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식 인도박물관장·시인

김양식 인도박물관장이 박물관 입구 1층 로비에 전시된 대형‘법륜’앞에 서 환하게 웃고 있다. 자신의 애장품중에 하나인 이‘법륜’은 산스크리트어로‘달마 차크라’라고 하며, 만(卍)자와 더불어 불법을 나타내거나 부처님 형상을 대신하는 상징으로 사용된다. 또한 모든 중생에게 영향을 미치는 보물이란 의미를 갖고 있기도 하다. 사진=노덕현 기자
 
타고르에 대한 존경 가교 역할로 인도에 관심 갖기 시작
40년간 왕래하며 인도의 희귀한 문화 유물 수집에 진력
구순 바라보는 나이 무색할 정도로 ‘영원한 현역’ 과시
동시대를 산 위안부할머니들 위한 헌정시 및 음반 발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룬 성지 등이 있는 부처님의 나라 인도. 해마다 한국 성지순례객들이 많이 찾는 나라. 그래서 혹자는 아직도 현재 인도에는 불자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다고 착각을 하는 곳이다. 우리나라와 이 인도의 인연을 거슬러 올라가 살펴 보니 가야국을 건국한 김수로왕과 인도 아유타국 공주 허 황옥과의 결혼이 출발점이었다. 그 후 한국에 불교가 전래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인도의 흔적이 우리 역사 속에 짙게 채색돼 있다. 인도의 남부 첸나이 지방엔 특히 엄마, 아빠, 아리랑 등의 단어와 비슷한 말이 있다고 한다. 또 구자라트 지방에는‘아이스케키’라는 말까지 같다는 게 인도서 오래 살다 온 사람들의 말이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언어, 풍습, 종교 등이 혼재한 인도는 나라 자체가 박물관처럼 생각된다.

특히 인도의 세계적인 시성인 타고르는 일제강점기 우리에게 ‘동방의 빛’이라는 시로 용기를 주었다. 일본 방문중 춘원 이광수의 한국 방문요청에 건강이 좋지않아 오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 하면서 그는 시(詩)를 대신 써 보냈다. 1929년 3월 28일 일본 고베 강연 후 나가사끼서 건강을 추스르며 썼다고 한다.‘동방의 빛’이라는 짧은 시(詩)지만, 억압받던 일제강점기 우리 국민들에게는 큰 희망의 역할을 했다. 특히 일본으로부터 받은 백작 작위를 반납한 김윤식처럼 영국의 작위 수여를 반납한 타고르를 보고, 만해 한용운 스님은‘인도에도 김윤식 같은 사람이 있었구만’하고 칭찬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평생을 이 타고르에 대한 존경과 사랑으로 인도의 모든 것을 사랑한 불자 시인이 있다. 김양식 인도박물관장(86)이다. 인도를 40여년 간 왕래하며 모은 인도유물로 2011년 인도 박물관을 개관했다. 서울 서초동 남부 터미널 근처 광림빌딩 2층에 위치한 박물관은 인도의 생활문화와 관련된 유물 뿐 아니라 초등생이나 유치원생을 위한 문화 체험 공간도 있었다. 5월 2일 김 관장을 인도박물관에서 만났다. 1층 입구에 전시된 법륜을 보며 2층 메인 전시관에 올라가니 마치 고대 인도에 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복도 제일 잘 보이는 곳에 크게 걸려 있는 타고르의 사진은 김 관장이 평생 시의 스승으로 존경하는 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인터뷰를 한지 10분도 지나지 않아 예감은 적중했다. 타고르는 그의 멘토였다. 김양식 관장은 인물전기학회서 타고르 시인에 대한 강연을 했었는데 이때 새로운 내용이 공개되기도 했다. 시인(詩人)인 줄만 알던 타고르의 그림이 인도서 국보급 대접을 받는다는 이야기는 인도 대사조차도 처음 듣는 일이라면서 놀라워했다고 한다.

