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 껍데기가 하는 게 아니라 마음의 주인이 하는 거다

주인은 딴 데 있는 게 아닙니다.
주인은 내 마음 가운데 만질 수도 없고 쥘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그 자체, 바로 핵점입니다.

(지난 호에 이어서)
그러니 우리가 몸을 벗기 전에 이 도리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몸이 떨어지면 말 잘하던 것도 다 떨어지고 생각하던 것도 다 없어지지만 우리의 영원한 생명의 근본, 그 자체의 앎은 변하는 게 아닙니다. 요다음에 또 나와도 대통령으로 나와서 일을 아주 밝고 정확하게 해서 국민들을 살릴 수도 있고, 큰 회사를 해서 직원들을 다 잘 먹여 살릴 수도 있죠. 모든 게 자기가 산 대로 나오는 겁니다. 이제 얼마 안 가면 이게 꿈이냐 생시냐 하는 게 나옵니다. 모두가 꿈도 아니고 생시도 아니고 현실입니다.

그러니 부처님 법이 따로 있어서 부처님 모셔 놓은 데만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부처님의 형상을 모셔 놓은 건 방편으로 모셔 놓은 것이니 그 형상도 여러분의 형상과 둘로 보지 마시고 부처님의 마음도 둘로 보지 마시고 부처님의 생명도 둘로 보지 마세요. 법당에 와서 절을 할 때는 부처님과 둘이 아닌 둥근 한마음으로 예배를 올리고, 그러니까 자기한테 자기가 하는 겁니다. 따지고 보면 즉, 자기 조상이죠. 지수화풍이 한데 합쳐지니까 밝음이, 광력이 나와서 생명이 생기고, 그 생명이 수억겁 동안 쫓고 쫓기고 진화를 거듭하면서 사람으로까지 등장하게 된 사실을 아신다면, 누가 형성시켜서 그렇게 끌고 다녔나를 아신다면 지금 자기 참주인공에게 믿고 맡기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주인은 딴 데 있는 게 아닙니다. 주인은 내 마음 가운데 만질 수도 없고 쥘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그 자체, 바로 핵점입니다. 만질 수 없고 볼 수 없고 빛깔도 없기 때문에 광대무변한 겁니다. 어디고 그 한 점이 닿지 않는 데가 없습니다. 그래서 외국에서는 블랙홀이라고 하고 한국에서는 불바퀴라고 합니다. 불바퀴의 그 중심, 소용돌이, 중심 한 점, 그 한 점은 육안으로 보이지도 않고 붙잡을 수도 없고 빛깔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인간에게도 왼쪽 두뇌와 바른쪽 두뇌, 양면을 작용하는 핵점이 있습니다. 말하고 작용하고 행동하고, 크고 작은 걸 알고, 좋고 나쁜 걸 알게 하는 그 핵점 말입니다. 그래서 마음에서 모든 거를 거기다 맡겨 놓으면 그 핵점으로 통신이 돼서 각 부서로다가 하달이 되죠. 이걸 누진이라 그럽니다. 그 핵점을 누진이라고 한다면 바로 거기서 사대로 통신이 돼서 모든 공장에서 알게 되는 거죠. 어느 공장에 파워가 일어났다든가 고장이 났다든가 그러면 모두 한마음으로 작용을 해 줘서 그 공장의 직원들이 모두 일깨워지는 겁니다. 그렇게 한 공장에서 일어난 파워를 딴 공장에서 모두 협조를 해서 막아 주는 거죠.

