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심리상담학회장 인경 스님

참불선원 불교인문학 강좌소크라테스와 간화선

문명은 인간의 끊임없는 물음을 통해 발전해왔다. 그만큼 물음을 갖고 질문하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중요한 행위 중 하나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내려진 신탁을 확인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질문했고, 간화선을 창안한 대혜종고 스님은 깨어있기 위한 질문을 하라고 당부했다. 명상심리상담학회장 인경 스님은 523일 서울 참불선원에서 열린 인문학 대강좌에서 소크라테스와 간화선을 주제로 강연했다. 스님은 내 안의 부처를 부처인 줄 모르고 살기 때문에 질문을 통해 흔들어 깨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리=윤호섭 기자

▲ 인경 스님은… 조계산 송광사에서 출가해 강원을 졸업했다. 동국대대학원 선학과 석사, 동대학 ‘몽산덕이 선사상연구’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은 바 있다. 현재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교수와 한국명상지도자협회 상임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바쁜 탓에 묻는 과정 생략돼
삶 음미하는 기회 사라진 현대
남 아닌 내 질문 계속 던져야
비로소 깨어있는 삶 누린다

오늘은 인본주의와 간화선에 대해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또 철학적 주제를 다루기로 했으니 서양철학의 출발점이고 원류라고 할 수 있는 소크라테스와 더불어 간화선을 창안한 송대 대혜종고 스님도 소개하겠습니다.

질문하지 않는 불행
인본주의는 인간중심적 사조를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인본주의를 중시하게 된 걸까요?

과거 서양 사람들은 절대적 신이 존재하고, 인간은 이에 종속돼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치, 법률, 도덕,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동은 재판을 받아야 하는 큰 죄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불신자의 명목으로 기소됐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국가가 인정하는 신을 신봉하지 않고 아테네 청년들을 혼란스럽게 한 죄로 법정에 서게 되었죠. 소크라테스는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이처럼 신 중심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온갖 폐해와 핍박이 사람들을 옥죄었습니다. 그러자 인간 중심 사회로 개편하기 위해 기존 신 중심 체제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그들은 신이 우리를 만든 게 아니라, 우리들이 너무 외롭고 두려운 마음을 달래려 신이란 개념을 창조했다는 인본주의적 주장을 했습니다. 이 같은 주장이 대세가 되자 신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단죄할 만한 근거는 희박해졌습니다.

두 번째는 인간 소외 해결을 위해서입니다. 18세기 중엽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 사회구조가 자동화 단계로 진입했을 때만해도 사람들은 기계화에 격렬히 저항했죠. 그렇지만 여러분은 전화기 없는 세상에서 살 수 있나요? 세탁기 없는 삶은 어떤가요? 꼭 있어야겠죠. 이렇듯 기계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양면적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편리하지만 한편으로는 로봇지능이 탄생하면서 인간 경시, 나태함 등 역기능도 걱정스러운 수준입니다. 사람들은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로 말미암아 인간 경시 풍토에 대한 해법이 나오길 바라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인본주의는 생태계 보호를 견지하는 자세와도 관련 있습니다. 인간 중심이란 뜻이 꼭 인간만을 위한 삶을 지향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본주의의 본질은 살아있는 모든 중생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모습에 있습니다.

인본주의를 표방하는 대승불교는 부처와 중생이 혼재하는 현실적 모습을 가장 이상적으로 봅니다. 그리고 보살이라고 이름 붙이죠. 보살은 산스크리트어 보디삿트바(bodhisattva)’에서 따온 말입니다. 여기서 보디는 깨닫다, 정신차리다, 자각하다는 의미입니다. ‘삿트바는 존재하다, 생명을 가졌다는 뜻으로 보통 유정(有情)’이라고 합니다. 정을 가졌다는 뜻이죠. 인간이란 정을 가지고 어울려 사는 존재입니다. 그렇지만 정 때문에 힘들 때도 있으시죠? 인간적 삶이란 소통하고 함께 아파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중생이면서 부처인 것이죠. 그게 한마디로 보살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사람들이 너무 정을 중시해서인지 부처님과의 균형이 깨진 삶을 살아가고 있더군요. 자기 안에 부처와 빛나는 보석이 있는 줄 모르고 있습니다. 하루 종일 너무 바쁜 탓에 자기 삶을 음미해보지 않고 있습니다. 어떤 과학자가 현대인들은 과거 50명의 노예를 거느리던 삶과 동일한 바쁘기로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네요. 왜 우리는 더 바빠지고, 더 쫓기며 살게 됐을까요?

