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모열전- ⑧ 여찬(呂贊) 스님

혜희·금문을 계승한 직계 제자
문헌 통해 활동 시기·지역 가늠
경기·영서 중심으로 작품 분포
포항 보경사 거주하며 활동해와
주로 목조불상 조성 불사 참여

18세기 전반 여찬 스님의 만든 대표작 1711년 영동 영국사 목조보살좌상. 나무로 만든 보살상으로 오른쪽 어깨에 완만하게 사선을 그린 대의 자락이나 단순화 된 옷주름이 특징이다. 사진제공=김춘실 충북대 교수
18세기 전반에 중부지방인 경기(京畿)와 영서(嶺西)에서 활동한 여찬(呂燦, 呂贊, 麗贊) 스님은 17세기 중반을 대표하는 혜희(惠熙) 스님과 17세기 후반에 활동한 금문(金文)의 계보에 속하는 조각승(彫刻僧)이다. 여찬 스님은 스승 금문 스님과 마찬가지로 주로 나무로 불상 등을 제작하면서 중수·개금하였다. 현재 여찬 스님이 수화승(首畵僧, 화승의 우두머리)이 되어 만든 목조불상은 전국에 걸쳐 3건 10여 점이 조사되었다. 

아직까지 여찬 스님의 생애와 조각승이 된 배경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지만, 불상에서 발견된 발원문과 불화 화기(畵記) 등을 통하여 스님의 활동 시기와 지역, 조각승 계보, 불상 양식 등을 추정할 수 있다.

여찬 스님은 금문 스님을 도와 1706년 2월 2일부터 5월 27일 이전까지 경기 안성 칠장사 지장전에 봉안한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 등을 제작할 때 12명 가운데 8번째 언급되어 보조적인 역할을 하였다. 스님은 1708년 3월에 경북 포항 보경사 괘불도 중수 때 사찰 내 거주한 것으로 적혀 있다.

그리고 5월에 불화승(佛畵僧) 인문 스님이 충남 청양 장곡사 아미타후불도(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를 조성 할 때, 조상화원(造像?員)으로 언급되어 별도의 불상을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여찬 스님은 수화승으로 1711년에 충북 영동 영국사 대웅전 목조삼존불좌상(현재 목조보살좌상 1구만 봉안)을 제작한 후, 1713년 2월에 충북 괴산 봉학산 소마사 목조여래좌상(아산 오봉사 소장)을 중수·개금하면서 니금(泥金)을 시주하였다. 또한 스님은 1722년에 개인이 소장한 목패를 만든 것으로 보아 나무를 직접 조각한 소목장(小木匠)임을 알 수 있다.

또한 1726년 4월에 수화승으로 강원 삼척 태백산 지장암 목조지장보살좌상(삼척 삼화사에 봉안되었다가 없어짐)을 제작하고, 1729년에 강원 고성 유점사 대종을 고쳐 만들 때(改鑄) 화원(?員)으로 참여하였으며, 1741년 7월에 경북 성주 선석사 명부전 불상(오도전륜대왕상만 남아 있음)을 조성하고, 경남 창녕 관룡사 시왕도 중 오도전륜대왕도 조성에 송주(誦呪)로 참여하였다.

그후 여찬 스님은 1744년 4월에 경남 고성 옥천사 시왕도(오도전륜대왕) 조성에 시주를 하고, 1746년에 서울 봉은사 목조사천왕상을 제작하면서 복장물도 시주하였다. 따라서 현재까지 밝혀진 여찬 스님의 활동 시기는 1706년부터 1746년까지이다.
 
여찬 스님이 1726년 4월에 만든 강원 삼척 태백산 지장암 목조지장보살좌상으로, 1970년대 중반까지 삼화사에 봉안되었지만 현재는 없어졌다. 사진제공= 진홍섭 교수 논문서 사진 인용.
이런 문헌을 통하여 여찬 스님은 1670년대에 태어나 1690년대부터 금문 스님 밑에서 보조화승(補助畵僧)으로 활약하다가 1710년대부터 1740년대까지 수화승으로 불상과 불교공예품 등을 제작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1708년에 포항 보경사 괘불도 중수에 사내질(寺內秩)로 언급된 것으로 보아 보경사에서 거주하였음을 알 수 있고, 1713년에 충북 괴산 소마사 불상 중수·개금에 조각승과 시주자로 참여한 것을 보면 괴산이 고향이나 출가 등 밀접한 관련성이 있던 지역으로 추정된다.