여러분에게 병고가 많은 원인도 바로 그런 파워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파워는 안에서 일어날 수도 있고, 영계성으로 인해서 들어올 수도 있고, 유전성으로 인해서 들어올 수도 있고, 세균성으로 인해서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업보성 인과성, 이러한 것에서 부질없는 일들이 수없이 벌어져서, 요게 떠나고 나면 저게 들어오고 이게 들어오고…,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 좀 흥락하고 삶이 좀 싱그럽고 보람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자꾸자꾸 들어오니까 상이 찌푸려지고 그냥 신경질이 나고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화가 나고 옆에서 말하는 소리도 듣기 싫고, 이렇게 하게끔 만드는 장본인들이 바로 그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거기에 진짜로 맡겨서 누진을 통해서 통신이 되게 해야 합니다. 이 지구에도 레이더망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있습니다. 또 오신통을 비유해서 얘기하자면 천안통을 천체망원경이라고 말할 수 있고, 천이통을 무전통신기라고 말할 수 있고, 신족통을 팩시밀리라고 해도 되는데,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오는 거죠. 또 숙명통을 컴퓨터라고 해도 됩니다. 그리고 남의 마음을 아주 들여다보는 것처럼 잘 알 수 있는 것이 타심통인데 그것을 탐지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게 다섯 가지가 있는 것을 조절하는 것이 바로 누진통, 즉 시쳇말로 말하면 레이더망입니다. 바깥에 있는 것을 안으로 연락하고 또 안에서 일어나서 바깥으로 가는 거 연락하고, 중심을 잡아서 결정을 내려서 통신을 하는 소임을 맡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변명할 여지가 조금도 없이 우리의 몸과 마음, 모든 생활, 우주의 섭류 이런 것이 전부 같이 돌아갑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의심할 게 아니라 진짜로 믿고 맡겨야 합니다.

그래서 숙명통이다 컴퓨터다 이러는 것은, 컴퓨터에 그냥 과거에 살던 게 잔뜩 입력이 돼 가지고 그게 현실에 자꾸 꾸역꾸역 나오기 때문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그걸 컴퓨터로 비유합시다. 만약에 입력을 할 줄 안다면 그렇게 꾸역꾸역 나오는 것을 나오는 대로 그냥 입력을 다시 해 버리는 거예요. 어때요? 놓으라는 말이 바로 그겁니다. 입력이 돼서 자꾸 컴퓨터에서 나오니까 컴퓨터에다가 다시 입력을 해서 놔라 이겁니다. 그러면 앞서 입력된 게 없어짐으로써 팔자 운명이 바꿔지는 겁니다.

그래서 선지식들, 산 부처님들, 깨친 부처님들이 “고도 붙을 자리가 없고 집착도 붙을 자리가 없고, 멸이다 하는 것도 붙을 자리가 없고 도라는 언어도 붙을 자리가 없다. 이 모두가 그대로 여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육조 스님이 말씀해 놓으신 거를 저기다 제가 써 놓았습니다. 아래 위 다 떼어 버리고 그냥 요지만 썼습니다. 본래 자기 중심은 청정한 것입니다. 본래 자기 자성은, 본래 자기 마음 중심으로 일을 해 나가기 때문에 청정이라 그랬습니다. ‘한가운데 중’ 자를 써서 중심이 청정하다는 거죠. ‘본래 자성이 청정함을 알라. 여여함을 알라. 갖추어 가지고 있음을 알라. 자유자재함을 알라.’ 본래 그런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가르칠 때 모두 이것이다 저것이다, 이것이 정법이고 저것이 정법이다 이렇게 한다면 벌써 정법이면 사법이 들러붙고 사법에는 정법이 들러붙기 때문에 참선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그 마음은 둘이 아닙니다. 육조 스님도 “모습은 다를지언정 마음과 생명이 어떻게 둘이겠느냐.” 하셨습니다. 풀 한 포기도 생명이 있는 건데요. 그래서 “마음이야 어찌 둘이겠습니까?” 이랬습니다. 비구 비구니,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둘이 아니라 이 소립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옛 조사들의 뒷발자취만 쫓아가면서 미거한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밝은 세상인데도 미거한 소리를 하고 있어요. 여자는 성불 못한다는 둥, 비구니는 뭐 천도도 못한다는 둥, 비구니는 비구 앞에 삼배를 올려야 한다는 둥, 상황 따라서 용도에 따라서 모두 주어진 것이고 서로 주고받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그렇다면 비구는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비구니 속에서 나왔죠? 허허허. 안 그렇습니까?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태양계의 모두를 아버지라고 비유한다면 산하대지의 일체 만물을 길러 주는 것은 어머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산하대지의 일체 만물이 나고 자라는 도리를 모르니, 그렇게 말하는 분은 한번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 나와야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요. 여북하면 ‘자궁’이라고 합니까? 자식의 집이라 이 소립니다. 집의 도리를 모르니까 한 번 더 들어가서 구경을 하고 나와야 될 것 아닙니까? 하하하….