제 생각에 현대인들의 불행은 질문하지 않음에서 오는 것 같습니다. 바쁜 삶에 쫓겨 질문 던지는 것을 잊고 대신 스마트폰으로 검색만 합니다.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안개에 휩싸인 듯 흐름 속에 섞여 왜인지도 모른 채 가고 있습니다.

바른 자세로 앉아 질문을 던져 보세요. 조용히 눈을 감고 내가 무엇을 집착하고 두려워하는지, 이 집착과 두려움이 어디서 왔는지 생각해 보세요. 노트에 질문을 기록해도 좋습니다. 이 질문은 여러분들을 깨어나게 하고, 성장시킬 것입니다. 한 분이 발표해보시겠어요?

수강생: 나는 왜 욕심을 버리지 못할까 질문해봤습니다.

네 좋습니다. 스스로 질문을 던지면 그에 대한 전후사정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게 됩니다. 질문을 던지는 순간 부정적 태도가 바뀌면서, 중생의 마음을 돌려 부처가 됩니다. 질문이 없으면 해답도 없습니다. 그래서 옛 스님들은 의심이 크면 깨달음도 크다고 말했습니다.

암기는 내 것아니다
질문을 하라고 했습니다. 질문이 있으면 살아있는 삶, 즉 활구(活句)가 되는 것이고 질문이 없으면 죽은 삶, 사구(死句)인 겁니다. 질문을 던짐으로써 우리 삶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고, 그것이 곧 간화선의 정신입니다. 간화선은 화두를 참구한다는 뜻인데 여기서 화두는 질문하기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질문을 할 때는 두 가지 요건이 뒤따릅니다. 첫째는 상황이고 그 다음은 상황에 따른 핵심적인 구절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는 겁니다. 아까의 사례를 예로 들자면 아이하고 다투고 나는 왜 욕심을 내려놓지 못할까생각해보는 겁니다. 아이에 대한 엄마로서의 욕심이 핵심이겠죠. 그리고 질문하기 전에 욕심에 갇혀있었다면 질문하는 순간 중생의 마음에서 부처의 마음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더불어 질문에 대한 해답, 새로운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건 하나의 사례일 뿐이고 여러분에게 각자의 사례가 있을 겁니다. 이것을 간화선에서는 문답이라고 하고, 이걸 정리한 것을 공안(公案)이라고 하죠. 이런 공안이 1700개가 있습니다. 공안에서 은 공공이라는 뜻이고, ‘은 책상이라는 의미입니다. 쉽게 말해 재판을 할 때 책상 앞에서 재판관이 공공의 문제를 가지고 논쟁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어요. 그래서 나는 왜 욕심을 내려놓지 못할까고민하는 게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죠. 그리고 이에 대한 응답이 있어야겠죠? 아까 발표하셨던 분 한번 대답해보시겠어요?

수강생: 왜 욕심을 못 내려놓는지 부처의 마음으로 생각해봤는데 두려움 때문인 것 같습니다. 현실에 안주하고픈 마음과 새로운 세계로 가야하는 두려움이 부딪혀서요.

옛 습관에 머물고 싶은 게 인지상정인데 새로운 도전을 하려니 밑바닥의 두려움이 올라온 것 같다는 말씀이군요.

간화선을 창안한 분은 대혜종고 스님입니다. 이 스님은 전쟁이 많았던 시기를 살았는데요. 항상 공포와 불안의 연속인 삶이었습니다. 금나라가 송나라를 침략하고, 송은 남쪽으로 밀려 남송이 됐습니다. 이후 남송에서 논쟁이 일어났죠. 금나라하고 싸울 것인지 아니면 화친할 것인지 말입니다. 즉 새로운 도전과 현실 안주의 갈등입니다.

