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한 것이 나오는 구멍에서 바로 부처가 나온다!

우리 모두가 도반으로서 할 일이 무엇인가.
꼭 생명을 걸고, 죽는다 산다 하는 걸 떠나서
그걸 걸고 아예 들어갈 줄 알아야 된다 이겁니다.


우리가 부처님의 탄생일을 앞두고 이렇게 함께 한자리를 하면서, 여러분과 저와 도반으로서 이렇게 함께 갈 수 있는 마음들이 갸륵하고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 스승의 날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전체 한마음으로써 스승에 대한 그 감사함을, 우리는 올렸습니다. 여러분이 나의 고깃덩어리에게 감사함을 느끼진 않으셨겠죠? 모두 여러분의 마음이, 일체제불의 마음이, 우주 전체가 더불어 같이 한마음으로서, 더불어 너는 나를 보고 스승으로 삼고, 나는 너를 보고 스승으로 삼아 모두가 한마음으로서 둘이 아니게 감사함을 모두 올렸습니다.

이것은 역대로부터 오늘날의 스승의 감사함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일체 만물만생 전체 다, 물에서 사는 거든 보이지 않게 사는 거든, 보이게 육지에서 사는 거든 허공에 돌아가는 그 별성이든 모두, 생명이 있는 거든 없는 거든, 보이는 거든 안 보이는 거든, 전부 풀 한 포기 돌 하나라도 스승 아닌 게 없으니 어찌 스승의 날을 나 혼자만의 스승의 날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런 멋있는 마음, 넓은 마음으로써, 더불어 같이 스승의 날입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더불어 같이 스승의 날을 맞이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그것을 알 수 있도록 이날까지 길잡이로서, 더불어 같이 도반으로서 이렇게 해 왔습니다.

오늘 말씀 드릴 것은 우리 신도님들 중에도 아마 삼분의 일은 해당되는 얘기라고 봅니다. 예를 들어서 방편으로 생각한다면 옛날에 부처님께서도 임신을 해서 어린애를 낳으면 “낳는다고만 해서 사람이 다 되는 것은 아니니라. 그 낳은 어린애가 잘 길러져서 어른이 돼서 앞뒤를 알고 또 우리 현실에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는 공(空)한 도리를 알고 이래야만이 구경경계(究竟境界)에 이르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때를 이름해서 성불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 거와 같이 우리는 어린애를, 방편으로 말하자면 어린애를 쑥 낳는다고만 해서 다 어른이 되는 게 아닌 까닭에, 어린애를 불쑥 낳은 거를 돈오(頓悟)라고 한다면 우리가 낳아서 기르는 데 대해서는 점수(漸修)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돈(頓)’과 ‘점(漸)’이 어찌 둘이겠습니까? 사람이 충실한 사람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만이 그것이 돈과 점이 둘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돈’도 없고 ‘점’도 없느니라. 이 가운데 바로, 우뚝 솟지도 않고 내려가지도 않는 그 가운데 진짜 사람이 있느니라.’ 이런 겁니다, 얼른 쉽게 말하자면. 그러니만큼 선(禪)과 학(學)을 둘로 봐서는 절대 안 되죠. 내 몸과 내 몸속에 있는 모든 의식들과 또는 나의 마음내기 이전과 어찌 둘이겠습니까? 모두가 둘이 아닙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 신도님들 중에도 자신들도 알고 가겠지만 삼분의 일은 임신이 되었다고 봅니다. 한 달 임신된 사람, 두 달 임신된 사람, 석 달 임신된 사람, 넉 달 임신된 사람, 다섯 달, 일곱 여덟 달, 또 갓 낳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보입디다. 하지만 그것을 낳았다고 해서 ‘나는 이렇게 깨달았으니까, 내가 이만큼 공부를 했다.’ 하고 생각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왜냐? 내가 공부를 해서, 즉 어린앨 생산했다면 정신계의 생산인데, 그 생산을 했다고 해서 다 된 것이 아니죠. 그러니까 수억겁을 거쳐 나오면서 그 습성과 그 습기가 대번에 벗어지지 않습니다. 그저 이따금씩 튀어나오고 아무리 자기를 깨달아서 어린앨 낳았다 하더라도 그 어린애가 완전히 자라기 전에는 습기가 있습니다, 관습이 있고 습기가 있고. 그래서 이 습기와 관습을 다, 몰락 녹이기 이전에는 절대로 전체의 열쇠가 주어지지 않는다 이 소립니다.