80대 중반인 김 관장은 나이를 무색케 할 정도로 아직도 영원한 현역이었다. 소녀 같은 감성은 끊임없는 시심을 발동시켰다. 동시대를 살았던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시를 짓고, 곡을 붙여 음반을 만들어 전국에 무료로 배포하기도 했다. 특히 지난 3월 20일에는 W스테이지 안국에서 ‘애국시 낭송과 가무의 어울림’이란 주제로 ‘어허 恨이로다 恨이로다’‘어머니, 어찌 그리도 슬피 우시는가’ 등 위안부 할머니를 위한 노래를 낭송하고 부르기도 했다.

김양식 인도박물관장은? 1931년 서울서 태어난 김양식 인도박물관 관장은 이화여대 영문과와 동국대 대학원 인도철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1969년 월간문학 ‘제 1회 신인상’ 시부문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정읍후사〉 〈초이시집〉 〈새들의 해돋이〉 〈서초동 참새〉 〈풀잎이 되어 풀잎이 되어〉 〈쓸쓸하지 않은 사람들〉 〈만남의 향기〉 〈하늘 먼 자락에 구름 날리면〉 등이 있다. 수상 경력으로는 〈86 한국현대시인상〉 〈세계시인대회상〉 〈세계뮤즈상〉 〈제 3회 이화문학상〉 〈한국펜문학상〉 등이 있다. 특히 김 관장은 인도 문화의 이해와 전파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2년 인도 정부로부터 최고 권위의 시민상인 ‘파드마 슈리상’을 받았다. 또한 김 관장은 1981년 한국인도문화연구회를 창설했으며, 타고르의 저서를 포함한 다수의 인도 문학 작품을 한국어로 번역했다. 국내 대표적인 1세대 발레리나인 김혜식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의 친언니이기도 하다.
 

“어허, 恨이로다 恨이로다/ 한평생 피멍든 恨이로다/꽃다운 나이에 꽃도 피기전/왜놈에게 끌려가 총칼 앞에 무릎 꿇고/산 넘고 물 건너 수십 만리 놈들의 전쟁터에서/갖은 행패로 죽을 고비 수없이 넘고 넘기며/내 평생 씻지 못할 깊고 깊은 속병 들어/울다 울다 피눈물 흰 치마폭에 펑펑 쏟았구나”(어허 恨이로다 恨이로다 中에서)

 

“어머니, 어찌 그리도 슬퍼 통곡하시는가/어찌 그리도 피멍진 아픔 끝내 풀지 못하고/한평생 깊은 어둠속에 남몰래 숨어들어/왜놈에게 짓밟혀 산산 조각난 몸뚱이를 겨우 추스르시고/피눈물 쏟아내며 이리도 恨 많은 세상을 사셨는가”(어머니, 어찌 그리도 슬피 우시는가 中에서)



김양식 관장에게 불교란? “살아있는 한 반드시 숙명 처럼 따라야 하는 큰 스승”

후반기 시 주제는 불교
기도와 발원으로 뽑은 정수
사유와 편린 두 줄 시어로
불교사상의 함축 메시지

45세 동국대 인철과 입학
1975년 인도 첫 방문 후
인도관련 공부 필요성 느껴
대학원서 우파니샤드 연구
한국 최초의 타고르 관련논문

2011년 인도 박물관 개원
70세까지 30여 회 인도 답사
40년간 3천여 점 유물 수집

타고르 국제대학 불사 진력
한국간 건립 위해 MOU체결
200평 규모 도서관 건축 예정

 

“내 詩는 세월에 흐트러진 마음 씻어낸 흔적들”

불교는‘내 영혼과 시심의 안식처’라고 밝히는 김 관장에게 시세계와 불교, 인생 전반에 대해 들어봤다.

▲시 중에 불교가 반영된 대표적 작품을 꼽자면 어떤 것이 있습니까?

“삶의 단상처럼 2행으로 쓴 시가 있습니다. 시집 제목이 〈하늘 먼 자락에 구름 날리면(2009)〉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두 줄로 쓴 이행시들 100여 편 들어 있습니다. 내 마음을 다스리면서 기도와 발원으로 뽑아낸 정수라 할 수 있죠. 순간 순간을 머물게 한 사유의 편린들을 두 줄의 글귀로 남겨 온 것을 한자리에 모아 봤습니다. 마치 강가 뽀얀 모래밭에 남겨 놓은 물새들의 발자욱 처럼 말이죠.”

