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성 스님 도선사 조실

현성 스님은… 1938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난 현성(玄惺)스님은 서울 선학원에서 청담 스님을 은사로 출가, 1965년 부산 선암사에서 동산 스님을 계사로 보살계 및 비구계를 수지했다. 1965년 부산 선암사에서 수선안거에 들었다. 도선사 실달승가학원과 국민대를 졸업 후 동국대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과정, 동 대학 불교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조계종 총무원 사회부장, 총무부장, 교무부장, 중앙종회의원(4, 5, 6, 8대), 도선사 주지, 청담학원 이사장, 사회복지법인 혜명복지원장, 동국대 이사, 중앙승가대 총장, 사회복지법인 승가원 이사장 등 종단 내외의 주요 소임을 두루 역임했다. 서울 홍은동 현성정사에 주석하며 현재도 안양교도소 불교 종교위원회 회장, 대한불교청소년교화연합회 총재로 재소자교화와 청소년포교 활동을 현장에서 이끌고 있다. 스님은 종정 표창을 4차례 받은 것을 비롯해 복지부문 목련장, 교정교화부문 동백장, 통일안보부문 모란장 등 국민훈장을 받았다.

1964년 청담 스님 은사로 출가
‘큰중은 지고 살아야’ 가르침 수지
부산 선암사서 수좌로 수행 정진

1980년 도선사 주지 맡아 사격 일신
군법당 14곳·혜명양로원 건립도
교정교화 현재도 발벗고 나서
“타인 배려할 때 함께 행복해”

서울 홍은동에는 ‘백미(白米)선사’로 불리는 한 스님이 있다. 도선사 조실 현성 스님(78)이다. ‘백미 선사’는 청소년, 군, 재소자포교와 노인복지에 오랜 공을 기울여 온 현성 스님이 생활이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쌀을 많이 보시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이제는 하얀 눈썹의 백미(白眉)선사로도 불리는 현성 스님을 부처님오신날을 앞둔 4월 26일 홍은동 현성정사에서 만났다.

현성 스님은 1964년 청담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이후 1980년대부터 독거노인·청소년·재소자 포교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사람들은 스님들이 포교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현성 스님과 같이 다양한 분야에서 수십년간 포교활동에 매진하기란 쉽지 않다. 스님은 포교 각 분야에서 30년 넘게 정성을 들여왔다.

“조금이라도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예전보다 지금은 물질적으로 풍족해지지 않았습니까? 이웃을 위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러한 풍족함도 궁핍함으로 바뀝니다. 다들 돈을 많이 벌어서 남을 돕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분수에 맞는 삶을 살며 남을 위하는 작은 선행, 보시행이야 말로 우리 모두가 잘 사는 길입니다. 보시행이 일상생활로 젖어드는 것이 바로 행복한 삶입니다.”

사실 스님이 주석하는 현성정사는 크지 않은 절이다. 수십년간 포교를 진행한 데에는 스님의 남다른 원력이 있었다.

스님은 포교와 봉사의 과정에서 항상 새로운 마음가짐을 하게 된다고 했다.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은 스스로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하기에, 결국 자신을 위하는 일이라고도 덧붙였다.

“어르신들을 도우려고 가보면 정말 허름한 집에 사는 분들이 많습니다. 따듯한 밥 한그릇에 만족할 수 있는 사람들, 추위만 피할 수 있어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 많아요. 어디 수행이 따로 있겠습니까. 이들을 보살피며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수행이지요.”

2015년 9월 추석을 맞아 현성 스님이 서대문구 저소득 가정에 쌀 100포대를 전달하는 모습. 스님은 어려운 이웃에게 쌀을 전달해 ‘백미’선사라 불린다.
은사 청담 스님의 큰 가르침 ‘인욕’
스님은 한국불교 근현대사의 큰 획을 그은 청담 스님을 은사로 1964년 출가했다. 비구ㆍ대처간의 다툼이 끊이지 않았던 당시, 스님은 은사 스님으로부터 인내하는 법을 배웠다. ‘인욕보살’로 유명한 청담 스님은 어느날 현성 스님에게 물었다고 한다. 당시 현성 스님은 도봉산 자락의 도선사까지 청담 스님을 업고 다니곤 했다.