어쨌든 간에 거짓말을 해서 남이 이익 하다면 그건 거짓말이 아닙니다. 또 진실을 말해서 언짢을 일이라면 거짓말을 쓱 해서 양면이 다 좋게끔 하는 것이 참 좋은 법이죠.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모두 마음으로써 자기가 할 일을 자기가 지켜보고 누가 될 일은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소가 남의 파밭으로 들어가든 말든 그저 내버려 두지 말고 고삐를 쥐고 다스려라 이겁니다. 남의 파밭으로 들어가면 ‘아이, 똑바로 가야지!’ 하고선 고삐를 잡아채는 것이 바로 마음의 다스림입니다. 마음으로써 자기를 다스리는 과정입니다. 그 모두를 그렇게 잘 다스리면서 그저 정에다 놓으셔야 잘 돌아가죠. 모든 것을 한마음 가운데다가 탁탁 놓되, 안되는 거는 ‘안되는 것도 거기서 나오는 거니까 되게 할 수 있잖아!’ 하고 놓고, 잘되는 건 감사하게 놓고 이렇게 마음을 일으키면서 굴리면서 척척 놔야 시공이 없이 돌아가는 틈에서 그냥 잘 돌아가게끔 되지 않겠습니까?

따로따로 생각해서 ‘병고가 있으니까 스님한테 꼭 얘기를 해야 된다.’ 이러는 건 너무 무모한 생각입니다. 얘기를 들어 드리긴 합니다. 심부름꾼이 심부름을 해 드리려니까 들어 달라면 들어 드려야 하고, 해 달라면 해 줘야 하고, 같이 걸어 달라면 걸어 줘야 하니까요. 이것은 나라는 게 없습니다. 자유가 없는 게 아니라 나라는 게 아예 없어요. 여러분도 여러분 자체가 없어질 때까지 하셔야 됩니다. 그래야 조건 없는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조건 없는 사랑이요. 모두 사랑들을 해도 조건이 있는 사랑을 합니다. ‘내가 요렇게 요렇게 해 줬는데 조거는 안 그래!’ 하고 말이죠.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조건 없는 사랑을 하기 때문에 자비라고 합니다, 자비!

여러분도 지금 자식들한테 조건 없는 사랑을 하고들 계시죠. 여러분, 자식들한테 조건 있는 사랑을 합니까? 조건을 붙이고 줍니까? 조건이 하나도 없이 주지 않습니까? 자식이 물에 빠지면 그냥, 자기가 죽든 말든 그냥 더퍽 뛰어들어 끌어냅니다. ‘물에서 건져 주면 뭐 어떻게 한다’ 이런 거 없죠. 바로 그렇게 어머니가 자식들을, 아버지가 자식들을 생각하는 그 마음이 자비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마음과 자비는, 어머니 아버지가 자식들을 생각하는 마음이나 그 자비와 둘이 아니다 이런 겁니다.

또 하나 얘기할 것은, 우리 부모의 조상이나 부처님들의 조상을 둘로 보지 마세요. 살아나가는 데 엇갈립니다. 안 그렇겠습니까? 엇갈립니다. 이거는 부처님 조상 믿으랴, 육신을 낳아 주신 부모 조상들 위하랴. 이게 얼마나 귀찮습니까? 그런데 한마음으로 한다면 조상들도 아주 참답게 진짜로 한마음 안에 한자리 하게끔, 즉 말하자면 해탈을 시킬 수 있는 그런 도리가 있습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하시면서 제사를 지낼 때도 찹쌀로다 둥그런 떡 세 켜든지 한 켜든지 놓고 향, 물, 촛불, 이렇게만 해 놓으시고 합장 배례를 하시고 ‘한마음 주인공이시여! 모든 조상들의 마음과 일체제불의 마음과 모두가, 한마음 한자리 한도량에 모두가 운집을 하셨는데 뭐 따로따로 있겠습니까. 감사합니다.’ 하고 한번 해 놓으면 그뿐이지 뭐가 또 있느냐 이거예요. 그리고 자기가 마음으로 천혼문을 생각해서 그렇게 하면 그게 천혼문이라 이겁니다.

