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과 현대미술- ⑨ 바네트 뉴먼 (Barnett Newman)

침묵·명상, 예술적 승화 노력
“작품은 마음을 옮기는 과정”
뉴먼 스스로 禪 수행에 매진
“내면의 본질적 자아 인식위해
우리는 오로지 침묵해야 할 뿐”

▲ 바네트 뉴먼의 작품 ‘Vir Heroicus Sublimis(242x513cm, 1950)’은 생각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자신의 정신성을 보여주고 있다.
삶의 경험은 새로운 가치를 추구한다. 철학적 깊이를 동반하는 그 도전은 아름답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의 삶에 변화를 가져다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 변화의 가치를 논하기보다 그 변화의 과정을 논하는 것이 더욱 가치 있어 보인다.

바네트 뉴먼(Barnett Newman, 1905~1970, 미국)은 예술의 영역에 철학적 관점을 접목시킨 선구자 중의 한명이다. 철학을 공부한 그는 시대의 혼란기에 예술의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였다. 당시 앵포르멜(Informel), 액션페인팅(Action Painting)등 실험적인 시도들이 팽배하며 많은 작가들이 여기에 관심을 기울일 때 뉴먼은 자신의 관심사인 ‘침묵’, ‘명상’을 예술로 승화하고자 하며 자신만의 표현기법과 미학적 체계를 형성하게 된다.

당시에는 마크 토비, 마크 로스코 등 일부 작가들이 동양의 선사상에 심취하여 새로운 표현을 통한 정신성을 표현하는 시도를 하던 때이다. 뉴먼 역시 선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지며 관련 서적을 탐독하여 침묵도 언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언어나 글로 표현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며 이러한 것이 모두 사라진 침묵도 동일한 언어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한 그는 상당한 충격을 경험하게 된다.

말하지 않고 소통을 한다. 즉 자신의 의견이나 사상, 정신을 보여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침묵은 그에게는 새로운 패러다임이었던 것이다. 일상의 삶의 과정에서 언어나 글이 사라진다면 어떠할까? 생각해보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미국에 가면 말이나 글을 듣고 봐도 이해할 수 가 없다. 영어를 알지 못하면 눈으로 보이는 글씨도 이해할 수 없고 열심히 무언가에 대하여 설명하는 현지인의 말도 전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처럼 언어나 글은 서로 소통하기 위한 기호이며 이는 이를 공통적으로 이해하는 조건이 전제되어야 서로 소통이 가능해 지는 것이다.  

침묵은 문화의 권역을 넘어 더욱 강력한 소통의 수단이 될 수 있다. 특히 예술에서는 이미 조형언어라는 소통방식을 형성하며 언어, 문화, 종교, 철학 등의 차이점이 있는 각국의 문화적 차이에도 비교적 공통적인 소통의 방식으로 이해되고 활용되는 경향이다.

이러한 관점을 인지한 뉴먼은 자신의 예술 속으로 침묵을 들어오게 한다. 화면에 가득한 색면(色面)은 아무런 말이 없다. 다시 말해 무엇을 그리려고 하는지, 아니면 어떠한 대상을 상징하는지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다. 오로지 말할 수 없는 무언이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보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인지하는 것이다. 없는 것을 통하여 존재하는 현실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없다는 것은 기존의 방식으로 보기 때문이다. 회화작품은 대상이 존재하여야 하고 구도와 색채의 조화가 있어야 하고 등등 다양한 이론적 체계들이 형성되어 있는 관점으로 보면 뉴먼의 작품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된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 이러한 질문에 그는 명상을 생각하였다. 명상이야말로 자신이 추구하는 정신성의 세계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 뉴먼은 스스로의 체험을 통하여 관념적 사고에서 벗어나며 내면의 깊은 울림을 침묵이라는 방식으로 표출한 것이다.

선(禪)의 4종지 중의 하나인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의미를 깊이 수용한 것으로 보이는 뉴먼은 이를 침묵이라는 자신의 방식으로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선사들은 지금 자신의 마음을 관(觀)하라고 한다. 언어나 글자로 표현된 표상이 아닌 지금 자신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깊게 사유하여 자신의 존재를 찾아가라는 것이다.

마치 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며 달이라고 착각하지 말고 진정한 달을 보아야 하는 것처럼 외부의 세계가 따로 존재하여 그 속으로 가야 한다는 관점을 한 순간에 무너뜨린 것이 바로 뉴먼의 침묵이다.

‘Vir Heroicus Sublimis(1950/51)’, ‘장엄한 영웅시’로 번역되는 이 작품은 뉴먼의 예술성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 중의 하나이다. 거대한 크기(242.2x513.6cm)의 이 작품은 생각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자신의 정신성을 보여주고 있다. 가느다란 작은 간격은 커다란 화면을 분리시킨다. 때문에 상당한 긴장감과 역동성을 느낄 수 있으며 생각의 변화를 일어나게 한다. 

