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축첩〉서 본 수행승 ‘초의’

초의 영정. 김호석 화백 작
초의선사, 추사제자들과도 교유
“산에도 삼매가 있음 알아”
“진실로 그 마음을 깨달아야”

올해는 초의선사가 열반한 지 꼭 150주년이 되는 해이다.
부처님의 탄생일을 경축하는 특집서 조선 후기의 수행승 초의와 관련된 자료를 살펴본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그의 열반 150주년에 즈음하여 초의학(草衣學)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기를 기원한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초의와 깊이 교유하며 영향을 주고받았던 문인 중에 추사 김정희의 제자 조희룡(1789~1866)이 초의에게 청교(淸交)의 증표로 써 보냈던 자료를 소개 한다.

 

초의선사(1786~1866)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학승(學僧)으로, 선교(禪敎)와 율학뿐 아니라 시ㆍ서ㆍ화(詩書畵)에도 능했던 인물이다.

 

특히 그는 대흥사에 전해진 선차(禪茶)를 복원함으로서 차 문화를 중흥할 토대를 구축했다. 그러므로 그를 한국의 ‘다성(茶聖)’으로 칭송하는 연유는 분명하다. 바로 사라져 가는 선차의 우수한 제조법을 복원했으며 이를 토대로 완성한 ‘초의차’를 매개로 하여 사대부들의 차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켰기 때문이다. 아울러 한국 차문화의 자긍심을 담아낸 〈동다송〉을 저술, 그의 차에 대한 안목뿐 아니라 그와 교유했던 인사들에게 우리 차의 우수성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이론적 체계를 갖춘 셈이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조선은 신분제도가 엄격했던 시대였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일부 유학자는 신분을 초월하여 승려들과 교유했는데 이는 다산이나 추사 같이 북학에 관심을 가졌던 인사들이었다. 이들은 인간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일로향상(一路向上)을 상보(相補)했던 자취를 남겼으니 이를 통해 진솔한 우정을 공감할 수 있다.

초의 또한 스승과 벗을 통해 수행과 예술, 차의 안목이 확충된 경향을 보인다. 사람이 인연을 통해 이상적인 삶으로 확장하는 존재이라는 점에서는 초의도 같았는데 이는 공감대를 형성하여 동락(同樂)을 이룬 흔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그가 운흥사에서 완호를 만난 것은 숙연(宿緣)이었다. 이는 초의의 일대사에 가장 큰 획을 긋는 일이었다. 초의의 인연의 연결고리는 완호에서 시작되어 다산으로, 그리고 유산으로 이어졌고 다시 추사로 연결된 것이다.

따라서 초의의 인맥은 대략 완호와 정약용 같은 사제 인연과 뜻을 공유했던 수행승들과 김정희, 정학연, 권돈인 등 같은 유학자로 나누워 볼 수 있다. 특히 초의는 김정희의 형제들 및 제자들과도 깊이 교유했다. 물론 정약용의 자제들과 손자들과도 깊이 교유했다.

특히 조희룡의 〈철축첩(鐵帖)〉은 그의 불교에 대한 이해와 초의와의 교유를 살펴 볼 수 있다. 원래 이 첩은 조희룡의 친필본 첩인데 초의에게 보낸 것이다. 이 첩 속에는 장시 4 편이 수록되었는데 지면 관계상 그 일부만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一庭花影晝冥冥 蒙烟橫斜硏山靑
忽驚尺素雲間墮 翰墨之氣貫竹?
忙手開緘還稽首 觀音寶像自亭亭
吉祥端嚴妙相具 足底靑蓮花更馨
道人海外盡理長 胸中萬象已?停
昔貌五百阿羅漢 筆力終能回滄溟
千里寄惠豈徒爾

뜰에 가득한 꽃 그림자, 낮인데도 어둑어둑
안개와 저녁놀에 씻긴 산, 더욱 푸르구나
한자나 되는 흰 비단, 홀연히 구름사이로 떨어져 놀랬고
붓의 기세, 죽통을 뚫었구나
급히 편지를 뜯어보니 도리어 고개가 숙여지고
관음보살의 모습, 스스로 당당하네
길상의 단아하고 엄한 모습, 오묘한 모습 갖추었고
발아래 푸른 연꽃, 다시 향내를 풍길 듯하네
도인은 해외의 궁구한 이치 다 갖췄구나
흉중에 만상은 이미 메밀꽃에 머물렀으니
옛적 오백나한의 모습이라
필력은 마침내 창해를 돌아 올수 있으리니
천리에 보낸 편지, 어찌 헛된 것이랴

조희룡의 <철축첩> 표지
실제 〈철축첩(鐵帖)〉에는 4편의 장시가 수록된 첩인데 그 첫 수이다. 소치 허련(小癡許鍊)이 해남으로부터 편지를 보내며 자신이 그린 관음상을 함께 부쳐왔기에 시로서 감사를 표한다(小癡道人 自海南貽書 兼寄自寫觀音像 以詩謝之)라는 부주(附注)가 있다. 따라서 조희룡은 초의뿐 아니라 허련과도 교유가 있었던 듯하다. 조희룡 자신 또한 그림에 재주가 있었으니 허련에 대한 관심이 각별했을 것이다. 특히 조희룡은 매화를 극히 사랑하여 사방에 매화 병풍을 두르고 매화 먹과 벼루를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스스로 자신에게는 매화벽(梅花癖)이 있다고 하였다. 그는 그림뿐 아니라 글씨도 잘 썼는데 거의 추사체를 방불했다.
다음은 〈철축첩(鐵帖)〉에 수록된 두 번째 시인데 그가 초의가 금강산 유람 중에 지은 시를 감상했다는 내용도 확인할 수 있다. 그 내용은 이렇다.