▲이 작품이 독자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독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정적인 분위기가 지극하고, 심금을 울리는 이행시라고 반응해 주었습니다. 메시지는 불교사상의 함축입니다. 보이지도 않고 잡을 수도 없는 세월에 밀고 밀리며 흐트러지기 쉬운 마음과 정신을 산골짝 맑은 샘물로 씻어 청정으로 향하고자 한 흔적들이죠.”

▲그런 시들을 쓴 계기는요? 기도를 열심히 하는 등 종교 생활 때문이었나요?

“그렇다고 할 수 있죠. 불교 속에서 전하는 가르침은 아름답고 고귀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행동하고 삶을 사는 건 그 가르침을 따라가지 못하지요. 당시 여든에 가까운 내 나이에 다 털어버리고 정말 맑게 살고 싶다는 발원을 했습니다. 머릿속에 스쳐오는 생각들이 깔끔하고 고귀했기에 저 자신도 아주 기뻤습니다. 불교서 전하는 가르침과 힌두교 경전, 특히 리그베다 같은 경전과 하나 되는 감동에 스스로 눈물을 흘린 적도 있습니다.”

▲이 울림은 시의 멘토인 타고르의 ‘범아일여’ 사상과도 일맥상통 한가요?

“그렇습니다. 범아일여 사상은 바로 리그베다서 나왔습니다. 타고르에 대한 연구가 국내엔 미흡하고, 저의 연구도 마무리 짓지 못해 아쉽습니다. 그러나 그를 연구하는 동안 마음 깊숙이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인도는 언제부터 본격 방문 했는지요?

“1975년도 인도서 열린‘아세아 시인대회’에 조병화 시인과 함께 참가한 것이 인도의 첫 방문입니다.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쏟아지더군요. 어려서부터 동경한 그 땅을 마흔이 넘어서 방문한 감동이 컸었습니다. 그래서 체류하는 열흘 동안 불편하더라도 인도 현지인처럼 생활했지요. 현지의 훌륭한 학자, 작가, 시인들 틈바구니서 지낼 좋은 기회를 놓치기 싫었습니다. 인도인들과 똑같이 손으로 밥을 먹고 지내니 그곳 사람들이 호의적으로 대해 주셨지요. 그리고 유명 여류시인이 내 시를 언급했을 때에는 너무도 행복했습니다.”

1986년 인도 발미키 페스티벌때 열린 세계시인대회의 한국대표로 참석한 김양식 관장이 인도 대통령과 인사 나누는 모습.
▲인도를 보고 받은 인상은 어떠셨나요?

“인간답게 살고 있다는 점. 아직도 현대문명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생각과 생활이 감명 깊었습니다. 조금만 맛봐선 인도를 알 수 없단 생각에 한국에 오자마자 당시 유일한 동국대 인도철학과 대학원에 입학해 2년 동안 정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여기서 타고르 작품에 녹아있는 우파니샤드 사상을 연구했습니다. 한국서 연구된 최초의 타고르 석사논문이라고 합디다.”

▲인도서 활발한 수집활동을 하며 우리나라에 인도를 알리려고 생각한 계기는?

“타고르에 관한 책을 꾸준히 탐독하며 1980년대 후반부터 인도에 눈 떴습니다. 인도 마을을 둘러보면 그 자체가 박물관처럼 보여요.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인도에 대해 너무 몰랐습니다. 아직도 가난한 사람들이 많은 나라로만 인식합니다. 속내를 들여다보면 정신적으로 우리보다 훨씬 크고 방대한 생각들을 하면서 삽니다. 거기에 매료 됐지요.”

▲인도 박물관이라는 숙원 사업을 이루셨는데 40여 년 간 컬렉션의 수는 어느정도이며, 만들게 된 계기가 있으시다면 소개해 주세요.

