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대사 불문의 벗… “禪理의 근본은 空”

대곡선생 성운 문하서 수학
재주 뛰어나도 名利 거리 둬
生死가 모두 공함을 드러내고
불교적인 삶 지향했던 유학자

조선 중기의 인물, 임제(林悌, 1549~1587)는 호남이 자랑하는 풍류남(風流男)이다. 평소 검을 좋아하고 피리를 좋아했던 그는 자유분방하여 얽매임을 싫어했던 그의 품성대로 20세가 되어서야 대곡선생(大谷先生) 성운(成運)의 문하에서 수학했다고 한다. 그의 기질은 국조인물고동서붕당(東西朋黨)의 의논이 일어나 선비들이 앞을 다투어 명예를 가지고 서로 추켜세우면서 끌어당기었으나 공은 자신 멋대로 행동하고 무리에 가담하지 않았으며 또 몸을 낮추어 사람을 섬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벼슬이 현달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천출로 타고난 재주가 뛰어나 날마다 수천 마디의 말을 외웠으며 문장이 호탕하고 특히 시를 잘 지었다고도 한다. 평소 산수 유람하기를 즐겼고 명리(名利)와는 거리를 두었다. 한때 술을 마시며 기생들과 놀기를 좋아했던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공부에 매진하여 과거에 응시했다. 하지만 몇 차례 낙방하는 어려움을 겪다가 1577년경 알성시에 급제하여 흥양현감(興陽縣監), 서북도 병마평사(西北道兵馬評事)관서도사(關西都事), 예조정랑(禮曹正郞)을 역임했다. 벼슬에 환멸을 느껴 방랑하다가 3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는 자순(子順)이며 호는 풍강(楓江), 백호(白湖), 벽산(碧山), 소치(嘯痴), 겸재(謙齋)이다. 화사(花史), 수성지(愁城誌),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등의 한문 소설을 남겼고 문집은 임백호집(林白湖集)이 있다.

풍진 세상에서 속리산으로 스승 성운(成運)을 찾아가던 길에 지은 시는 그가 원래 세상에 살기 어려움 품성을 지닌 인물이었음을 드러낸다.

걸음걸음마다 도리어 맑고 밝아져(步步却淸曠)
스스로 속된 세상 흔적에 놀라네(自驚塵世)
기이한 바위는 혹은 호랑이인 듯하고(巖奇或如虎)
오래된 소나무들 용린(龍鱗)을 이뤘구나(松老盡成龍)
눈 쌓인 산길이라 말이 자주 넘어질 듯한데(雪路馬頻蹶)
깊은 숲 속이라 사람조차 만나기 어렵구나(幽林人未逢)
취미사를 찾아가던 길에(行尋翠微寺)
지팡이 멈춘 채 천봉을 바라보네(柱杖望千峯)

 

▲ 〈국조인물고〉 임제편

그가 시 첫머리에 주운암에 도착했는데 암자는 속리산에 있다. 법적 나이 20세에 대곡선생에게 수업을 받았다. 이 산에 들어가 공부하며 몇 년을 보내다가 (집으로) 돌아왔다(到住雲庵 庵在俗離山 公年弱冠 受業於大谷先生 入此山讀書 數歲而還)”는 첨언을 달아두었다. 따라서 그가 대곡선생을 찾아가 공부한 해는 그의 나이 20세일 때였고, 이곳에서 몇 년간 지내다가 돌아온 사실이 드러난 셈이다. 속리산 주운암은 깊은 산속으로 기암기석과 묵은 송림(松林)이 우거진 곳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그의 스승 또한 은일지사(隱逸之士)인 듯하다. 그러기에 속진이 묻지 않은 이경지(異境地)에서 탁마(琢磨)했던 것이 아닐까.

실로 임제는 풍류를 아는 선비였다. 그러기에 관서도사(關西都事)로 부임하던 길에 황진이 무덤을 찾았을 것이다. 황진이의 무덤에 술과 시를 올리며 애도했던 일은 그가 풍류와 멋을 아는 인사였다는 것을 드러낸다. 청구영언에 수록된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웠난다.
홍안(紅顔)을 어디 두고 백골(白骨)만 묻혔난다.
()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황진이는 세상이 다 아는 문인이며 기생이다. 서 화담을 흠모하고 사랑했던 그녀는 조선의 대표적인 여류 시인이다. 자유 분망했던 황진이! 그러나 그녀의 지성과 풍류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갔다. 무상을 노래한 이 시는 실로 임제의 심회를 담아낸 것이라 하겠다. 그러기에 ()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했을 것이다. 생사가 모두 공한 것임을 일언으로 드러낸 임제의 시는 지금도 회자되지만 당시에는 법도에 어긋난 사람이라 비웃거나 기인한 인물로 치부해 버렸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팍팍한 현실에서는 가슴을 울리는 이들의 뜻을 아는 이가 드문 법이다. 아무튼 그가 산천을 유람하고 수많은 승려들과 교유했던 건 방랑벽과 현실에 깊은 환멸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수많은 승려들과 화답한 시와 시축의 제발(題跋)은 그의 문집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특히 매당자명록(梅堂煮茗錄)은 주로 지상(至祥), 신웅(信雄), 유관(惟寬), 의영(義英), 충서(忠恕), 가언(可言), 태화(太和), 보기(寶器) 같은 승려와 교유하며 지은 시들이 수록되었다는 특징을 보인다. 이외에도 묘향산의 성불암(成佛庵), 법주사(法住寺), 해남 대둔사(大芚寺), 안심사(安心寺), 무위사, 영명사(永明寺), 이암() 등을 유람하며 승려들과 교유했는데 이들과 나눈 유불교유의 흔적은 그의 문집 임백호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휴정(休靜)의 제자인 처영(處英)과도 깊이 교유했던 사실은 산인 처영이 풍악을 두루 구경하고 휴정을 찾아간다기에 시를 지어 주다(山人處英將歷遊楓岳尋休靜 詩以)’에서 드러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임백호 글씨
천하제일의 산은 풍악이고(第一山楓岳)
서로 견줄 짝이 없는 건 휴정이라(無雙釋靜師)
지금 상인(上人)이 먼 길을 찾아가니(上人今遠訪)
방초 시절에 돌아온다고는 말하지 못하리(芳草未言歸)
설법하는 자리엔 돌도 끄덕이고(石點談經處)
바리를 씻을 적에 용이 내려온다네(龍降洗鉢時)
은근히 이환에게 말해주오(慇懃說離幻)
서로 소식이나 끊지 말라고(消息莫相違)

