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 詩 100수 쓴 속작가… 유불 교유 즐겨

사신 요구도 단번에 해결한
速作·多作 능력 갖춘 문장가
시험 代作해 한직 머물러도
도인 풍모로 승려들과 교유 

차천로(車天輅, 1556~1615)는 조선 중기 문장가로 한호(韓濩), 최립()과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칭송되는 인물이다. 그의 자는 복원(復元), 호는 오산(五山), 난우(), 귤실(橘室), 청묘거사(淸妙居士)를 썼다.

그는 출중한 글재주로 선조의 총애를 받았지만 평생 하급관직을 전전하며 고단한 삶을 살았다. 연유는 과거 시험 대작(代作) 사건과 개성출신이라는 지역적 한계 때문이다. 조선이 건국 된 후 개성 출신의 과거 정지이유는 다분히 정치적이었다. 이중환(李重煥, 1690~1756)택리지태조께서 공양왕의 선양을 받아 수도를 한양으로 옮겼는데 고려의 신하였던 세가와 대족들은 신하로 섬기고자 하지 않아 모두 남고 따르지 않았다. 그들이 사는 동네를 두문동(杜門洞)이라고 하였다. 태조께서 (이들을) 미워하여 백 년 동안 (개경출신) 선비와 자제의 과거를 정지시켰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원래 그의 가문은 고려의 명문거족이었지만 조선이 건국된 후 멸문의 화를 입었다가 세종 때에 부친 차식(車軾)이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가면서 점차 가세가 회복되었다고 한다. 특히 그의 부친과 아우 운노(雲輅)는 모두 문장에 뛰어났기에 북송의 삼대 문장가인 소순(蘇洵), 소식(蘇軾), 소철(蘇轍) 삼부자에 비견되었다. 이런 사실은 홍만종(洪萬宗, 1643~1725)순오지(旬五志)차식 삼부자의 문장은 미산의 삼소와 같다(車軾三夫子之文章 猶眉山之三蘇)”고 한 것에서 확인된다. 당시 차식 삼부자의 문장이 얼마나 출중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1577년 알성문과에서 병과에 급제해 개성교수(開城敎授)를 지냈다. 알성시(謁聖試)에 정자(正字)로 있었을 때에 고향 사람 여계선(呂繼先)의 답안을 대작해준 일이 발각되어 국문을 받았다. 선조실록1910월에 선조는 차천로의 대작 사건을 유림의 천만년 동안 씻을 수 없는 수치로 간주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그의 재주를 아껴 삼년정배(三年定配, 삼년동안 유배됨)만을 내렸을 뿐이다. 당시 사람들이 모두 사형에 처해질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조치였다. 이뿐만이 아니다. 선조의 그에 대한 배려는 세심하였다. 김득신의 종남총지(終南叢誌)에는 명주에 부임하는 북병사(北兵使)에게 차천로를 당부할 정도였다고 하였다. 그가 158811월경에 유배지에서 풀려나 승정원으로 복귀한 것도 선조의 배려였다.