“몸이 좋지 않았던 큰스님이 하루는 산 중턱에 쉬자고 하시며 이렇게 말하시는 겁니다. ‘불교정화하면서 앙금이 많은데 태고종 쪽에서 내게 폭력을 가한다면 너는 어떻게 할 것인고?’라고 말이요. 내가 ‘어찌 가만히 있습니까’고 답하니 스님은 ‘만약 그런 일이 있더라도 합장을 하고 서서 염불을 하라’는겁니다.”

현성 스님은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은사 스님은 평소 큰 중이 되려면 지고 살아야 한다고 했다”며 “시간이 지나며 스님이 말씀하신게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젊어서 기골이 장대했던 스님은 도선사서 땔감을 만들고 공양간 일도 하는 등 궂은일을 도맡아했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절 배곯아가며 힘든 울력을 나서서 했다. 스님은 은사 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인내했다. 그러던 와중 한 도반과 사소한 일로 다툼이 생겼다. 은사 스님에게 용서를 구했지만 스님은 단호했다.

도선사에서 나온 현성 스님은 부산 선암사로 향했다. 당시 선암사에는 석암 스님이 주석하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존칭을 썼던 석암 스님은 삼배를 올리며 이곳에 머물겠노라는 현성 스님의 청을 듣더니 ‘부드럽게’ 말했다.

“청담 스님 제자면 거기서 살아야지 여기는 안됩니다.”

현성 스님은 “스님, 한철만 지내보시고 싹이 없다 싶으면 가라고 하십시오. 그럼 가차없이 떠나겠다”고 말했다.

석암 스님은 이런 현성 스님에게 몇 가지 청규를 제시했다. 첫째는 농사를 짓는 사찰이니 농사일을 도울 것, 둘째는 참선을 하더라도 가끔 제사가 있으니 금강경을 읽어줄 것, 셋째는 제사음식을 귀신이 먹다 남은 것이라 해서 가리지 말 것, 넷째는 아침 울력에 빠짐없이 참여할 것이었다.

현성 스님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다 먹겠다’고 다짐하고 선방에서 참선과 계율 등을 배울 수 있었다. 겨울철 선암사에서는 17명의 수좌들이 용맹정진에 들었다. 하지만 그때까지 참선을 제대로 해보지 못한 스님은 일주일 만에 몸이 축이 났다. 용맹정진의 의지로 이겨낸 현성 스님은 당시 결제를 마친 7명 중 한명이 됐다. 그날 이후 현성 스님은 12년을 선암사서 살았다.

이 기간 스님은 온갖 어려움에도 수행의 끈을 놓치 않고, 어디든 법문하러 다니는 석암 스님도 잘모셨다. 이런 용맹정진하는 모습 때문이었을까. 1200일 기도 중 석암 스님이 보살계를 설하는 법석을 항상 수행했고 후에 인환 스님, 고산 스님 등과 함께 ‘법제자’가 됐다.

2016년 6월 제5군단 호국 금강사 위령재. 스님이 군법당 불사 후 위령재까지 후원하고 있다.
포교 일선의 크고 작은 불사 도맡아
세월이 흘러 1970년 청담 스님이 조계종 총무원장을 할 때 현성 스님은 은사 스님을 찾아갔다. 수행납자로 거듭난 스님의 모습에 은사 스님은 반갑게 맞이했다. 이후 현성 스님은 1980년 12월 도선사 주지를 맡게 된다. 본격적으로 청담 스님과 석암 스님의 가르침을 실천한 스님은 12년간 도량을 정비하고 가람을 중창했다. 대웅전과 석불전, 명부전, 적묵당, 독성각, 요사, 종각, 일주문, 사적비, 청담 스님 탑전 108계단 조성불사 등 크고작은 불사가 스님의 손을 거쳐 이뤄졌다. 포교당으로 봉천동 혜명정사(顯 미타정사)와 홍은동 현성정사를 창건하기도 했다.

