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축특집] 스승과 함께한 부처님오신날 이야기

  

구법의 나침반, 인생의 버팀목  ‘스승’
불교에서 스승만큼 중요한 존재는 없다. 초조 달마대사는 “만약에 선지식(善知識)을 만나지 못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낸 것”이라고 했다. 부모에게 육신을 받았다면 스승에게서는 법을 받아 진리의 삶을 살게 되기 때문이다.

부처님오신날이면 스승에 대한 존경과 그리움이 더욱 커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제자 스님들은 스승과의 인연을 행운이라 여기고 다음 생에도 사제의 인연으로 만나 못다 한 공부를 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고독한 구법행의 길에 버팀목이 되었던 스승의 삶을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마음의 위안이 되기 때문이다.

부처님오신날 큰스님 제자들이 들려주는 스승과의 인연담을 통해 불자 개개인도 새로운 마음가짐을 갖기를 기원한다. 큰 스승의 부재라고 까지 하는 시대라고 모두가 한탄하는 지금, ‘중생이 아프면 부처도 아프다’는 가르침처럼, 어리석은 중생과 함께하는 후학들의 활약도 기대해 본다. 정리=신성민·노덕현 기자
 

 
성철 스님과 원택 스님
부처님오신날 한글법어의 숨겨진 이야기
성철 스님과 원택 스님
1981년 성철 스님이 종정에 추대되시고 첫 부처님오신날을 맞았을 때의 일입니다. 총무원에서 큰스님께 법어를 내려주셔야 한다고 연락이 왔지요. 큰스님이 불러서 부리나케 달려갔습니다. 큰스님이 내민 종이 한 장을 보니 법어가 쓰여져 있었습니다. 아뿔사! 그런데 선방에서 쓰는 한문으로 된 상당법어인 것입니다. 외람되지만 큰스님께 불호령이 떨어져도 한 말씀 드려야겠다고 작심했습니다.
“큰스님, 이제 스님께서는 산중 스님이 아니십니더. 모든 국민들에게 부처님을 대신해 한말 씀 하시는 것입니더. 스님 쉬운 한글로 법어를 내려주셔야 합니더.”
“무슨 소리하노. 내가 평생을 한문으로 살아왔는데”
 
가야산 호랑이로 유명한 큰스님이 벼락이라도 치실까 걱정하며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데 성철 큰스님은 한참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쏘아보는 화등잔 같은 눈길이 따갑게 느껴지는 순간, 큰스님은 말문을 여셨습니다.
“그래? 그라만 내가 다시 한 번 써보지.”
 
처음 저는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큰스님이 다시 방에 들어가셨습니다. 마음으로는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큰스님은 다음날 아침 또 부르셨습니다. 그래도 반은 한글, 반은 한문이었습니다. 내친김에 다시 간청을 올렸습니다.

“스님, 나머지 한문도 한글로 해 주실 수 없습니까.”
“어허 그놈 참 사람 힘들게 하네. 한문체를 버리려니 허전하고 글에 힘이 안 실리니 어쩌노. 다시 생각해보자.”

큰스님은 그 다음날 다시 법어를 내리셨습니다. 한글법어의 시작이었습니다.

“모든 생명을 부처님과 같이 존경합시다. 만법의 참모습은 둥근 햇빛보다 더 밝고 푸른 허공보다 더 깨끗하여 항상 때가 묻지 않습니다.…”

한 문장 한 문장 고민하고 고민하여 나왔을 그 법어를 보는 순간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습니다. 한글법어에 대한 재가불자와 일반인의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특히 1982년 봉축법어 ‘자기를 바로 봅시다’는 종교를 떠나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저는 어려운 주문으로 맞선 상좌의 고언을 받아들여주신 그 큰 공덕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감사하는 마음에서 2014년 8월 〈성철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찬불가를 출간하고, 2015년 12월에는 큰스님 법어를 가사로 청소년 랩음악경연대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이번 부처님오신날에는 이 대회 노래가 CD로 나올 예정입니다.

법정 스님과 덕조 스님
스스로 엄격한 우리시대 어른
법정 스님과 덕조 스님

불임암에서도 그렇거니와, 스님께서는 번잡한 것을 싫어하셨고, 그 누구에게도 신세를 지는 것을 멀리 하셨습니다.

“신도들에게 부담 주지 말거라. 그리고 특히 시은을 무서워 하거라.”

항상 큰스님은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당신께서 1974년 불일암 지을 때 있었던 일을 얘기하곤 하셨습니다. 당시 스님은 조금밖에 되지 않는 원고료로 불일암 불사를 진행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한 재력있는 불자에게 불사를 도와달라고 했답니다. 긴 시간이 지나고 그 불자님이 ‘참 죄송하다’며 거절했습니다.

큰스님은 이를 두고 “그 거절의 말을 들으며 ‘그 분이 얼마나 곤란했을까’ 생각했다”고 하셨습니다. 큰스님은 이후 절대 불자들에게 신세를 지지 않겠다고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고 합니다.

