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불교 명상의 의미 ④
컴퓨터 게임에 열중한 모습은 하나의 대상에 몰입되어 있는 명상의 특성과 유사한 듯 보이지만, 이때의 마음 상태는 신경계를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을 살펴보았다. 그러니까 탐욕, 분노, 무지를 멈추고 고요한 상태에서 하나의 대상에 온전하게 집중된 상태를 지향하는 명상과 달리, 흥분으로 들떠 있는 상태를 경험하면서 계속해서 더 많은 쾌감과 흥분을 누리고자 하는 모습에서 명상에 내재된 특성과는 거리가 있음을 확인해보았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명상의 특질은 ‘마음이 그 어떤 감관대상에도 구속되지 않음’(解脫)을 추구한다는 것’ 또는 ‘탐욕, 분노, 무지 따위가 마음을 그르치지 않아서 온전한 평온을 누리고 있는 상태’(涅槃)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곧, 계율과 더불어 불교명상은 해탈과 열반이라는 불교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의 공부 영역이라는 것이다.
이 말에 따르면 불교 명상이 해탈과 열반을 이루기 위한 또 하나의 공부영역인 계율과 동일한 위상을 지닌다는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나아가 지금까지 계율 정신으로 설명해온 ‘계학(戒學)’은 명상의 원리와 실제에 대한 이론체계인 정학(定學)과 동등한 위상을 지니고 있다는 설명이며, 이 점은 세 번째 공부 영역인 ‘지혜의 갖춤을 지향하는 사유체계’(慧學)의 위상도 마찬가지로 동일 선상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이란 이와 같은 ‘계정혜(戒定慧)’ 세 가지 공부에 동일한 가치를 두어 어느 하나도 소홀하게 여기지 않는 태도에서 그 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계정혜’ 삼학(三學)의 위상인 것이다.
특정한 스승을 만나 특정한 명상의 방법을 익혀 그것만이 수행이고, 불교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여기는 태도가 생겨난다면 이는 또 다른 문제를 낳게 된다. 물론 명상은 한 개인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체험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정한 하나의 명상법이 다른 것보다 처음부터 우위에 있다는 주장을 사실로 만들어주지 않는다. 그러한 주장을 펼치려면 바로 그 체험이 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인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니까야>에 따르면, 하나의 수행이나 명상법이 가치가 있을 경우 ‘탐욕과 분노와 무지의 그침 또는 소멸’ 여부가 하나의 기준이 된다. 따라서 ‘탐욕과 분노와 무지의 그침 또는 소멸’을 지향하는 가치를 최우선으로 삼아 그 사람의 일상을 불교적으로 말하고, 불교적으로 생각하며, 불교적으로 행동하는 것으로 꾸려간다면 그것이 바로 수행인 것이다. 하나의 특정한 방법을 익히는 것은 그 다음의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