그런 까닭에 여러분을 가만히 볼 때에 그런 단계의 차원은 있으니 그저 조금 감응이 되고, 배 속에서 어린애가 노는 그 증세가 나오고, 감응이 되고, 9개월 됐으면 ‘아휴, 이거 틀림없이 임신은 했구나!’ 하는 걸 자신들이 알게끔 돼 있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살던 나와 현재에 사는 나가 상봉을 못한다면 그 줄을 잡고서 정신세계의 전체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줄을 잡지 않는다면 전체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봐도 본 게 아니고, 그저 50% 물질세계에서만 뱅글뱅글 돌지 정신세계에는 감응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른 될 때까지 수행을 잘 해서 누(累)가 되지 않게 함으로써, 그 습성과 습기를 다 없앰으로써 어른이 될 수 있으니 잘들 깊이깊이 생각해서 하시라 이런 뜻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한마음 공부를 하고 가는데 ‘한마음이다’ 한다면 마음 내기 이전을 말하는 겁니다. ‘한마음이다.’ 하는 거는 커피를 담으려면 (물컵을 들어 보이시며) 이 그릇 둘레를 말하는 거나 같습니다. ‘한마음’ 이런다면 마음을 내기 이전이기 때문에 평등사상의 공법 도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이 정신계에 진출을 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 사람으로 났다고 하더라도 그다음에는 짐승도 될 수 있고, 여하간에 어떠한 모습으로도 화(化)할 확률이 있으니, 그게 무서워서가 아니라 사람 노릇을 못하면 그만큼 자유로이 살 수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이 칼을 뺐으면 칼을 닦아서 꼭 사람을 살리는 칼이 되기 위해서, 하늘을 꿰어서 굴릴 수 있어야만 된다고 봅니다.

하여튼 우리 스님네들도 지금 9개월째 된 사람도 있고, 8개월째 된 사람도 있고, 7개월째 된 사람도 있고 또는 갓 낳아서 기르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스님네들도 모두, 즉 말하자면 ‘내 제자다’ 하기 이전에 모두 여러분과 같은 도반들입니다. 우리 모두가 도반으로서 할 일이 무엇인가. 꼭 생명을 걸고, 죽는다 산다 하는 걸 떠나서 그걸 걸고 아예 들어갈 줄 알아야 된다 이겁니다. 우리가 죽는다 산다를 떠난다면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고 무서울 것도 없고, 거부감을 일으킬 것도 없고 번뇌 망상이다 할 것도 없고 그냥 치고 넘어갈 수 있다 이 소립니다. 어딘가 내가 살 생각, 내가 있다는 생각, 내가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 몸이 없으면 내가 공부를 못 하겠다는 생각, 이러한 문제, 관습, 습성이 그냥 어느 때고 술술 나오기 때문에 그 넘어설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잘되고 잘못되고 이거를 따지려고 이런 공부 하는 게 아닙니다. 죽고 사는 거를 따지려고 이런 공부 하는 것도 아닙니다. 죽고 사는 게 둘이 아니라면, 달과 해가 둘이 아니라면, 여자 남자가 둘이 아니라면, 정신과 육신이 둘이 아니라면 어찌 그것을 따지겠습니까.

나는 옛날에 이런 적이 있었죠. 종을 한번 치고 싶어서, 새벽에 무턱 없이 내리니까, 아침 종성을 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그냥 한번 꽝 때려 봤더니 그냥 모두들, 이건 마구니가 씌었다고 그러면서 여기 뒷덜미를 쥐어서 내쫓습디다. 그날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는데 맥고모자를 쓰고서 풀숲에 가서 앉았더니 어떻게 비가 쏟아지는지 그 맥고모자가 이 둘레 가장자리가 없어 그냥 흘러내려요.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웃었죠. 왜 웃은 줄 아십니까? ‘억수같이 빗방울이 수효가 없이, 헤아릴 수 없이 쏟아진다 하더라도 가죽 속에는 들어가지 않는구나. 가죽 속은 범할 수가 없지, 절대!’ 이런 겁니다. 첫째, 눈이 동그랗게 떠지고 둘째, 스르르 감아지고 셋째, 웃어집디다. 누구든지 그러한 속에 빠져 보지 않은 사람은 그 마음을 모르며 그 도리를 모를 겁니다. 어떤 것이 닥쳐도 마다하지 않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이 물질세계에서 볼 땐 만신창이가 된 거나 마찬가지죠. 하지만 어떤 거든지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내가 다 버릴 수가 없었다 이 소립니다. 이 모두가 공부하는 데 있어서 일체가 공부 아닌 게 하나도 없습디다.