스님은 1741년 이전에 종2품(從二品) 문무관의 품계에 해당하는 가선(嘉善)의 공명첩을 이름 앞에 쓴 것으로 보아 국가적인 사업에 참여하거나 국가에서 발급한 공명첩을 구매했을 가능성도 있다. 
 
여찬 스님의 조각승 계보는 법령(-1615-1641-)→ 혜희(-1640-1677-)→ 금문(-1655-1706-)→ 여찬(-1706-1746-), 취습(-1706-1711-), 삼인(-1693-1713-) 등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여찬 스님은 그가 불상을 제작한 지역이 충북 영동, 충남 청양, 강원 삼척, 경기 안성, 서울 강남 등의 사찰이나 암자에 불상을 제작하거나 중수한 것으로 미루어 그의 활동 지역이 중부 지역에서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천 스님이 만든 불상 가운데 현존하는 대표적인 작품은 영동 영국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 내 수미단 위에는 목조삼존불좌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본존과 지장보살좌상은 근래 제작된 작품이지만, 좌측 목조보살좌상은 전형적인 조선후기 보살상이다. 이 보살상의 대좌에 1711년에 ‘조각승 여찬이 만들었다’고 적혀 있다.

목조보살좌상은 전체 높이 80㎝, 무릎 너비가 52.5㎝로, 조선후기 제작된 중형 크기이다. 보살상은 화염문(火焰文)과 화문(花文)으로 장식된 높고 커다란 보관(寶冠)을 착용하고 있다. 보살은 얼굴을 앞으로 약간 내민 자세를 취하고, 신체에서 얼굴이 차지하는 비율은 1:0.3 정도이다. 이러한 신체비례는 17세기 전·중반에 제작된 보살상과 비교해 보면, 신체에 비하여 얼굴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진 것이 특징이다.

타원형의 얼굴에 반쯤 뜬 눈은 눈꼬리가 약간 위로 올라갔고, 코는 콧등이 평평한 삼각형을 이루며, 입은 살짝 미소(微笑)를 머금고 있다. 이 보살상은 17세기 후반에 색난이나 단응 등이 제작한 보살상보다 어깨와 무릎 폭이 좁은 편이다. 양손은 따로 만들어 손목에 끼우는 구조로, 오른손은 가느다란 엄지와 중지를 둥글게 맞대어 손바닥이 밖으로 보이고,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다.

바깥에 걸친 대의는 오른쪽 어깨에 반원형으로 걸친 후 팔꿈치와 복부를 지나 왼쪽 어깨로 넘어가고, 반대쪽 대의는 왼쪽 어깨를 완전히 덮고 내려와 복부에서 오른쪽 어깨를 덮은 편삼과 겹쳐져 있다.

특히, 왼쪽 어깨에서 수직으로 늘어진 대의 자락 상단에 사선으로 대의자락이 접힌 표현은 17세기 중반에 활동한 조각승 혜희 스님의 계보를 이어 17세기 후반에 활동한 마일(摩一) 스님이나 금문(金文) 스님이 제작한 불상에서 볼 수 있는 요소이다. 하반신의 대의처리는 네 겹으로 접힌 주름이 밑으로 완만하게 접혀 물결이 일렁이듯 펼쳐져 있다. 이와 같은 보살상의 대의 처리는 17세기 후반에 충북과 경북 북부에서 주로 활동한 조각승 금문의 계보에 속하는 조각승이 제작한 불상에서 볼 수 있지만, 금문의 기년명 불상과는 하반신을 덮은 대의 자락의 끝단 처리가 다르다.

영동 영국사 불상의 대좌 바닥에 적힌 제작 관련 묵서. 화원으로 여찬 스님과 벽한 스님 등이 적혀 있다. 사진제공= 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 제공.
보살상 뒷면의 처리는 목 주위에 대의(大衣)를 두르고, 대의 자락이 길게 늘어져 있다. 보살상이 앉은 대좌는 중대에 모란문 등을 투각한 팔각대좌 위에 연화좌를 놓는 구조로, 연화좌의 바닥 면에 조성시기와 조각승을 알 수 있는 묵서가 적혀 있다.

그밖에도 여찬 스님이 만든 불상 중에서 현재 없어진 강원 삼척 태백산 지장암 목조지장보살좌상이나 서울 봉은사 목조사천왕상이 있다. 그 가운데 봉은사 목조사천왕상은 크기, 자세, 지물, 착의법 등에서 기존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사천왕상과 다른 조형성을 가진 특이한 불상이다.

여찬 스님과 그 계보 조각승이 제작했다고 추정되는 불상은 충북 제천 무암사 목조여래좌상, 충북 청양 봉안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목조대세지보살좌상 등으로, 이들 불상은 양식적으로 18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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