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차문화 엿보기

작품 <물질2 (190x95)>
수묵화와 차는 감정을 나누고 정신적 공유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상호 지향점이 다르지 않다.
수묵화가 일획 일필로 생명력을 표현하고 녹차는 한 번만 우려내 맛·향을 극점으로 몰고 간다.

화가에게 ‘녹차’란 어떤 것이며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림 그리는 일을 지속해 온 나는 이 단순한 물음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고 살아왔다. 그만큼 나에게 녹차란 일상이었다. 녹차 산지, 만드는 방법, 찻잎을 따는 시기, 잎의 모양과 크기 같은 것에 구애 받지 않고 그저 형편 닿는 대로 구하여 마시곤 했다. 그러다 몇 년 전, 녹차의 향과 색, 맛과 같은 것들이 내가 추구하는 예술 세계와 맞닿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선 녹차 나무는 특성에서부터 그 의미가 각별했다. 녹차 나무는 뿌리가 직근(直根)이다. 직근은 잔뿌리가 거의 없는 채로 나무의 지상 높이에 약 5배 정도 깊이로 내려있다.

이런 사실은 물질 이상의 상징성을 갖는다. 차나무가 지니는 이러한 특성은 인간이 취하고자 하는 이상적인 품성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녹차는 고결한 정신을 추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삶속에 깊이 스며있다.

또 녹차 나무는 근본을 준수한다. 씨앗으로 발아한 나무는 생장 조건을 기억이라도 한 듯 옮겨 심을 경우 살 확률이 매우 낮다. 차나무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몸을 바꾸는 인간들의 행위를 생태적으로 거부한다. 이런 점은 한국인들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삶의 방식, 즉 의리와 명분 그리고 지조와 절개와 일치한다.

녹차는 만드는 방법이 독특하다. 찻잎이 지니는 자체의 수분만으로 마지막 숨을 다스린다. 어린 순이 지닌 강한 생명력을 뜨거운 불기운을 이용해 순간적으로 잎 속으로 감추게 한다. 이렇게 건조시켜 완성한 덖음 차이다. 잎의 성장점에서 나오는 독하고 사나운 기운은 덖음 과정을 통해 맑고 순한 기운으로 변환된다. 이런 녹차의 제다 방식은 중국의 차가 ‘향’을, 그리고 일본의 차가 ‘색’을 중시한 것과 달리, 향과 색 그리고 맛을 중시했던 한국 문화의 고유성이다. 뜨거운 기운으로 생잎을 덖고 이를 문지른 뒤 다시 100도 이하의 온도에서 건조시켜 완성한 것은 다시 물로써 생명력을 재생시킨다. 여기에는 ‘불’과 ‘물’이란 ‘상극의 조건’이 만나 ‘상생의 원리’로 뒤바뀌는 생명의 원칙이 내재되어 있다.

녹차는 뜨거운 물로 짧은 시간에 우려낸다. 완성된 차는 자신을 알아보는 이에게 마음을 열어 모든 것을 헌사 한다. 단 한 번으로 전체를 이야기한다. 본질이 궁극의 선택인 것이다.

녹차는 뜨거운 가슴을 차로 식혀준다. 녹차는 내면을 고양시키기 위한 수행의 수단으로써 의미가 있지만, 대화를 통한 소통의 계기도 만든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이런 점에서 차는 인격과 품격의 도구이면서 사회적 순기능을 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차나무는 10월과 11월 사이에 꽃을 피운다. 이런 사실은 일반적인 자연의 이치와 조금 다르다. 대부분의 나무가 잎과 꽃을 떨어트릴 때 꽃을 피우는 것도 그렇고, 열매 맺힘이 일 년 뒤에 이루어진다는 점도 그렇다. 깨달음이란 시절이 무르익을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 기다림은 영원에 가까운 시간일지 모른다. 요즘과 같이 조급한 것이 일상이 되어 버린 때에, 차나무가 찻잎의 언어를 통해 무르익기 기다리라는 것을 가르치는 듯하다.

나는 그림을 그리며 불현듯 수묵화의 본질이 녹차의 덕성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묵화는 정신 표현을 최우선으로 한다. 사실보다 사의를 추구하는 예술 형식이다. 사물의 외형을 넘어 사물 밖에 드리워져 있는 정신을 그린다. 먹 스스로는 저절로 뜻을 얻지 못한다. 선을 통해 움직이고 변화해가는 우주 생성 변화의 원리를 궁구하는 것이다. 수묵화가 드러나지 않고 내재된 정신의 영역을 형상화 한다는 점과 숨겨진 차나무 직근의 곧추 선 특성, 즉 지층의 다양한 유기물을 빨아들여 이파리를 통해 생명을 분출한다는 점은 유사하다. 이런 요소는 곧고 바르게 맑음을 지향하며, 몰입해 들어가는 선비나 수행자에게 또 다른 가르침이었을 것이다.

수묵화를 그릴 때 사용하는 먹은 청·적·황·백·흑, 이 다섯 가지 색을 모두 합쳤을 때 나온다. 먹색은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통합시키는 힘이 있다. 그래서 수묵화는 사실적인 묘사보다 함축적이고 여운이 있는 사의적인 세계를 특징으로 한다. 수묵이 정신의 힘을 표현하는 데 유용한 방식이 되어왔음을 동양회화사가 증명한다. 더 이상 변하지 않는 먹빛을 통해 우주의 생성·변화 원리를 그린다는 것과 차나무가 근본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상호 일치한다.

