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母列傳 - ⑨ 하천(夏天) 스님

색난·일기 스님의 직계 제자
문헌 통해 활동 시기 등 가늠
주로 서남 해안 중심으로 활동
‘재장’으로 불려… 소목장 추정

18세기 전반 하천 스님의 만든 대표작인 1727년 대구 동화사 목조석가여래좌상<사진 왼쪽>. 나무로 만든 불상으로 오른쪽 어깨에서 가슴까지 대의자락이 수직으로 늘어진 것이 특징이다. 하천 스님이 1730년 4월에 만든 경북 김천 봉곡사 목조보살좌상<사진 오른쪽>. 현재는 김천 대휴사에 봉안돼 있으며, 최근 조사과정에서 본래 있던 사찰이 확인됐다. 사진제공=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
18세기 전반에 호남(湖南)과 영남(嶺南)에서 활동한 하천(夏天) 스님은 17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색난(色難, 色蘭) 스님과 일기(一機) 스님의 계보에 속하는 조각승(彫刻僧)이다. 하천 스님은 스승과 마찬가지로 나무로 불상을 제작하거나 개금(改金)이나 개채(改彩)를 주로 하였다. 현재 하천 스님이 수화승으로 만든 목조불상은 전국에 걸쳐 5건 9점이 있고, 불상을 중수·개금한 기록은 3건이 조사되었다. 

아직까지 하천 스님의 생애와 조각승이 된 배경에 대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지만, 불상에서 발견된 발원문과 현판(懸板) 등의 문헌을 통하여 활동 시기와 지역, 조각승 계보, 불상 양식 등을 밝힐 수 있다.

하천 스님은 처음으로 전남 구례 각황전 불상 제작에 참여하는데. 이 건물은 670년에 의상대사가 건립한 삼층장륙전으로, 내부에 장륙존상(丈六尊像)이 봉안되었다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중에 소실되어 1699년에 벽암대사의 제자인 계파성능(桂波性能) 스님이 왕실의 후원을 받아 4년 동안 중창하였다. 이후 숙종의 어필(御筆)을 받아 각황보전(覺皇寶殿)으로 전각 명칭을 바꾸었다.

전각 내에 봉안된 석가삼세불좌상(석가불, 아미타불, 다보불)과 목조보살입상(관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지적보살)은 대형목조불상으로 18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이 불상 제작에 하천 스님은 24명의 조각승 가운데 가장 마지막에 적혀 있어 보조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하천 스님은 스승인 색난 스님과 같이 1705년 6월에 경남 하동 쌍계사 보현과 문수동자상, 1707년에 전남 고흥 능가사 불상, 1709년에 고흥 금탑사 목조보살좌상(고흥 송광암 봉안)과 목조삼존불좌상(광주 덕림사 봉안, 1980년 소실)을 제작하였다.

그후 하천 스님은 1720년에 일기 스님과 전남 순천 송광사 소조사천왕상을 새롭게 색을 칠하고[改彩], 1722년에 수화승으로 전남 장흥 보림사 금강신(金剛神)을 중수한 후, 1724년에 필영(弼英) 스님과 종혜(宗惠) 스님 등과 보림사 나한상을 중수(重修)하였다. 또한 하천 스님은 1726년에 고흥 금탑사 북대암(서울 동대문 지장암 봉안)과 문수암(고흥 송광암 봉안)에 봉안할 목조관음보살좌상을 종혜 스님과 만들고, 1727년 1월부터 4월까지 대구 동화사 목조삼세불좌상을 석준 스님, 득찰 스님 등과 제작하였다.

특히, 스님은 1730년 4월에 경북 김천 봉곡사 목조석가삼존불좌상(보살 1구 김천 대휴사 봉안)을 조성하고, 8월에 고흥 금탑사 극락보전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을 개금하였으며, 8월부터 11월 19일까지 경남 창녕 관룡사 목조석가여래좌상(창녕포교원 봉안)을 제작하였다. 현재까지 밝혀진 하천 스님의 활동 시기는 1703년부터 1730년까지이다.

이런 문헌을 통하여 하천 스님은 1680년대에 태어나 1700년대부터 색난 스님 밑에서 수련기를 거친 후, 1720년대 수화승으로 호남과 영남 지역에 불상의 제작과 개금에 참여하였다. 스님은 1726년에 금탑사 북대암과 문수암에 봉안할 목조관음보살좌상을 종혜 스님과 제작한 것으로 보아 나무를 직접 조각한 소목장(小木匠)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천 조각승 계보는 색난(-1680-1730-), 일기(-1698-1720-)→ 선각(-1703-1720-), 선일(-1718-1720-), 하천(-1703-1730-), 석준(-1705-1730-), → 성찬(-1727-1777-), 종혜(-1726-1730-), 굉척(-1725-1727-)으로 이어진다. 스님은 고흥 금탑사 본사와 말사 등에 불상을 제작하거나 중수하여 스승인 색난 스님과 마찬가지로 고흥에 거주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스님은 전남 구례, 고흥, 순천, 장흥, 경남 하동, 창녕, 대구 등에 위치한 사찰에 불상을 제작하였다.