그러면 그 둥그런 떡이 말이에요, 삼라만상 대천세계의 ‘세계’란 말입니다. 위는 위대로 중간은 중간대로, 즉 대천세계 소천세계 중천세계를 다 먹이고도 되남아요. 하하하…. 그 떡이 되남아요. 아시겠소? 이것이 거짓인 줄 알지 마세요. 진짜 우리가 살아나가는 데에 ‘참 교묘하고 아주 조금도 빈틈없는 우리 삶의 보람이로구나!’ 하고 아시게 될 겁니다. 그러면 조상의 마음도 한자리가 되는 거죠. 상에다가 조금조금 차려 놓고선 ‘요거 잡수시오.’ 하고 어리석은 마음으로 하는 것보다도 이 삼천대천세계 모두를 자기 집으로 만들어 주고, 자기 먹을 걸로 만들어 주고, 자기 살 곳으로 만들어 준다면 ‘가는 족족 내 자리이고, 가는 족족 내 먹을 것이고, 내 거 아님이 없고 나 아님이 없으니 먹고 먹고 또 먹어도 남고 또 먹어도 또 남고 하는데 끝 간 데 없더라.’ 이렇게 되는 거죠. 그래야 올바른 거지 그저 상에다가 조금 차려 놓고 그저 요거 요거…. 이거는 어떻게 생각하면 자기가 미신이 됐기 때문에 미신을 외려 만들고 있는 겁니다. 자기가 진짜 ‘사람’이라는 두 글자로 불리고 있다면 진짜 사람으로서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 그런 도리를 몰라서는 안 되죠. 알아야 위로는 부모의 은혜를 갚으면서 묵은 빚을 갚고 아래로는 자식들에게 햇빛을 줄 수 있으니까요.

여러분이 전자에서부터 살면서 해 내려오던 그 관습이 있기 때문에 이사를 가도 무엇을 봐야 된다, 혼인을 해도 무슨 궁합을 봐야 된다 하는데 궁합들을 그렇게 잘 봐서 모두들 잘 사십니까? 네? 하하하. 그리고 이사 가는 날짜를 잘 봐서, 그렇게 손을 잘 봐서 애고도 없고 병고도 없이 다들 잘 사십니까? 내가 꼭 이사를 가려고 한다면 내가 가고 싶은 날, 식구들이 모두 노는 날, 내가 가고 싶은 그 날이 그냥 이사 가는 날이에요. 두 남녀가 봐서 ‘나하고 평생을 사랑할 수 있겠다.’ 이런 마음을 갖게 되면 그대로 궁합이 좋다고 생각하시고, 주위에서 데리고 살 것이 아니니 그냥 결혼시키시란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 사는 도리입니다. 그냥 엉거주춤하니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없다면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힌 노예죠, 뭐. 귀신 노예 사람 노예, 허허허…. 모두 노예가 돼 가지고, 보이지 않는 데서는 보이지 않는 대로 노예가 되고, 보이는 데서는 보이는 대로 노예가 되고, 이거 어떻게 합니까?

상에 밥 갖다 놓고 떡 갖다 놓고 돈 갖다 놓는 거 보고서 스님 되려는 사람은 천지에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저 부처님 한 분만 모셔 놓고 이렇게 하는 건 이러한 기복과 관습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수없는 나날을 지내 오며 관습이 아주 조잘이 조잘이 붙어서, 기복이 조잘이 조잘이 붙어서 여러분이 그냥 요기조기 갖다가 놓고 ‘칠성님, 명 길게 해 주시오. 독성님, 우환 없게 해 주시오. 지장님, 나를 좋은 데로 가게 해 주시오. 부처님, 잘살게 해 주시오. 관세음보살, 잘되게 해 주시오.’ 이러기 때문입니다. 관세음이라는 것이 무언 줄 아십니까? 이름이에요. 부처님의 마음으로 이름을 지어 놓은 겁니다. 동방에는 아촉불이요 서방에는 아미타요 이 세상 사바세계는 관세음이요 지천국에는 지장이라고 이름을 지은 거라고요. 이렇게 이름을 만들어 놓은 겁니다.