‘우주가 어떻게 생산을 해내서 우리가 살기 좋게 할 수 있었던가? 어떻게 그 별들이 마음들을 한데 모아서 태양을 형성시켰을까? 그 태양이 형성되고 나서 우리 생명들을 어떻게 조성해서 종자를 만들어서 살게 했을까? 또 우리가 스스로 지붕을 해 놓지 않고 태양을 다 받게끔 했을까? 스스로 마음으로 가려 놓고 태양빛을 받지 못하게 된 거는 스스로 그렇게 만들었을까?’ 하는 그 모두를 따지고 본다면 여러분의 잘못도 아니고 여러분의 마음이 그렇게 더불어, 같은 한마음이 그렇게 지금 작용을 하고 또 발견을 하고, 과학자들이 발견하듯 발견을 하고, 우리가 살면서 발견을 하고 회개를 하고, 이렇게 자꾸자꾸 물리가 터지고 진화가 되는 것을 알게 된 것이죠. 우리가 이렇게 공부해서 스스로 나가고 여여한 자체가 그대로 도(道)며 그대로 참선이며 그대로 생활인 것입니다.

여러분도 답답하시겠고 스님네들도 답답하시겠지만 답답한 것이 나오는 구멍에서 바로 부처가 나오거든요. 우리가 애를 뱄다 이런다면, 허허, 그런 무식한 말로 저분은 저렇게 말한다고 흉보겠지만, 우리가 직감적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그 말밖에 없습니다. 임신을 해서, 지금 여기 여러분이 있지만 임신을 하지 못한 분도 있고 임신을 한 분도 있고, 나는 몇 개월 임신을 해서 됐다 이럴 수도 있고 안 했다 이럴 수도 있고 하지만, 모두 자신들은 내가 이런 소릴 하는 대로 직감적으로 알 겁니다. ‘몇 개월 됐구나.’ 하고. 허허.

또 자식을 낳아서 일곱 살이 됐어도 상당한 기간이 걸립니다. 일곱 살이 됐다고 해서 다가 아닙니다. 달마 대사께서도 일곱 살이 돼 가지고도 면벽을 몇 년을 했습니까? 육조 선사도 십 년을 넘게 면벽을 했다고 봅니다. 왜냐? 면벽은 앉아서 있는 게, 벽만 쳐다보고 있는 게 면벽이 아닙니다. 나를 깨달아가지고, 즉 어린애를 낳아 가지고 어린애를 키우는 기간이 그렇게 걸립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관습을 버리고 습관을 자제해라. 습관을 자제해라. 생각을 넓게 해라. 당장 요 위에서만 생각하지 말고 넓게 생각을 한다면 그게 그거고 그게 그거다. 악도 없고 선도 없다. 왜 악도 없고 선도 없느냐? 선이 악이 되고 악이 선이 되는 까닭이다.’

이 모두가, 우리가 이 도리를 공부를 안 한다면 안 하는 대로, 세세생생에 한 발을 빼지 못해서 자유인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자기뿐만 아니라 자기 속에 들어 있은 자생중생들은 물론이거니와 이 세상에 돌아가면서 전체 삼라만상 대천세계의 모든 그 생명들의 마음에 적응할 수가 없습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고, 모조리 요건 잘못되고 요건 잘되고 요런 걸 따지니 어떻게 피안(彼岸)의 저 세계로 점프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될 수 있으면 내가 아무리 잘했다 하더라도, 아무리 상대방이 잘못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너그럽게 거기다가 놓고, ‘뿌리는 둘이 아닌 까닭에 너나 나나 만난 것이 바로 깡통끼리 만났기 때문에 그런 불상사가 있지 않으냐. 그러니까 그렇지 않게 하는 것도 너밖에 없잖아!’ 하고 거기다 놓고 부드러운 말과 부드러운 행동으로써 그 습을 녹이고 관습을 녹이고, 그 업보를 녹이고 유전성을 녹이고, 영계성을 녹이고 세균성을 녹이고, 인과를 녹이고 말입니다, 이래야만이 자생중생들이 모두 성불을 하게 되거든요. 자생중생들이 성불을 하지 않는다면 내가 어떻게 성불을 합니까? 첫째, 둘이 아닌 나인데.