하천 스님이 수화승이 되어 만든 대표적인 불상은 대구 동화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다. 이 불상은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불을 봉안한 삼세불좌상으로, 본존은 전체 높이가 137㎝로, 앞으로 숙인 머리에는 소라모양의 나발(螺髮)이 촘촘하고, 깨달음의 상징인 육계는 거의 표현되지 않았으며, 머리 정상부에 원통형의 정상계주와 이마 위에 반원형의 중간계주가 있다. 넓적한 얼굴에 눈꼬리는 살짝 올라가 눈을 반쯤 지그시 뜨고, 코는 원통형이며, 입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두꺼운 대의는 변형통견으로, 대의자락은 오른쪽 어깨에서 가슴까지 거의 수직으로 늘어진 후 팔꿈치와 배를 지나 왼쪽 어깨로 넘어가고, 다른 대의자락은 왼쪽 어깨를 완전히 덮고 내려와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 펼쳐져 있다. 불상의 뒤에는 목 주위에 대의 끝단을 둘렀고, 왼쪽 어깨에 앞에서 넘어온 오른쪽 대의 끝자락이 길게 늘어져 있다. 가슴을 덮은 승각기(僧脚崎)는 가슴까지 올려 끈으로 묶어 상단에 연판형으로 주름이 접혀 있다. 소매 자락은 왼쪽 무릎 밑으로 연판형으로 늘어져 있다. 오른손은 촉지인(觸地印)을, 왼손은 다리 위에 가지런히 놓은 채 손바닥을 펴고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다.

사천왕상 중수 묵서. 하천 스님은 1720년에 일기 스님과 같이 순천 송광사 소조사천왕상을 중수했다.
최근 새로 발견된 김천 대휴사 목조보살좌상은 내부에서 조성발원문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묘법연화경〉 변상도 위에 묵서로 ‘봉곡사(鳳谷寺)’와 후령통을 감싼 황초복자를 묶은 종이 띠에 ‘증명(證明) 수정(修淨)’이란 글씨를 단서로, 현재 김천 봉곡사에 소장된 현판을 조사한 결과, 1731년에 작성된 현판 ‘영산전창건탱불등상단확기’에 참여한 스님들이 동일하여 대휴사 보살상이 1730년에 하천 스님이 만든 석가삼존불의 협시보살이라는 것을 밝힐 수 있다. 보살상은 높이가 76.0㎝인 중형상으로, 상반신을 앞으로 조금 내밀어 자세가 구부정하다.

보관 안쪽에는 정수리 부분에 두 가닥으로 묶은 작고 단순한 형태의 보계(寶?)가 있고, 양 어깨에는 둥글게 말린 보발(寶髮)이 세 가닥으로 길게 늘어져 있다. 타원형 얼굴에 살짝 뜬 눈은 거의 일자형으로, 눈꼬리가 위로 약간 올라갔고, 삼각형의 코는 콧등이 평평하며, 입은 살짝 미소를 짓고 있다.

바깥에 걸친 대의는 오른쪽 어깨에 짧게 U자형으로 걸친 후, 팔꿈치와 복부를 지나 왼쪽 어깨로 넘어가고, 반대쪽 대의는 왼쪽 어깨를 완전히 덮고 내려와 복부에서 오른쪽 어깨를 덮은 편삼과 겹쳐져 있다. 하반신의 대의 처리는 중앙에 한 가닥이 길게 늘어져 끝단이 반원형으로 길게 늘어지고, 좌우로 대의자락이 두 가닥 접혀서 흘러내리고 있다. 또한 왼쪽 소매 자락은 연판형으로 무릎을 덮고 있다.

하천 스님이 만든 불상은 18세기 전반에 제작된 불상의 신체비율을 따르고, 얼굴에서 풍기는 인상이나 대의 처리가 색난 스님이 만든 불상과 유사하지만 단순하고 생략되는 경향이 있다. 그밖에도 하천 스님은 임진왜란 이후 만들어진 불상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도금이나 채색이 훼손되면서 개금과 개채 불사에 참여하였다.

하천과 그 계보에 속하는 조각승이 18세기 전반에 제작했다고 추정되는 불상은 전남 여수 흥국사 의승수군유물전시관 목조보살좌상, 광주 신광사 목조보살좌상, 대구 은적사 목조석가여래좌상, 부산 칠보사 목조관음보살좌상. 경남 마산 법성사 목조보살좌상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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