴 글이니 그 구성 또한 심상치 않은 듯하다. 이어지는 그의 글엔 대답 또한 흔쾌하다. “내가 알았다고 하고 이에 작은 배를 읍벽당 주인에게 빌려서 조각배 한 척을 안개 낀 긴 물가에 띄웠다. 물빛은 일렁거려 푸른 옥 한 조각에 맑은 가을 머금은 듯하고, 산 빛은 짙푸르러 비단 수놓은 천 겹 산이 푸른 강에 거꾸로 선 듯하다. 뱃전을 두드리고 노래하며 소선(소동파)의 적벽 유람을 추구하고, 빙그레 웃으며 어부의 창랑 노래를 불렀다(翁曰諾 於是 扁舟碧主人 縱一葦煙雨長洲 水光 碧玉一片含淸秋 山色籠 錦繡千層碧流 舷而歌之 追蘇仙赤壁之遊 爾而笑兮 詠漁父滄浪之謳)”는 것이다. 창랑의 어부는 굴원의 어부사에서 연원한 것이니 충신의 절개는 그가 드러내고자 한 표상일 것이다. 더구나 자유로운 감성이나 자연과 하나 된 그의 몰입의 경지는 소동파의 적벽부에서 차용한 것이다. 따라서 난세를 살아가는 처세의 이치를 누구보다 잘 터득했던 그였다. 신선을 동경했던 어진 사람, 성여신은 한때 불교를 배척했던 선비였지만 만년의 그는 이미 유불선의 경계도 허물었던 자유인이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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