向道善男與善女 煩惱苦趣共欲除
稽首願乞金剛杵 吾生未窮天下書
誰將是境下箋 仙都佛界登楮墨
未聞自成白芙? 恐被風雨飄烟瀛
可惹遊仙問津情 環?冷冷無處所
只見雲霞無恙橫 發皇愧無大手筆
空向海內擬? 世間文字是臼?
安能象外可擧悉 若使千古通梯航
功德向此頌皇王 七十二家封禪事
玉檢金泥聚煌煌

도(道)로 향한 선남 선여
번뇌와 고통을 다 없애려고
머리를 조아려 금강저에 빈다
내 천하의 책을 다 보지 못했으니
누가 장차 이런 경지를 글로 쓸까
신선의 땅, 부처의 세계를 유생이 올라가
진흙같은 도랑에서 흰 연꽃 피웠다는 소식 듣지 못했네
비바람을 맞고 파도에 휘날릴까 두려워
유선에 숨을 수 있을지를 나루에 묻는 마음
댕그랑 패옥 소리 울려도 머물 곳이 없어
다만 노을 바라볼 뿐 마음대로 가지 못하네
황괴가 일어나도 큰 붓이 없어서
공연히 세상을 향해 무리지은 쇠파리처럼
세간의 문자란 오목한 절구 구멍이라
어찌 모양 밖을 다 들 수 있을까
만약 천고를 통하는 사다리와 배를 만든다면
여기서 황왕의 공덕을 칭송하리
칠 십 이가에 제사지내는 일
옥문갑에 번쩍이는 금니를 모으리라

그가 부주(附注)에서 말한 것처럼 “홀로 헐성루에 올랐습니다. 사람이 이 묘체를 증명할 사람이 없어서 이를 기록하여 포연상인에게 보내니 돌려서 초의선사에게도 보냅니다. 아울러 법교를 청합니다”라고 하였으니 초의에게 만남을 청하면서 보낸 것이다.

당시에도 초파일엔 세상의 선남 선여가 번뇌와 고통을 없애려고 부처님 앞에서 기도를 했던 듯하니 고래로 초파일은 성시(盛市)를 이룬 축제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만약 천고를 통하는 사다리와 배를 만든다면/ 여기서 황왕의 공덕을 칭송하리”라고 한 것이다.

이밖에도 “초의법사께서 금강산을 돌아보시고 쓴 시는 지금 저에게 있으니 때때로 다시 꺼내 읽었습니다. 해악에서 돌아 온 후 처음으로 산을 보는데도 삼매의 경지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조희룡이 〈철축첩(鐵帖)〉을 지은 시기가 추정할 수 있는 근거이다. 초의가 수홍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한 것은 1838년이다. 그러므로 이 첩은 대략 1838년 이후에 지은 듯하다.

한편 초의는 수행자로서 마음과 법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가 밝힌 법과 마음은 〈전수인증(傳授引證)〉에 자세하다. 이 글에 “천불이 심인으로서 마음의 도를 주고받는다는 것은 마음과 법일 뿐이다. 대저 마음을 사람이 가리킬 수 없고 법은 사람에 받을 수 없으니 마음을 깨달지 않을 수가 없고 법을 얻지 않을 수가 없다. 마음은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마음으로서 사람에 보여준다면 마음은 유에 속한 것이고 근원적인 법을 법으로서 사람에게 받을 수 있다면 법 또한 유에 속한 것이다. 마음과 법에 유가 있다면 보통과 한 가지이지만 해탈을 얻을 수는 없다”(千佛授受以心印心之道者 心與法而已矣 夫心不可指人 法不可授人 心不可不悟 法不可不得 心非有心 若以心示人則心屬有 法原無法 若以法授人 法亦屬有 心法若有則同凡而不得解脫)고 하였다. 즉 마음과 법은 유무에도 걸림이 없어야 해탈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의는 “마음과 법이 만약 무의 경지에 있다면 성을 따라 그 작용이 없어지는 것이니 그러므로 아는 것이다. 마음은 사람에게 있고 법은 스승에게 있다면 마음은 종자와 같고 법은 비와 이슬과 같다. 사람은 오직 스스로 깨달아야하고 스승은 법으로서 전해 주는 것이다. 진실로 스스로 그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도를 전하는 자는 비유한다면 마치 종자를 심지 않고 밭을 가는 것과 같다. 비록 스스로 그 도를 깨달은 듯하여도 법이 없는 자는 결국 종자를 심어 발아했지만 거칠고 조잡할 뿐이다.”(心法若無則隨聖而無其作用 故知 心在人而法在師 心如穀種 法如雨露 人惟自悟 師以法傳 苟不自悟其心而傳道者 譬如無種而耕耘 雖然自悟其道而無法者 終成種發而荒穢)라고 하였다. 따라서 마음과 법은 서로 나눌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 깨달음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을 단호하고도 분명히 밝혔던 셈이다. 초파일에 즈음하여 그가 우리에게 준 경구는 이처럼 명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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