“컬렉션 한 수는 약 3천 여점이 됩니다. 타고르는 인도 콜카타의 유복한 가정서 나고 자랐습니다. 나중에 돌아와 고향 흙바닥 위에 학교를 만들었지요. 당시 그는 교실이라는 교육환경을 감옥으로 불렀습니다. 아이들을 움직이지 말라고 야단치는 감옥말이죠. 그래서 비스바 바라티(숲속의 학교)를 만들었지요. 나뭇가지에 작은 칠판을 걸어 놓고 유치원서부터 대학원까지 나무 밑에서 받는 교육을 이상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학교를 세우고 싶었는데 그러진 못하고 수집으로 방향을 틀어 박물관을 열었습니다. 2011년 7월에 개관해 올해로 벌써 만 5년이 되는 군요. 어려운 일이지만 꼭 해내야겠다는 사명감을 가졌습니다.”

▲수집에 어려운 점도 많았을텐데요. 특히 재정적인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그나마 3~40년 전에는 수집품 값이 쌌습니다. 지금은 물가가 많이 올라 더 힘들어졌지만 나에게 주어진 업이기에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어려움을 헤쳐 나갔습니다. 수집하느라 먼길을 가면서 시간에 쫓겨 점심을 굶어도 배고픈 줄 모르고 열정 하나만으로 버텼지요. 주로 회의와 시낭송 등 문학행사에 초청돼 인도 여러 지역을 둘러 보는 와중에 수집을 다녔습니다. 그렇게 내 나이 70세까지 30여 회 정도 인도를 방문하며 수집을 했습니다.”

▲앞서 소개한 대로 인생의 후반기 작품인 〈하늘 먼자락에 구름 날리면〉에 불교가 많이 투영됐다고 했는데, 인생을 많이 살고 난 이후에 다가오는 불교는 이전과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나를 버리고 욕심을 내려 놓으라는 불교의 가르침이 더욱 와 닿더군요. 남들이 수집할 돈으로 재테크나 보석에 관심 갖으라고 권했을때도 이상하게 그런 쪽으로는 욕심이 없었어요. 〈법구경〉과 특히 〈임제록〉이 주는 가르침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홑껍데기 옷을 걸쳐도 수행자들이 얼마나 행복했을까 생각도 했지요. 불경을 읽으면서 나 스스로를 반성할 기회가 많아져 오히려 과욕을 부리지 않게 되더군요.”

▲최근에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음반도 내서 화제가 되셨는데요? 그분들을 위한 시를 쓰게 된 계기는요?

“수요집회에 몇 번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시를 지어 일본어와 영어로 번역하고 출력해서 참석자들에게 나눠줬습니다. 할머니들께 막말 했던 도쿄 도지사에게도 일본어로 직접 편지도 썼어요. 물론 답장은 없었습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내 종교를 존중하는 만큼 다른 이의 종교도 존중하라고 했는데요.

“저도 동감입니다. 마땅히 남의 종교도 존중해야 합니다. 과거 일부 개신교인들이 불상을 부순 것과 같은 일이 되풀이 돼서는 안 됩니다. 인도사람들은 힌두교임에도 절에서 향을 피우고 경건하게 절을 올립니다. 불교와 다 같은 뿌리라고 말하는 인도인들의 얘기에 가슴 뭉클했던 기억이 납니다.”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해 주신다면요.

“최근, 타고르 국제대학에 한국관을 건축키로 하고 MOU 체결을 했습니다. 중국학관, 일본학관은 이미 있는데 한국관이 없다는 사실에 열불이 나 팔을 걷어 붙였습니다. 5억여원을 기부해 200평 규모의 멀티정보도서관을 지어주기로 했습니다. 산티니케탄(평화의 마을)에 있는 비슈바 바라티(타고르 국제대학, ‘숲속의 학교’라는 뜻)에는 한국인 유학생도 많이 있습니다. 그 학생들을 위해서라도 끝까지 불사를 마무리 할 것 입니다.”

▲마지막으로 선생님이 생각하는 불교를 한마디로 정의하신다면요?

“내가 살아있는 한 반드시 따라야하는 숙명적인 큰 스승이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불교는 단지 종교의 대상이 아닌, 뜻을 따를 수 있는 큰 스승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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