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함월사 조실 우룡 스님

월간 <법공양> 법문보시로 이루는 큰 복

사람들은 흔히 행복하기 위해 산다고 말한다. 물론 그 행복의 기준은 제각각이지만 그것을 달성하면 정말 행복해질까? 혹은 내 옆에 있는 새장은 들여다보지 않은 채 파랑새를 찾아 헤매기만 하는 건 아닐까? 그래서 작복종교인 불교는 항상 복을 지으라고 강조한다. 경주 함월사 조실 우룡 스님은 불교신행연구원의 월간 <법공양>(불기2560) 4월호에 보시로 이루는 큰 복이라는 주제로 법문했다. 스님은 마음을 내지 않기 때문에 복을 짓지 못하는 것이라며 우리 삶의 터전 그대로가 복 밭이니 작은 것부터 복 짓는 데 노력하라고 당부했다. 정리=윤호섭 기자

▲ 우룡 스님은… 1933년 일본에서 태어나 한국으로 돌아와 1947년 해인사에서 고봉 스님을 은사로 출가, 1955년 동산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1963년 김천 청암사 불교연구원을 비롯해 화엄사ㆍ법주사ㆍ범어사 등에서 강사를 역임했다. 수덕사 능인선원, 직지사 천불선원, 통도사 극락선원 등 제방선원에서 정진했다.
보시, 재물로만 하는 것 아냐
돈 없이도 하는 7가지 보시
작은 것부터 적극 실천할 때
우주법계 이치 따라 복 받는다

 

보시 복 닦아야 가난 면한다
인간은 누구나 복을 좋아합니다. 참으로 복 받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복은 누구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우주법계가 우리에게 그냥 복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복을 받을 수 있는가? 복을 짓고 복을 닦아야 합니다. 복을 지어야 복을 받고, 공덕을 닦아야 공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대우주법계의 이치요 삶의 법칙입니다. 특히 보시를 잘 해야 부유하게 사는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면 보시의 복을 제대로 닦지 않아 가난하게 생활하는 분들이 예상 밖으로 많습니다. 그리고 그분들 중에는 가난하기 때문에 보시할 생각조차 하지 못해 더욱 불행한 삶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와 관련된 한 편의 이야기를 음미해봅시다.

부처님의 십대 제자 중의 한 분인 가섭존자는 어느 날 사위성으로 탁발을 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외롭고 가난한 무의탁 노파를 보게 되었습니다. 노파는 한평생 밥을 먹은 것보다 굶은 숫자가 더 많았고, 먹더라도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했습니다. 가섭존자가 지혜의 눈으로 관하였더니 노파는 7일 뒤에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저 노파는 전생에 한 번도 제대로 된 복을 짓지 못해 평생을 비참하게 살아왔구나. 현재의 상태로 죽으면 박복한 과거 때문에 다음 생에는 더 힘든 삶을 살게 되리라. 복을 짓도록 해주자.’

이렇게 뜻을 정리하고 노파에게 청했습니다.

시주를 받으러 왔습니다.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 할머니의 물건을 직접 보시하십시오.”

그러나 노파의 집은 바람조차 막을 수 없을 만큼 허름하였고, 옷이라고는 입고 있는 것이 전부였으며, 먹을거리라고는 이웃집에서 불쌍하다며 갖다 준 쌀뜨물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쌀뜨물도 인도의 무더운 날씨 때문에 쉬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가섭존자는 노파에게 청했습니다.

그 쌀뜨물이라도 좋으니 할머니 손으로 직접 보시하십시오.”

노파는 쌀뜨물을 존자의 발우에 부었습니다.

내가 이 물을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이미 쉬어 쓸모없는 물이니 버릴 테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시주께서 정성으로 보시한 이 쌀뜨물을 고맙게 받아 달게 마실 것입니다.”

존자는 쉰 쌀뜨물을 벌컥벌컥 들이켰습니다.

이 공덕으로 할머니의 원하는 바가 이루어질 터이니 소원을 말해보십시오.”

스님, 저는 이생에서 너무 못살았습니다. 다음 생에는 복을 많이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틀림없이 원대로 될 것입니다.”

7일 후 노파는 숨을 거두었고, 가섭존자에게 쌀뜨물을 보시한 복으로 도리천에 태어났습니다. 노파는 몸에서 환한 빛이 나는 천인의 모습으로 한밤중에 가섭존자 앞에 나타났습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스님께서 복을 닦게 해주신 덕분에 저는 천상에 태어나는 복을 받았습니다. 스님의 깊은 자비에 감사드리면서 예배를 올립니다.”

노파는 정성을 다해 절을 한 다음 사라졌습니다.

박복한 이에게 복을 쌓게 한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우리에게 깨우침을 주고 있습니다. ‘한 그릇의 쌀뜨물이라도 제대로 된 마음으로 보시하면 복이 된다. 좋은 원을 세우고 원을 담아 보시하면 큰 복도 담을 수 있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복 지을 마음을 내지 않기 때문에 복을 짓지 못하고, 복을 짓지 않기 때문에 복을 받지 못할 뿐.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터전은 그대로가 복밭이요, 매순간 복을 지을 기회가 주어지고 있습니다.

밥 먹고 옷 입고 생활하는 일상 속에서 절약하고 축원하고 보시하는 정신을 길러간다면 어찌 복이 쌓이지 않겠습니까? 결코 사소한 일일지라도 복을 짓는 데 소홀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재칠시 복을 지어라
거창한 복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돈 없이도 지을 수 있는 복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잘 베풀면 됩니다. 상대를 위해 잘 베풀면 능히 복을 쌓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재물 없이도 복을 지을 수 있는 일곱 가지 보시인 무재칠시(無財七施)를 일러주었습니다.