또 은사 스님이 큰 관심을 보였던 군포교에 진력해 14곳의 군법당 건립을 주도하고 수계사로 전방부대를 누볐다. 스님은 특히 1985년 불사한 5군단 호국금강사에서 위령재를 30여년간 한해도 거르지 않고 참석하고 있다. 5군단 위령재는 2000년대 용산전쟁기념관에서 열리는 호국영령천도법회 전 종단 차원의 위령재로 진행됐다. 이밖에 스님은 논산훈련소 호국연무사 신축법당 불사 등에도 큰 역할을 했다.

“아무래도 군포교에 적극적이셨던 청담 스님의 영향이 크지요. 하루는 스님을 모시고 전방부대에서 통일염원 기도를 올린 뒤 스님이 그러시는 겁니다. ‘우리가 마음의 양식을 갖고 있으면, 어떤 것도 무서울 것이 없다’고. 스님께서는 장병들이 마음을 놓일 수 있는 군법당을 많이 세워야 한다고 강조하셨어요.”

스님이 총재로 있는 청소년교화 연합회의 2013년 5월 열린 전통예술제 모습.
“내면을 가득채우는 부처님오신날 되길”
불교노인복지의 한축이 된 혜명양로원은 스님이 도선사 주지 시절 처음으로 진행한 불사이기도 했다. 1982년 4월 개원한 혜명양로원은 시주금만으로 지어졌다.

“출가해서 살지만 부모에겐 불효자니 어르신들에게나마 갚아야지요. 늙고 병든 것 만큼 인생에 고달픈게 없습니다. 힘들 때는 작은 배려 하나로 서로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현성 스님은 청소년 포교에도 힘썼다. 석주 스님과 운문 스님에 이어 당시 어려운 살림에 처했던 청소년교화연합회를 맡았다. 앞서 건립한 양로원에서 아이들이 봉사할 수 있도록 했다.

“요즘처럼 캠핑하며 노는 포교보다는 어른을 공경하고 예의범절을 배우는 기회가 되게 하려했지요. 혜명양로원에서 아이들이 어르신들 말벗도 하고 또 남을 배려하는 교육도 함께 할 수 있도록 했지요. 그 것이 제대로된 포교 아닙니까.”

스님은 “마음을 나누고 서로 의지하고 살아가는 삶 속에 행복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도 재소자 교화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 어느 사람들 보다 자비의 손길이 필요한 이들에게 스스럼없이 찾아가고 있다.

스님은 교화위원 제도가 생기기 전인 1978년부터 교도소에서 교화활동을 시작했다. “안양교도소에 매달 한 번씩 나가지요. 1981년부터 음력설날 80kg 쌀 13가마로 떡국공양, 부처님오신날 앞두고 수계식 때는 전 재소자에게 빵과 두유공양을 합니다.”

스님은 5월 11일에도 안양교도소를 찾아 전 재소자들과 교도관들에게 공양을 올리고 법문할 예정이다.
스님은 끝으로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불교 발전을 외치기보다 한명의 불자로서 얼만큼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고 사는지 반추해보라고 강조했다. 스님은 불자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타인을 배려하고 함께 하는 삶을 통해 행복을 느끼길 바란다는 말도 전했다.

스님은 “우리나라가 외형적으로는 많은 경제성장을 했지만 아직도 정신적으로는 가난하다”며 “서로 돕고 이웃을 돕고 봉사하는 이, 나눌 수 있는 이가 진정한 부자다. 여러분들도 어렵더라도 힘을 내시고 다독이며 살다보면 좋은 날이 오리라 희망을 갖고 행복한 삶을 사시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찻잔의 차가 식는 줄도 모르고 현성 스님의 자비나눔에 대한 담소는 이어졌다. 스님의 어려운 이웃을 위한 원력 때문일까. 스님의 흰 눈썹이 더욱 빛나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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