여러분이 한 가정에서 아버지 이름만 가지고 계십니까? 아버지 이름도 가졌죠, 할아버지 이름도 가졌죠, 남편 이름도 가졌죠, 형님 이름도 가졌죠, 사위 이름도 가졌죠. 아휴! 이름도 너무 많잖아요. 그 이름대로 “여보!” 하면 “왜 그래?” 하고선 그냥 자동적으로 남편 노릇 해 주는 겁니다. 그것도 뭐 걸림이 없어요. “아버지!” 그러면 “어, 너 왔니?” 하면서 자동적으로 남편이라는 건 없어지고 아버지가 금방 됐어요. 그렇게 나투어서 돌아가는 거 보세요. 자동적으로 말입니다.

그러면 부처님 마음은 어떻습니까? 부처님도 자동적으로 중생들이 ‘아휴, 병고에 이렇게 휘달리니 이 병 좀 고쳐 주세요, 부처님!’ 이러면 약사가 돼서 응신으로 나투어 주십니다. 또 ‘아이고, 살림살이가 늘지 않고 만날 망하기만 하고 죽겠으니 어떡합니까?’ 하면 그냥 관세음으로 응신이 돼서 나투어 주신다 이겁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 아버지나 어머니가 한 가정에서 살면서 그렇게 자동적으로 나투면서 이 노릇 저 노릇 다 하는 것처럼 부처님의 한마음이 그렇게 나투시면서 사시는 거다 이겁니다.

부처님의 깨달은 마음이 그렇다 이겁니다. 그러면 깨달은 마음이 죄 각각이냐? 그게 아닙니다. 이 세상에 외국 사람이든 한국 사람이든 막론해 놓고 깨달은 사람의 마음은 한마음으로 돌아간단 얘깁니다, 하나로! 그래서 하나로 돌아가기 때문에 어떤 거 할 때 나라고 할 수 없는 게 부처다 이겁니다. 없는 게 부처입니다, 없는 게. 공해서 시공이 없이 돌아가는 그 자체 불바퀴가 그냥 부처예요, 이름해서. 그래서 부처란 말은, 보세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아버지가 아들 노릇 할 때에 내가 했다고 하겠습니까, 남편 노릇 할 때에 내가 했다고 하겠습니까, 또는 자식 노릇 할 때에 내가 했다고 하겠습니까, 또는 형님 노릇 할 때에 내가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자동적으로 돌아가니까 공했다 이 소립니다. ‘색이 공이요 공이 색이니라. 모두가 둘이 아니게 나투면서 돌아가고 고정됨이 없으니 그쯤 알라.’ 자세히 얘기하자면 이렇다는 얘깁니다. 그렇게 나투면서 돌아가는데 나투며 돌아가는 분의 이름은 많지만 그 나투며 돌아가는 분은 하나예요, 하나! 하나가 여러 가지를 하는 거예요. 안 그렇겠습니까? 비교를 하자면 그렇다 이겁니다.

그래서 이 사바세계에는 관세음보살로 해 놨다 이겁니다. 여러분이 관해 보고 관해 듣고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돌아가는 이 자체를 관세음이라고 했습니다. 이름입니다. 이 세상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이름을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죠. 자기 끌고 다니는 자기 주인을 먼저 발견을 해야 찰나찰나 나투는 일체제불의 마음을 알 수가 있다는 얘깁니다. “모든 깨달음은 하나지 둘이 아니다! 그런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고?” 했단 말이에요. “하나로 돌아가는 건 어디로 돌아가는고?” “담 너머로 호박 넝쿨이 넘어가서 호박 열리는 까닭입니다.” 했답니다. “호박은 여여한가?” 하니까 “호박은 제 나무에서 무르익어서 맛이 좋습니다.” 하더랍니다. 이 도리를 여러분이 가정에서 모두 깨달으십시오.