대혜종고 스님은 싸워야 한다는 진보파였습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보수파가 정권을 장악했고, 스님은 결국 귀양을 떠나게 됐습니다. 그리고 귀양살이를 하며 편지글을 썼습니다.

스님이 편지글에서 강조하는 것이 바로 질문하기입니다. 몽롱하게 잠들어있지 말고 깨어 일어나라는 겁니다. 수행자들이 명상을 한다고 하면서 귀신굴에 들어간 것처럼 잠들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수행자들이 철저하고 절박하게 질문을 하지 않는다고 일갈했습니다. ‘나는 왜 욕심을 버리지 못할까하는 질문을 화장실에 가서도, 친구를 만나서도 계속 놓지 않고 던지다보면 깨어있을 수밖에 없고 응답, 즉 깨달음이 온다는 겁니다. 이것이 간화선의 특징입니다.

스님은 질문하지 않는 것을 지적했지만 수행자들이 잠들어있다고 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남의 것에서 해답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목판인쇄술이 개발되고, 많은 책이 만들어졌습니다. 대량생산이 가능해져 지식인들은 책을 통해 지식을 암기했습니다. 선문답이나 법문 내용이 담긴 것을 말이죠. 하지만 그것은 내 현실을 반영한 게 아니고 기존 정보에 의지해 알음알음 이해한 겁니다. 마치 과거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외우는 것처럼 말이에요.

물론 우리의 삶도 시험 치듯이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욕심을 왜 못 버릴까라는 질문에 시험문제처럼 해답을 줄 수 있을까요? 이것은 질문을 통해 스스로 체득하고 발견하는 것이지 문제처럼 답을 찾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시험에 중독된 사람들은 모든 게 시험문제처럼 해답이 나와야만 직성이 풀려요. 요즘은 그 역할을 스마트폰이 대신 해줍니다. 편리하겠죠. 근데 편리한 만큼 의미가 없습니다.

자기의 두려움과 절박함을 갖고 처절하게 질문을 던질 때 비로소 내 것이 돼요. 무문관을 지은 무문 스님은 말했습니다. “질문을 던질 때는 360개의 골절과 84000개의 땀구멍을 가지고 온몸을 다해서 하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질문한다면 당연히 해답을 찾게 돼요. 남의 정보를 통해 얻은 건 현실적으로 유용할지는 모르겠지만 내 삶을 궁극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혜종고 스님은 죽은 말이라고 한 것입니다.

다시 소크라테스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보다 더 지혜로운 자가 없다는 델포이의 신탁을 전해 듣고,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을 찾기 위해 정치인을 만나고, 시인도 만나고, 상공업자들도 만났습니다. 그 분야에서만큼은 그들이 자신보다 더 지혜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한 사람 한 사람 만나 대화를 하며 질문을 해보니 그들이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자신은 스스로 어리석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걸 모른 채 살아간다는 걸 발견한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무지(無知)의 지()’를 이해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는 아테네 사람들이 잠들어있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대학수업을 하며 조사를 해봤습니다. 학생들에게 왜 이 학과에 왔고, 무엇을 배우기 위해 왔는지 물어봤죠. 100명을 조사했는데 7~8명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부모가 가라고 했다” “성적 따라 왔다는 게 대부분이었습니다. 자기 삶을 자기가 주체적으로 결정하지 않았어요.

소크라테스는 재판을 받으며 사람들은 자신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계속 질문을 한 것이고요. 바로 아테네 시민들을 깨어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아테네의 어리석음이 지혜로운 사람을 죽이는 결과를 낳았죠.

진리는 이미 우리가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 안의 부처를 부처인 줄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처럼 흔들어 깨워야 합니다. 그 방법이 바로 질문하기죠. 지혜는 자기 삶 속에서 절박하게 깨닫는 겁니다. 이건 질문을 통해서만 얻어져요. 대혜종고 스님이 책으로 외운 지식을 구두선에 불과하다고 말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계속 스스로 질문하며 여러분의 삶을 깨어있도록 노력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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