그래서 이 어린앨 배서 낳아 가지고도, 부처님 탄신일이니까 그날을 앞두고, 알아듣기 쉽게 말하느라고 이런 얘길 하는 겁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실 때 “야! 애기는 낳았으나 그것이 도가 아니니라. 다가 아니니라. 애기를 다 길러서, 과거와 미래를 다, 현재 모든 거를 한데 합쳐 떡을 만들어서 찰나에 과거로, 찰나에 미래로, 찰나에 현재로, 찰나에 멀고 가깝고가 없이 응신(應身)으로서 응(應)해 줄 수 있어야만이 바로 너와 나와 둘이 아니니라. 갓 탄생을 했다면 넓게는 너와 나와 둘이 아닌 까닭이지마는, 너와 나와 둘이 아닌 까닭은 알더라도 네가 어른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앞뒤를 몰라. 그러기 때문에 그 앞뒤를 알기 위해서 모든 관습과 모든 습성을 다 떼어 내야만이 진짜 어른이 되느니라.” 이랬거든요.

여러분이 알기 쉽게 얘길 하느라고, 지금 난 현대 사람이니깐 말입니다. 여러분도 현대에 태어나서 현대에 지금 살고 있으니까 현대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얘기해 드리는 게 부처님의 진짜 제자면서도 불자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러니 여러분이 ‘어떡하면 과거에 살던 나를 임신을 시킬까? 어떡하면 과거에 살던 나를 지금 나와 만나게 할 수 있을까? 네가 진짜 있다면 증명을 해 보여라.’ 하고, 일을 할 때나 설거지를 할 때나 밥을 할 때나 책을 볼 때나 언제라도 관하여 거기다 맡기세요. 책도 길잡이요, 모두 스님네들도 다 길잡이요, 모든 일체 만물들이 다 길잡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부처님의 탄신일이 내일 모렌데, ‘우리가 어떡하면 부처님의 은혜를 갚을 수 있을까?’ 하는 겁니다. 부처님의 은혜가 아니었더라면, 부처님을 우리가 개별적으로 본다면, 그 모든 섭리를 따라잡기 위해서, 따라 삼키기 위해서 얼마만큼 시련을 겪으셨으며 몸을 버렸습니까? 버려서 그거를 하나도 남김없이 집어삼키고 여러분 앞에 하나도 남김없이 토해 냈습니다. 토해 내신 그런 도리를, 우리가 그 도리를 모르고 똑바른 공부를, 마음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그 은혜는 하나도 못 갚는 게 되고 자기 육의 부모의 은혜도 못 갚는 겁니다. 자비란, 이런 은혜를 생각하고 몽땅 우리가 옳은 법을 펴고, 옳은 법을 알고 옳은 법을 행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만물만생의 은혜를 갚고 일체제불의 은혜를 갚고, 모든 조상들에게 은혜를 갚고…. 그게 모두 둘이 아닌 까닭입니다. 은혜를 갚는 반면에 바로, 자비가 그 속에서 술술 나옵니다.