이 시는 휴정의 제자 처영을 위해 지은 전별시이다. 처영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휴정을 도와 승병을 모집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환은 서산대사의 자()이다. 호는 송운(宋雲)이다. 임제가 이환, 즉 사명대사(四溟大師, 1544~1610)를 불문의 벗이라 불렀던 사실에서 이들의 교유는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던 듯하다. 그러기에 은근히 이환에게 말해주오(慇懃說離幻) 서로 소식이나 끊지 말자고(消息莫相違)”고 했던 것이 아닐까.

그가 휴정 스님과 깊이 교유했음을 드러낸 흔적은 성불암에서 휴정 노 승려를 만나 담소를 나누다. 휴정은 일대의 명승이다. 당시 묘향산에서 주석했다(成佛菴 邀靜老話 休靜 一代名僧 時住香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새도 울지 않는 곳(一鳥不鳴處)
그대와 나 서로 한가롭구나(二人相對閑)
속세의 관복과 승가의 법복을(塵冠與法服)
양단으로 보지 말게나(莫作兩般看)

묘향산 성불암은 새도 울지 않는 곳(一鳥不鳴處)’으로 깊고도 깊은 암자였을 뿐 아니라 소리조차 끊어진 곳이다. 이들의 마음자리를 말하는 듯하다. 그러므로 그대와 나 서로 한가롭(二人相對閑)기만 하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속세의 관복과 승가의 법복을(塵冠與法服) 양단으로 보지 말게나(莫作兩般看)”라고 한 것이리라. 임제는 이미 욕망이 사라진 허백(虛白, 텅 빈 순수한 마음)한 상태였음을 드러낸다. 그의 잠 승려에게 주다(贈潛師)’에도 비슷한 뜻을 이렇게 드러냈다.

나는 그대만 같지 못하고(我則不如君)
그대는 구름만 못하네(君則不如雲)
구름은 무심히 산봉우리에서 피어오르는데(無心自出岫)
승속 양단으로 나눠 분분하구나(僧俗兩紛紛)

원래 자연의 이치는 구름은 무심히 산봉우리에서 피어오르는 것(無心自出岫)’처럼 걸림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승속으로 나눠 이러쿵저러쿵 이론이 분분하다는 것이니 그는 불가의 공사상과 무분별심을 깊이 알았던 유학자였다. 이는 법 선승의 시축에 차운하여(次法禪軸)’라는 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리의 근본은 공하여 텅 빈 것이라(禪理本空空)
선구를 드는 건 무슨 말인가(拈何向汝說)
깊은 산 승려, 홀로 돌아가는데(山深僧獨歸)
옛길엔 아직도 잔설이 남았겠지(古道留殘雪)

유독 승려들과 교유하며 남긴 시가 많았던 임제는 속진에 살기엔 너무도 맑은 품성을 지녔던 것일까. 그는 선리의 근본이 공하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했다. 그러기에 법 선승의 시축에 쓴 시에서 선리의 근본은 공하여 텅 빈 것이라(禪理本空空) 선구를 드는 건 무슨 말인가(拈何向汝說)”라고 하였다. 이는 선리의 근본은 원래 공인데 선구를 들어 참선을 하는 연유가 무엇인지를 반문한 것이다. ‘현민 승려의 시축에 제하다(題玄敏軸)’라는 시에서는 이미 공 도리를 깨친 이의 담담한 모습을 오래된 나무엔 꽃과 잎이 없고(古樹無花葉) 선승은 이미 생사에 걸림이 없네(禪僧了死生) 책을 펴 담담히 대하니(披圖澹相對) 한 밤중 강달이 더욱 또렷하여라(江月夜深明)”라고 노래했다. 피차의 분별이 사라진 세계는 나와 네가 분별이 없는 경지를 말한다. 따라서 그는 진정 불교를 깊이 이해했을 뿐 아니라 불교적인 삶을 어느 정도 구현했던 유학자이며 문인이었던 듯하다. 실로 그의 멋과 풍류는 무심(無心)에서 나온 순일을 드러낸 것이지만 당시 사람들의 안목으로는 그의 깊이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진실한 사람은 바로 이런 풍모를 지녔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