말씀해 놓은 것이 모두 여러분의 길잡이가 되게 하고, 또 길을 따라서 이 공부를 하게 하기 위해서 관세음보살이니 뭐니 뭐니 전부 이름을 지어 놨지, 여러분이 바로 관세음보살이에요. 여러분이 그대로입니다. 여러분 하나가 가정에서 아버지 노릇 하고 남편 노릇 하고 사시는 것처럼 그렇게 이름은 많지만 다 여러분의 살림살이가 바로 부처님 법이에요. 여러분이 부처고요. 중생 속에서 부처가 나고 부처 속에서 중생이 나니 어떤 걸로 갈라놓고 중생이다 부처다 하겠습니까.

예전에 독립군이 총을 맞고 산에서 쓰러지니까 까마귀가 떼를 지어 “까욱까욱” 하고 와서 눈알도 빼 먹으려고 하고 이러니까 “까마귀들아, 나를 보고 비웃지 마라. 비록 이 모습은 쓰러지나 나를 파먹지는 못하며 나를 죽일 수는 없느니라.” 했듯이 말입니다. 참 여러분은 죽고 사는 게 없습니다. 죽는다 산다도 없습니다. 영원한 겁니다. 영원한 자기를 발견해서 사시려면 생활 속에서 꼭 ‘내 이 껍데기가 하는 게 아니라 마음의 주인이 하는 거다. 모든 재물도 내 것이 아니고 나는 관리인이다.’ 하고 사시란 말입니다. 관리인밖에 더 됩니까? 진짜 자기 겁니까? 관리인이죠. 관리를 어떻게 잘하느냐 못하느냐 여기에 달려 있는 거지 자기 게 아닙니다. 자기 거라고 한다면 슬금슬금 다 나가서 금방 곳간이 빌 겁니다. ‘흥, 나를 꽉 붙들어 매 놓으려고 그래?’ 하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나가니까요. 돈도 생명이 있고 돈도 마음이 있거든요.

그러니 여러분! 이 대구에 계신 여러분이 좀 더 밝게 지혜를 가지고 내 한마음을 믿고 발견하셔서 애고도 벗어나시고 병고도 벗어나시고 또 내 가정도 화목하게 이끌어 가시면서 사회도 나라도 이끌어 가세요. 남북통일도 그렇고 마음으로 규정지어서 한생각 낸다면 하지 못하는 게 없습니다. 모습이 있는 거는 걸려서 할 수가 없습니다마는 모습이 없는 마음은 지구 바깥으로도 벗어날 수 있고 달 세계도 한 찰나에 끌어다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공부를 해서 아시게 되면 내가 왜 이렇게 말을 해야만 하는지 그걸 아실 겁니다.

내가 이 세상에 나와서 잘살기 위해서, 여러분한테 얻어먹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생명과 모습, 그 마음이 내 마음 아님이 없고 내 고통 아님이 없고…. 어떤 때는 너무나 가슴아파서 울 때가 있습니다. 그쪽에서 울면 나도 웁니다. 우는 것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변소나 어디 가서 그거를 생각하면 아주 가슴이 아픕니다. 옛날에는 선지식들이 깨치면 모든 걸 벗어 버리고 편안하다고 했는데 나는 안 그렇습니다. 난 깨치지 못해서 그런지 몰라도요, 나는 아파서 우는 사람을 보면 같이 울게 되고, 즐거워서 웃는 사람을 보면 나도 즐거워서 웃게 되지 그렇게 되질 않습디다. 그래서 편안한 것도 없고 편안치 않은 것도 없습디다.

그냥 여러분과 같이 그 속에서 그냥 구르고 있는 자체입니다. 그러니 조금도 다르다고 생각 마시고 높다고 생각도 마시고 ‘저분은 깨달은 분이다.’ 이렇게도 생각지 마시고 여러분의 마음속에 같이하고 같이 공생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십시오. 나는 이날까지 높은 게 되려고 생각해 본 예도 없습니다. 못났든 잘났든 자기만이 자기를 끌고 다닙니다. 절대로 한데로 믿지 마십시오! 스님들의 고깃덩어리도 믿지 마시고, 그저 이끌어 주면 이끌어 주는 대로 세 가지가 똑바른가 보시고 이끎을 받으십시오. 말과 행과 뜻이 같으면 따라도 좋다 이겁니다. 그럼 오늘은….

※위 법문은 1992년 5월 24일 대구지원 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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