세상에 어느 사람이, 눈을 부라리고 그냥 악하게, 틀렸다고 하고 그렇게 하면 누가 듣기 좋겠습니까? 좋진 않을 겁니다. 그러나 이 공부 하는 데 때로는 이런 점이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악을 썼는데 말입니다, 그 악쓴 게 어디서부터 나왔나 이겁니다. 그 악을 쓴 사람은 그 소리가 어디서부터 나왔으며, 그 악을 쓰는 소리를 들은 사람은 또 그 소리가 어디서부터 나왔나 이겁니다. 어디서부터 나왔겠습니까? 내가 있기 때문에 있는 겁니다, 모두가. 그렇기 때문에 나를 비롯해서 바로 나를 가르치기 위해서 상대방을, 그 공이 상대방을 쳐 가지고 상대방의 공이 다시 나한테 튀어오는 거나 다름없는 겁니다. 그러니 어디를 원망하겠습니까? 마음을 넓혀서, 항상 이 마음을 넓게 쓰고 자비한 마음으로써, 얕은 사랑으로 매기단을 하려고 거짓을 해서 이렇게 하지 말고 진실한 마음, 그걸로써 임신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그래서 ‘임신을 했어도 임신을 했단 말을 말아라. 어린앨 낳았어도 낳았단 말을 하지 말라. 그래서 어린애를 기른다 하더라도 아주 인의롭게 길러라. 자비하게 길러라. 너 나가 원수지면 아니 되느니라. 너 나가 거부감을 느끼고 저항력을 느낀다면 다 얻을 수가 없느니라. 다 얻어야 다 토해 낼 수가 있어서 일체 중생들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골골이, 천차만별의 중생들에게 다 응신이 돼서 모습을 바꿔 가면서 응하느니라.’ 이겁니다.

모습이 개 모습이라면 아, 그 속에 들어가면 개밖에 더 되겠어요? 예전에도 개가 병이 났다고 오고요, 소가 병이 났다고 오고, 닭이 병이 났다고 오고, 닭이 자꾸 미주알이 빠진다고 그러고 오고, 별소리 다 들었습니다. 고양이가 새끼를 낳고 다 죽게 됐다고 오질 않나, 별소릴 다 들었지만 그거 나는 고양이로 보지도 않았고 개로 보지도 않았고 소로 보지도 않았습니다.

지금은 시대가 좋아서 텔레비전으로 그, 동물의 왕국인가 그런 것도 모두 보시죠? 어떻게 기어 다니는 게도 제 자식은 함함해서 함부로 굴리기가 싫어서 그냥 자기가 먹어 버리고 다시 배출을 해요. 자기 새끼를 낳고 알을 낳고 그냥 죽어 버리는 것도 있어요. 왜냐? 자기가 바로 그거니까요. 자기 몸을 바꾸는 거죠. 이렇게 잘 알고 그 섭리에 대처를 해서 잘해 나가는데 우리 사람들은 외려 미급해서, 죽으면은 그냥 아주 죽는 줄 알고 그냥 매달리고 온통 야단법석인데, 그게 아닙니다. 그거를 알면 오늘 죽으나 내일 죽으나 죽는 것이 겁이 안 납니다. 그게 겁이 안 나야 뛰어넘을 수가 있는 거지 그 죽느냐 사느냐에 대해서 겁이 나면 뛰어넘을 수가 없죠.

어린애를 배 가지고 어린애가 9개월 됐다 이렇게 하고, 10개월이 돼서 낳았다 이런다면은 그때에 길잡이, 쳐 주는 길잡이가 참 필요합니다. 이게 9개월째가 되면 어린애가 막 놉니다. 발버둥이를 치고 나오기 직전이 되기 때문에 상당히 그게 감응이 되고 그냥, 이리 치고 저리 칩니다. 그 이리 치고 저리 칠 때 말입니다, 이게 혼란이 오는 겁니다. ‘어이구, 이런 것은 뭐며, 이게 이게 여기서 이렇게 시키는데, 이것은 무엇인가.’ 하는 겁니다. 그래 시킨다 할 때 거기서 시킨다고 해서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왜? 거기서 시키는 것은 그 사람이 어린애를 낳아도 어머니로서 대처를 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테스트를 해 보는 겁니다.