뉴먼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지극히 인간적이라고 생각하였다. 일상의 삶의 과정에서 느끼는 다양한 심리적 변화를 가장 단순하면서 상징적인 인식으로 전환하며 변화를 유도하는 것이다. 깨달음은 거대한 외부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내면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한 그는 생각의 틈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인간의 생각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외부의 자극에 반응한다. 그것이 자신의 선택이나 의도가 아닐지라도 계속에서 번뇌망상은 사라지지 않고 나타나는 것이다.

뉴먼은 명상을 지속적으로 하며 자신의 내면에 흐르는 본질적이며 분리되지 않는 무언가의 힘에 의하여 인식이 변화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한 생각들을 화면 속으로 등장시킨 이 작품은 자신의 생각이 사라짐과 생성됨을 반복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표현의 질감이나 색채의 변화보다는 생각하는 의도를 드러내고자 한 그의 노력은 새로운 관점으로 해석되기를 원한다. 즉, 침묵하라는 것이다. 내면에 존재하는 본질적인 자아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것이다. 깊은 침묵 속에서 드러나는 강한 에너지를 색과 면으로 표현한 것이다. 작품을 보는 관객들은 처음에는 혼란스러움을 경험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적으로 작가의 의도대로 깊은 명상적 관점을 느끼게 된다.(물론 전부는 아니지만) 

‘작품은 자신의 마음을 옮기는 과정이다’라고 말하는 뉴먼은 그 마음의 깊이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Wer hat Angst vor Rot, Gelb und Blau(1966)’, ‘누가 빨강색, 노란색, 청색으로부터 두려움을 갖는가’로 번역이 되는 이 작품은 스스로가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 소통하는 단계에 다다른 것으로 보인다. 소통한다는 것은 기본적인 인식의 범주가 공유되어야 하는데 점차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해 나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색은 시각적인 자극을 가져다준다. 시각적인 자극을 인지하는 순간 그 색은 사라지고 정신만 남는다. 그 속에 무슨 두려움이 있을 것인가? 이것이 뉴먼이 인식하는 현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시각적 자극에 현혹이 되면 색을 떠나지 못한다. 색을 떠나지 못하면 색은 많은 경험을 생각하게 하며 감정의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반복되는 이러한 과정 속에서 생각의 깊이는 사라지고 시각적인 자극만이 자신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명상을 하는 것이다.

무엇을 안다는 것은 즐거움을 가져다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두려움과 공포, 고통을 가져오기도 한다. 안다는 것 자체가 이러한 것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안다는 생각 속에 사로잡히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경함한 부분들이 연결 작용을 하며 새로운 상상 속에서 인식의 영역이 확장되는 것이다. 망상적이며 비현실적인 생각들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계속해서 자신이 만들어 놓은 덫에 걸려 고통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그 고통도 자신이 만들어 낸 허상일 뿐이다. 어떠한 경험도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하지 못한다. 단지 그 경험에 대한 생각이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다.

뉴먼은 이러한 인식의 확산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스스로 새로운 생각의 방식들을 만들어 간 것으로 보인다. 마치 선사들이 깨달음을 얻은 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을 제시하듯이 말이다. 처음에는 그 방식이 익숙하지 않아 두려움을 갖기도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적으로 소통의 방식으로 전환되게 되며 새로운 삶의 가치를 찾아가는 안내자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처음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사람은 많은 시행착오를 경험하지만 그 과정을 통하여 자신의 존재를 인지하는 힘이 생기며 스스로 존재의 본질적 의미를 찾아 묵묵히 그 길을 간다. 하지만 정해진 길은 없다. 그 어떠한 것도 고정된 것은 없기 때문이다. ‘무유정법(無有定法).’

예술가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예술의 길을 선택하여 가는 것도 그 길이 정해진 바가 없기 때문이다.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있는 이 길은 수행자의 길과 유사해 보인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남이 해놓은 길을 가고자 함이 아니다. 자신이 자신의 가치를 찾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가는 길은 같을 수가 없다. 마치 저 산에 올라가는 길은 무수히 많으나 산 정상에서 만나듯이 꼭 어떠한 길을 선택하여 가야한다는 것도 필요하지 않는 것이다.

뉴먼은 명상을 통하여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갔다. 그 길은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커다란 길로 변화하여 그 가치를 지금까지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의 관점이 아닌 자신의 정신을 깊은 침묵 속에서 명상한 그는 떠나고 없지만 그의 작품은 지금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깊은 감동을 전하며 자신의 길을 찾아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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