무재칠시의 첫 번째는 몸으로 베푸는 사신시(捨身施)입니다. 요즘은 이를 자원봉사라고 하는데, 몸이 불편한 사람을 목욕시켜주고 거동을 도와주거나 무료점심공양에 참여해 음식을 만들어주거나 병원의 환자를 돌보는 등 나의 육체를 이용해 보람되고 복 닦는 일들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무재칠시의 두 번째는 마음으로 축원해주는 심려시(心慮施)입니다. 다른 사람의 괴로움을 염려하고 배려하면서 그들의 행복을 온 마음을 다해 축원하는 것입니다.

가톨릭의 한 수도원에서는 새해 첫날에 수녀들이 모여 각기 열악한 환경 속에 있는 양로원고아원교도소병원들 중에서 한 곳을 택한 다음, 그곳 사람들을 위해 1년 내내 축원의 기도를 하면서 지낸다고 합니다.

이렇게 자신과는 특별한 연고가 없는 불쌍한 이들을 진심으로 축원해주고 행복을 염원해주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소중한 복 쌓기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불자들도 다른 이의 행복을 위해 축원하기를 널리 실천해야 합니다. 가령 어느 절에서 기도한다면 나의 소원성취를 위한 기도에만 몰두하지 말고, ‘여기 모인 대중 모두가 불보살님의 가피를 입어 소원을 성취하여지이다라는 축원을 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병원을 가게 되면 환자들의 쾌유를 축원하고, 교도소를 찾게 되면 그곳 사람들의 자유와 행복을 축원해주어야 하며, 양로원을 찾아갔으면 노인분들의 편안한 노후를 축원해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인연이 닿는 곳에 있는 이들에게 가피가 임하도록 축원하는 마음, 곧 심려시를 베풀면 나의 행복과 성취에 훨씬 더 빨리 다가서게 됩니다. ? 이것이 대우주법계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무재칠시의 세 번째는 밝은 표정으로 대하는 화안시(和顔施)입니다. 웃는 낯에 침 못 뱉고, 웃으면 복이 온다는 것을 누가 모릅니까? 그런데도 짜증 가득한 표정, 괴로운 표정, 화난 표정, 지루한 표정, 무서운 표정 등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불편하게 만듭니다.

반대로 맑고 밝고 다정다감하고 환한 표정을 지으면, 상대를 편안하고 평화롭고 해맑고 행복하게 만들고 가까이 다가오게끔 합니다. 바로 환한 얼굴 그 자체가 복 짓는 얼굴입니다. 어찌 이 복 부르는 얼굴을 마다할 것입니까?

네 번째는 사랑 담긴 말을 하는 애어시(愛語施)입니다. 사랑의 말이란 상대를 살리고 살아나게 하는 말입니다. 상대를 칭찬하고 존중해주는 말, 상대의 좋은 점을 자꾸 일깨워주고 기를 살려주는 말, 서로를 화해롭게 살게 하고 진실을 나누는 말이 애어입니다.

천 냥 빚도 말 한마디로 갚는다고 하는데, 유익하고 다정하고 희망이 깃든 말로써 위로하고 격려하고 기쁨을 준다면 행복이 넘쳐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정녕 남도 나도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고자 한다면 상대를 살리는 말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상대의 실수를 감싸주고 장점을 북돋우는 말을 해야 합니다. 꾸중하고 화를 낼만한 일이 있을 때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감싸주는 말 한마디를 건넨다면, 상대방은 잘못을 스스로 깨달을 뿐 아니라 먼 훗날까지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게 됩니다.

서로를 살리는 사랑의 말 베풀기.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의 생활화요, 행복으로 나아가는 지름길입니다.

무재칠시의 다섯 번째는 자애로운 눈길 보내는 자안시(慈眼施)입니다. 이 자안시는 눈웃음을 지으며 대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상대방에게 당장 무엇인가를 안겨주면서 일일이 간섭을 하고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늘 부드러운 마음과 자비심 가득한 눈길로 지켜보고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깊은 사랑의 마음으로 지켜보고 기다려주는 자안시야말로 상대를 스스로 깨어나게 하고 향상하게 하는, 진정한 복 짓는 일입니다.

무재칠시의 여섯 번째는 앉는 자리를 양보하는 상좌시(床座施)입니다. 내가 앉아 있던 편한 자리를 내어주는 쉬운 예로는 버스나 전철에서 노인임산부아이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면 노약자나 병자나 여행자에게 잠시 쉴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 등도 훌륭한 상좌시입니다.

무재칠시의 마지막인 방사시(房舍施)는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교통이나 숙소가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에는 집안의 빈방이나 헛간 등을 나그네에게 내어주어 하룻밤을 편안하게 지내도록 하는 것이 큰 베풂이었습니다.

이상의 무재칠시처럼 세상에는 돈 없이도 지을 수 있는 복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상의 작은 것에서부터 복 짓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돈이 있으면 재물보시를, 법을 알면 법보시를 하고, 돈도 없고 법도 모를 경우라면 무재칠시를 비롯해 상대를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무외시(無畏施)를 행하면 복이 자꾸자꾸 쌓이게 됩니다.

또한 가족이나 이웃 간에 서로의 고마움을 고맙게 생각할 줄 알고, 수고를 끼친 데 대해 미안해할 줄 알고, 지금 받고 있는 이 복을 감사하게 여기면 복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른들이 일상 속에서 복 짓는 생활을 하면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그 생활을 이어받아 복이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나의 마음으로 복을 털고 행동으로 복을 털고 입으로 복을 터는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 지 냉정하게 살피면서 참회할 것은 참회하고 베풀 것은 베풀고 닦을 것은 닦으며 살아간다면, 평생토록 세세생생토록 복덕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을 꼭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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