▲ 차천로가 교유했던 오대산 상원사의 전경.〈사진제공=상원사〉

그의 글재주는 얼마나 대단했던 것일까. 결론적으로 그는 속작(速作)뿐 아니라 다작(多作)에도 남다른 재주를 가졌다고 한다. 남용익(南龍翼, 1628~1692)호곡시화(壺谷詩話)“(차천로) 자신이 말하길 만리장성에 종이를 붙여 놓고 내가 말을 달려 글을 쓴다면 만리장성이야 끝이 있겠지만 나의 시는 끝이 없을 것(自言貼紙於萬里長城 使我走筆則城有盡 而我詩不窮云)”이라며 차천로의 호언장담을 증언하였다. 또한 글재주 하나로 거둔 그의 외교적인 성과는 그의 행장(行狀)에 자세한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국 사신 주지번이 평양성에 들어와 회고시(懷古詩)100수를 지어 날이 밝기 전에 올리라 하였다. 밤이 짧아 시를 지을 수 있는 자가 없었다. 백사 이항복은 오산이 아니면 감당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는 좋은 술 한 동이와 병풍 한 틀, 한석봉이 (시를) 쓰기를 청하였다. 술 십여 잔을 마신 후 병풍 안으로 들어가 한석봉이 종이를 펴고 붓에 먹을 찍어 준비하자 그가 큰 소리로 시를 읊는데 물이 솟고 바람이 부는 듯했다. 밤이 깊어지기 전에 시 100수를 다 지었다. 닭이 울기 전에 (주지번에게) 나아가 올리니 중국 사신이 불을 밝히고 다 읽지도 않았는데 손에 잡았던 부채를 두드려 부서졌다. 우리나라의 문장이 중국에 유명해진 것은 그의 공이 컸다(天使朱之蕃入箕城 使製懷古詩百韻 未曉以進 方短夜 無可能者 李白沙公曰 非五山 無可當之 公請旨酒一盆 大屛一座 韓石峯筆 痛飮數十鍾 入屛內 石峯展紙 濡筆臨之 公卽高聲大唱 水涌風發 夜未半 百韻已成 鷄未唱進呈 天使秉燭讀未訖 所把之扇盡碎之 我東文章之著於中國 五山之力居多)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명나라 사신의 횡포는 대단했던 듯하다. 하룻밤 사이에 시 100수를 지어 바치라는 사신의 말은 거역할 수 없는 강대국의 위세였다. 백사 이항복도 조선이 자랑하는 문장가였지만 이 요구를 감당하기엔 부담이 되었던지 차천로를 천거하여 사신의 요구를 일거에 해결하였다. 실제 명나라 사신 주지번의 이런 무례한 요구는 조선 왕실의 권위를 무시하고 조선의 선비를 발아래 두려는 속셈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에 굴복할 조선이 아니다. 선비의 도리는 학문을 갈고 닦는 일이기에 대내외적으로 어려웠던 시기에도 선비의 규범은 사라지지 않았다. 물론 차천로의 재주야 하늘이 낸 것이지만 그를 길러낸 토양은 조선의 사회적인 여건이라 하겠다.

그가 승려들과 교유했던 여정은 문집을 통해 확인된다. 오대산 상원사와 금강산, 문수사(文殊寺), 지족사(知足寺) 등을 유람했고 설감(雪鑒), 성민(性敏), 신찬(信贊) 이외에도 이름을 밝히지 않은 승려들과 교유했던 흔적이 보인다. 특히 행주의 새 절과 정토사 중창불사를 위해 행주신찰권선문(幸州新刹勸善文), 정토사중창모재권선문(淨土寺重募募財勸善文)을 지었다는 사실이 돋보인다.

그가 1593년에 지은 시를 가져온 성민(性敏) 스님에게 화답한 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삼생의 바위에서 삼생의 꿈을 꾸니
(三生石上三生夢)
일편의 산 끝, 작은 구름이로다
(一片山頭一片雲)
자재는 응당 백업을 내보내는 것일 뿐
(自在應輸白業)
진여를 어찌 현문에 숨길까
(眞如何用隱玄文)
산속의 사찰에다 일신 살 곳 정하니
(禪枝慧窟身方定)
욕해와 천상의 길이 이미 갈라졌네
(慾海空天路已分)
일찍이 원공 찾아 절에 들어가길 구하니
(會逐遠公求入社)
진징군에 미치지 못함을 마음으로 알았네
(心知不及晉徵君)

▲ 차천로 글씨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미 그는 불교의 삼생을 요해(了解)했으며 유불의 아름다운 교유 호계삼소(虎溪三笑)로 알 수 있었다. 진여와 자재, 백업, 현문 등의 불교 교리에도 자유자재했던 것은 독서 때문일 것이다. 일필(逸筆)삼생의 바위에서 삼생의 꿈을 꾸는이치를 드러내 일편의 산 끝, 작은 구름에 짝을 맞춘 그의 시는 분명 공 도리를 터득한 이의 말일게다. 그가 말한 자재(自在)란 걸림이 없는 세계이다. 이미 그는 마음의 번뇌가 떠난 경지를 이룬 선비였던가. 그러기에 진여를 숨길 필요가 없다고 했을 것이다. 더구나 그는 속진이 사라진 곳, 깊은 산 속에 위치한 사찰에 한 몸을 의지했기에 속세와 천상이 나누어지는 경계를 알았던 것이다. 그와 시를 주고받았던 성민 스님을 동림사의 혜원법사에 비유한 의도나 자신을 도진징군(晉徵君), 즉 도연명(陶淵明)에 은근히 견주어 본 종구(終句)는 유불교유의 깊이를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이밖에도 그가 취중에 산승(山僧)의 시축(詩軸)에 쓰다라는 시에서도 유불 교유의 단단함을 이리 표현하였다.