그래서 참, 이게 우리가 육안으로, 눈으로 보고 듣고 하고 이렇게 사는 데 대해서 어떤 게 시대에 맞게 옳은가 이런 거를 판단을 해서 자제해야 됩니다. ‘아! 나를, 그 무(無)의 세계 유(有)의 세계를 합류화시키는 공부를 시키기 위해서 나를 이렇게 단련을 시키는구나. 참 감사하구나.’ 하고 거기다 되놓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 또 옳은 걸, 안팎이 옳다, 이익 하게 한다, 무조건 이익 하게 하고 모든 것을 그렇게 문이 없는 문으로 이끌어 가는 거, 또는 길이 없는 길로 이끌어 가는 거, 함이 없이 하는 길로 이끌어 가는 거, 먹은 사이 없이 먹는 도리로 이끌어 가는 거, 또 상단에 공양미를 올려놓고 그것을 내려먹는, 자기 밥 내려먹는 대로 이끌어 가는 거, 이러한 도리를 할 때는 응당히 그냥 감사하게 받아들여야죠. 그 줄을 잡고 공부하는 거니깐요.

어떤 사람은, 이런 신도 한 분이 있었습니다. 호박 넝쿨이 여기 쭈욱 있는데 애호박이 이쁘게 열렸거든요. 그런데 나가다 보니 주인공이 그거를 따 가지고 가자고 그러더라는 겁니다. 어떻게 발견이 되기는 했는데 말입니다. 하하하. 그 마음의 습이라든가 관습이, 욕심이, 그냥 그 질투가 그냥 두루뭉수리처럼 있는데, 그게 뭉쳐서 앞을 탁 가리고 거기에서 자꾸 습성이 나오는 거를 그걸 대치를 못하는 겁니다, 이게.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거죠, 즉 말하자면. 그래 따 가지고 가란다고 따 가지고 가니깐, “왜 그걸 따느냐.” 하니깐 주인공이 그렇게 따 가라고 그랬다 이거야. 응? 하하하. 이게 한마디로 말해서 될 노릇입니까?

이게 바로 꽉 찬 관습, 습성, 욕심, 그 악의가 들어 있는 마음 그러한 것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거를 다 녹이려면은 그러한 문제가 나온다. ‘나가서 춤을 춰라.’ 이런다 하더라도 ‘허!’ 하고 싱긋이 웃고, 즉 말하자면 ‘아, 나를 다스려서 이끌어 주기 위해서 그러는구나.’ 하고서 거기다 되놓고 싱긋이 웃고 감사하게 생각을 해야죠. 호박을 따 가지고 가란다고 따 가지고 가니 벌써 그렇게 하면은 누(累)가 되는 건데 그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을 어떻게 하나 보려고 테스트하는 거죠. ‘따 가지고 가나, 그렇지 않으면 ‘이럭하면 안 되잖아?’ 하고서 거기다 도로 놓나.’ 이거 보느라고 그런 건데 고만 속았죠.

그래서 무조건 그렇게 해서 공부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공부하려면 자기 선장이 자기를 다스려서 자꾸 거기다가, 좋은 것도 거기다 놓고 언짢은 것도 거기다…. 잘못 나가게 하는 것도 거기서 잘못 시키는 게 아니라 자기를 테스트해 보려고 그러는 걸 모르고 그러는 겁니다. 그것을 다 확고하게 속지 말고 해야만이 부처님께서 “나는 항복을 다 받았다.” 하는 그런 뜻과 똑같은 게 됩니다. 마구니가 나오는 것도 그 속에서 나오는 거거든요. ‘부처님의 마음을 어떠한 씀씀이로 쓰나. 넓게 쓰나 좁게 쓰나.’ 또는 ‘관습으로써, 욕심으로써, 습관으로써 쓰나 안 쓰나,’ 그거 보기 위해서 나오는 거거든요.

그런데 그냥 마구니가 나오든 신장(神將)이 나오든 미녀가 나오든, 어떤 게 나오든 용도에 따라서 다 그냥 ‘허허, 이게 다 그 속에서 나온 거로구나.’ 하고 그 속에다가 그렇게, ‘그 속에서 나온 거로구나.’ 하는 순간 벌써 화(化)해서 나왔던 게 다시 원자리로 들어간 거죠.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거를 항복받았다고 할 수 있겠죠. 모든 것을 항복받았다고 할 땐 모든 것을 다 얻었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도 버릴 게 없다는 얘깁니다. 하나도 버릴 게 없기 때문에 하나도 버릴 게 없이 토해 줄 수가 있다. 그래서 바다를 한 번 삼키고 바다를 다시 토해 줄 때 중생들을 건진다 이겁니다.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1994년 5월 15일 정기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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