작품 <불이(125x111)>
수묵화는 ‘흑과 백’이라는 상반된 것을 이용하여 조화를 찾는 조형예술이다.
‘흑’은 ‘먹’이다. 먹은 나무나 식물성 기름을 태울 때 생성되는 그을음을 통해 만들어진다. 이 그을음은 물을 만나면서 비로소 형상과 뜻을 얻게 되는데, 불과 물이라는 상충되고 상반된 것이 만나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것이 바로 수묵화의 기본이치다. 녹차는 불기운으로 응축시킨 것을 물로써 풀어내는 것이다. 수묵화와 차는 ‘반대의 조화’란 측면에서 매우 유사하다.

수묵화는 한 번의 붓질로 대상을 장악한다. 일필이 곧 전부이며 완성인 것이다. 대상 표현은 한 번의 붓질을 허용할 뿐 덧칠이나 부가설명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고도로 수양된 자가 아니면 좀처럼 접근하기 어렵고, 그 정신의 진수를 얻기 쉽지 않다. 수묵화가 일획 일필을 통해 생명력을 표현한다는 점과 녹차에서 한 번만 우려내어 맛과 향을 극점으로 몰고 간다는 것은 흡사하다.

수묵화는 형상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한다. 그림은 보는 자의 학식과 경험, 그리고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면서 후대와 연결되기도 한다. 객관화되고 일반화되면서 개성이 드러나는 그림은 시대와 지역 그리고 역사를 초월한다. 수묵화와 차는 감정을 나누고 정신적 공유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상호 지향점이 다르지 않다.

수묵화는 고요하고 안정된 마음으로 먹을 가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붓을 잡는 시간보다 사물의 본질을 꿰뚫기 위한 생각을 통해 형상을 구체화시킨다. 수묵을 통해 형상을 표현하면서 더 이상 보탤 수도, 지울 수도 없는 경지까지 밀고 가는 것은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수행과정과 닮아 있다. 먹과 종이는 추운 겨울에 만든 것을 최고로 친다. 추운 계절이 아니면 좋은 종이와 먹은 만들 수 없다. 차나무가 차가운 시기에 꽃을 피우고 일 년이 지난 뒤 열매 맺는 것은 수묵화 재료가 갖는 정신성과 같다.

나는 녹차가 삶과 예술의 영역으로 들어온 뒤 자연스레 차계 사람들과 만나는 기회도 많았다. 현재 한국의 차계에는 자신만의 주장이 옳고 자기가 만든 차만이 정통이라며 주장하는 사람이 많아 시끄럽다. 서로를 시기하고 질투함은 물론 상호 배척하며 자신의 의견만이 옳은 것이라는 주장이 난무하다. ‘차’는 자신의 마음을 갈고 닦는 수행의 수단으로써 뿐 아니라 대화를 나누는 순기능이 더 큰 자리를 차지한다. 차를 마시면서 차 맛과 향이 이렇다 저렇다 다담을 나누는 데 집중해야 한다. 남과 대화를 갖는다는 것은 대화의 폭을 넓혀 자신의 의식을 넓게 확장시키는 계기가 된다. 1970년대 국학 붐과 함께 도래한 녹차 바람은 차인들 스스로 무위화 시킨 것은 아닌지 반추해 볼 일이다.

또 하나 의문이 있다. 여러 해 동안 스님들을 만나면서 귀한 음료로 녹차를 대접 받았다. 그러던 것이 어느 때부턴가 스님들의 세계에서 녹차 대신 보이차 열풍이 불었다. 선방 수좌들이 해제비를 받고 달려간 곳이 보이차 판매점일 정도로 가히 열광적이었다. 그러다 원하는 양질의 보이차를 구하기 어렵고 진위조차 의심되는 현실을 목도하게 되면서 이 사재기 열풍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지금은 원두커피 열풍으로 뒤바뀌었다. 커피믹서 기계가 있는 절집 찾기가 어렵지 않다. 심지어 걸망 속에 커피 분쇄기를 가지고 다니기까지 한다. 원두의 산지와 종류 그리고 맛과 향의 특징 등 전문가의 수준까지 육박해 있음도 확인했다. 이제는 차의 정신이 아니라 형식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된 것 같다. 세속화는 승속에도 예외가 없다.

글로벌 시대다. 그러나 국제화를 표방하며 불교의 세계화를 부르짖었던 큰스님들, 이를테면 성철·일타·법정 스님 같은 분이 홍차·보이차·커피를 가까이 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심지어 차를 멀리 하며 식탐조차 끊어버린 이유가 알고 싶어졌다.

꽃 아닌 것 없이 푸름이 천지에 가득한 시절, 이 물음을 안고 남도를 찾았다.
김호석 수묵화가 작품 <물질2(190cmx95cm)>. 수묵화 특유의 번짐과 세밀한 묘사가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한 번의 붓질로 대상을 표현하는 수묵화와 한 번의 우려냄으로 맛과 향을 극점으로 끌어 올리는 녹차는 닮아 있다.

작품 〈불이(125x111)〉처럼 수묵화와 차는 정신적 공유를 추구하는 동일한 가치 지향점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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