창려(한유)가 서문을 지은 건 문창 때문이고
(昌黎作序緣文暢)
광록(안연지)이 시를 쓴 것은 혜휴를 위해서라
(光祿題詩爲惠休)
늙은이 몽당붓을 사양하지 않으니
(老子不辭拈禿筆)
고승이 한사코 무심한 마음을 물어 보네
(高僧剛解問虛舟)
청천에 구름 걷자 비로소 비가 멎었고
(雲開碧落初收雨)
수목에 바람 이니 가을이 다가왔네
(靑林政値秋)
취해서 초가집에 누웠다가 다시금 궤에 기대어
(醉臥茅還隱)
가만히 남악을 바라보니 환하게 수심 사라지네
(靜觀南岳豁窮愁)

당시 시에 밝았던 승려들이 자신의 시축에 명망이 있는 선비의 제발(題跋)을 받는 건 당시의 시류였던 듯하다. 당대의 대문장가로 척불론(斥佛論)을 주장했던 한유도 문창 승려에게 송부도문창사서(送浮都文暢師序)를 지어 주었고 안연지(顔延之) 또한 혜휴(惠休)를 위해 시를 지었다. 그러나 그 자신은 몽당붓처럼 변변치 못한 사람인데도 고승이 찾아와 허주(虛舟, 텅 빈 배)를 물었다는 것이다. 그의 경지는 바로 청천에 구름 걷자 비로소 비가 멎었고/ 수목에 바람 이니 가을이 다가왔네와 같다. 이미 허주처럼 텅 빈 그는 도학자의 풍모를 지닌 듯하다. 산인(山人) 신찬(信贊)이 술을 가지고 찾아왔기에(山人信贊 携酒見訪)에는 승려와의 깊은 교유가 드러난다. 이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스님은 내가 벽처에서 빈한한 걸 알고서
(沙彌知我索居貧)
글 배우는 사람처럼 술 들고 찾아 왔네
(載酒還同問字人)
꽃잎 질 때 문을 닫고 서책을 덮었더니
(門掩落花抛簡牘)
석양 질 때 석장 짚고 속세를 방문했네
(錫飛斜日訪風塵)
나른하게 완적처럼 눈을 돌려 부화한 세상 보며
(回阮眼看浮世)
한가롭게 은산과 이 신세를 비웃었지
(閒對殷山笑此身)
춘광()에 보답할 기회 응당 있을 테니
(報答春光應有地)
취중에 내뱉은 말 바로 내 진심일세
(醉來披豁是吾眞)  

그를 찾아온 신찬 승려는 예의가 바른 수행자였다. 그러므로 제자가 스승을 찾아올 때처럼 봉물(奉物)로 술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더구나 지는 꽃을 감상하던 한가로운 그에게 찾아온 객은 바로 신찬 승려였다. 그러기에 나른하게 완적처럼 눈을 돌려 부화한 세상 보며(回阮眼看浮世)/ 한가롭게 은산과 이 신세를 비웃었지(閒對殷山笑此身)”라는 것이다. 이는 정겨운 유불교유의 현장을 눈으로 보는 듯하다. 이 시에 완안(阮眼)”이란 고사(故事)세설신어(世說新語)()나라 완적은 예절에 구애를 받지 않고 청안(靑眼)이나 백안(白眼)으로 사람을 대하였다. 속된 사람을 보면 백안으로 대하다가도 혜강()이 만취(滿醉)하여 거문고를 가지고 찾아오면 매우 기뻐하면서 청안으로 대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술을 가져온 신찬을 혜강에게 비유하였다. 신찬을 뜻이 통하는 지기(知己)라 여겼던 그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취중에 진심을 전하는 관계, 그와 신찬은 이렇게 뜻이 통했던 지기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허주의 깊은 경지를 말없는 말(無言之言)”로 전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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