이런 큰스님의 확고한 마음이 있으셨기에 부처님오신날이면 전해지는 길상사 ‘자비의선물’이 나오게 됐습니다. 이는 신세를 진 이웃에 대한 보은의 마음에서 시작됐습니다.

1997년 길상사가 창건되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습니다. 길상사가 생기자 성북동 일대에는 교통대란이 발생했습니다. 주말이면 신도들이 몰려 이웃주민들이 힘들어 했습니다.

“이웃에게 민폐를 끼치니, 안되겠다. 곧 있으면 부처님오신날인데, 자비를 말로만 펴지말고 실천하자꾸나. 멀리 말고 가까운 이웃부터 돕자꾸나.”

이웃에 대한 배려는 현재 유명한 길상사 음악회로 이어졌습니다. 종교행사가 아닌 마을잔치로 이웃들을 초청했습니다. “종교는 벽을 없애고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웃과 더불어 즐기며 느끼고 함께 나누는 것이다.”
음악회는 사실 큰스님에게 곤혹스러운 것이기도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스님께서는 강원도 암자에 묵으셨고, 길상사에서는 하룻밤도 주무시지 않으셨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웬 만해서는 밤중에 거동하시는 일이 없었습니다. 강원도에서 오셔서 저녁 7시에 길상사 점등 후 진행되는 음악회를 보시고 다시 강원도로 향하셨습니다. 한번은 봉축음악회가 끝나고 스님의 안색이 너무 안좋아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밤 10시 쯤이어서 암자에 가면 새벽이었습니다.

상좌 입장에서 스님의 건강이 걱정됐습니다. 스님께 오늘만큼은 주무시고 가시는 것이 어떠신지 여쭈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나 자신과 한 약속을 한번 어기면 한번이 두번이 된다”고 하시며 주저없이 암자로 떠나셨습니다. 당신의 약속에 대해 스님은 ‘당신의 질서’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스스로에게 엄격했던 모습때문에 아직도 은사 스님의 삶의 향기가 오래남아 있습니다.


재석 스님
蓮紙 ‘후후’ 불었던 그 시절
재석 스님과 일진 스님

은사, 재석 스님! 제가 스님께 출가한 때는 1970년이죠. 지금으로부터 48년 전입니다. 부처님오신날이 다가오니, 어려웠지만 그리운 그 때가 생각이 납니다. 출가 당시 저는 은사 스님과 함께 서울 만법사에 있었습니다. 정월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사찰을 찾습니다. 지금은 대중들이 모여서 합동으로 정월 불공을 올리지만, 당시에는 개개인이 따로 했습니다. 그래서 낮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정월 기도를 올렸습니다. 이를 ‘독불공(獨佛供)’이라고 했죠.

낮에 불공이 끝나면, 밤부터는 본격적인 부처님오신날 준비에 들어갑니다. 연등 만들기를 시작하는 것이죠. 연등의 기본인 연꽃과 연잎을 이루는 종이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일단 까만 OB 맥주병을 얻어다가 따뜻해지도록 아랫목에 넣어둡니다. 그리고 미리 종이집에서 재단해 준비한 분홍색, 파랑색 연등 만들 종이들에 물을 촉촉이 적셔두고 밟으면 종이에 힘이 생깁니다. 이것을 따뜻해진 맥주병에 대고 낚시줄로 감아 눌러주면 연잎 주름이 잡힙니다.

일진 스님
이렇게 준비한 연꽃 종이들을 부처님오신날이 다가오면 하나하나 불어서 떼어냅니다. 그리고 끝을 말아서 연꽃과 연잎을 모양을 만들고 연등 만들기에 들어갑니다. 사형, 사제들과 함께 하루에 200~300개는 만들었습니다. 이런 모든 일들은 은사 스님의 지휘 아래 일사분란하게 이뤄졌습니다.

부처님오신날 당일이 되면 은사 스님께서는 법회를 봉행하고 사찰에 오는 불자들을 대접하느라 바쁘셨습니다. 그러다보니 여유있게 관등놀이를 하고 있을 상황이 못 됐습니다. 정월부터 이어진 강행군이 끝나면, 스님께서는 하루 산행을 통해 그간의 고단함을 잊을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이제는 제가 스님의 나이가 됐습니다. 부처님오신날이나 사중 행사가 있을 때 학인들에게 은사 스님의 이야기를 합니다. 공양주는 어떻게 살아야 하며, 대중들을 어떻게 모셔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스님은 학교를 많이 나오거나 유명한 스님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전쟁 이후 어려운 시절 본인이 배를 곯을지언정 대중을 위해 탁발을 하고, 훌륭히 공양주를 사셨던 숨은 수행자이셨습니다. 또한, 제자들이 훌륭한 스님이 될 수 있도록 인재불사에도 힘쓰셨습니다.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는 것도 은사 스님의 원력과 지원 덕분입니다.

매년 부처님께서 오시면 이제는 열반하신 은사 스님이 생각이 납니다. 남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셨던 스님과 함께 했던 1970년대는 제 인생 가장 애틋했던 기억이자 수행자로서 살아가는 힘이 되고 있습니다. 그립고 보고 싶습니다. 은사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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