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자체가 없는데 병 붙을 자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맷돌축은 본래 그대로 끼워져 있는 거니까 그대로,
저 나무 뿌리가 있으니까 나무가 있듯이,
그대로 돼 있으니 그대로 철저하게 믿어라!

무의 세계로 넘어가려면
질문 현대 과학 문명이 발달하면서 물질을 쪼개 보는 기술도 자꾸 높아져서 이제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단계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쪼개고 쪼개다 보니까 질량이 이제 거의 없고 수명이 지극히 짧은 입자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 인간은 유(有)의 세계의 궁극에 이르러 무(無)의 세계로 넘어가는 문을 발견할 수 있게 될는지요.

답변 그래서 우리가 지금 한마음의 공부를 이렇게 하고 가는 거죠. 지금뿐만 아니라 부처님 당시서부터, 그분만 깨달아서 한 게 아니라 단군할아버지도 그 사는 법을 가르쳤고, 또 사대 성인들이 다 가르쳤어요, 부처님만 가르친 게 아니라.

그래서 그 문은 아주 간단해요. 지금 내가 말하듯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그 교차로에 있으니까. ‘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거와 같은 그 교차로에 죽음과 삶이 있다.’ 이러듯이, 우리 지금 세상이 이게 물질세계로서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문화 문명이 아주 고도로 발전이 됐지만, 지금은 거꾸로 다시 돌아와서 다시 그 교차로를 넘어서야 된다, 정신세계로. 그것은 우리가 지금 마음공부 하는 데 있어서 그 교차로를 넘어서야 하는 것과 같죠. 그것도 들이고 내는 그 교차로, 거기 한마음에 달려 있어요.

그러니까 이 마음에서 물질세계로 지금 팽창될 수 있다면, 정신세계로 진화돼서 우리가 발전할 수 있다면 정말이지 우리가 한마당 한식구가 되죠. 세계평화가 온다 이 소립니다. 그러한 것이 오지 말라는 법은 없어요. 아, 여기 여러분이 공부하고 계신데 뭐 걱정입니까, 네?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음을 내고도 못 믿죠? 여러분이 한번 마음을 내서 지켜보라고요, 어떤가? 의심하지 말아요. 지금 물어보듯이, ‘내가 이 공부를 하면 성사가 될까, 안 될까?’ ‘그것이 진짜 그렇게 될까, 안 될까?’ 이런다면 되겠소? 네? 내가 목말라서 죽겠는데 물을 들고, ‘이 물을 먹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이런다면 그 목마른 게 다 없어지오? 물을 먹을 수 있겠소? 그러니까 목마를 땐 그냥 무조건 먹는 것이 장땡이에요. 그리고 물이 먹기 싫을 때는 안 먹고 놓는 게 또 장땡이거든. 그러니까 어줍게 내가 조금 알아 가지고는 그냥 잘 알지도 못하면서 ‘지금 이런 시기에는 이것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 하고 막 생각 내지 말고, 모든 걸 다 맡겨서 아무 생각이 없을 때에 한생각을 내라 이겁니다.

모든 것을 망상이라고 끊어야 한다고 할 게 아니죠. 생각나고 생각나고 생각나고 생각나는 것은 망상이 아니라, 그것은 순리적으로 공해서 돌아가는…. 그렇죠? 우리가 지금 순리적으로 돌아가는 거 아니겠소. 이 생각 하고 저 생각 하고 또 딴 생각하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꾸자꾸 자꾸자꾸 이렇게 돌아가는 거지 그게 망상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게 돌아가니까 ‘내 몸, 나온 거 들어간 거, 사는 거, 보고 듣는 거, 몽땅 그놈이 하는 거다.’ 하고 맡기세요. 그놈이 하는 거지 딴 놈이 하는 게 아니거든. 그러니까 그놈, 자기 주인공한테다 모든 것을 맡기세요. 주인공 죽는 법은 없습니다. 맡겨 놓고 그놈이 한다는 것을 믿는다면 여러분이 방황할 게 하나도 없어요. 지금 금방 죽는대도 방황할 게 없어요. 그게 바로 힘이에요. 그러니까 조금 늘려 놓으려면 늘려 놓고 줄이려면 줄이지, 뭐 걱정이냐 이겁니다.

이 무심 도리(無心道理)가 지금 시쳇말로 정신세계의 한마당에, 그 한자리에, 그 만봉(萬峰)에, 만봉! 만봉 봉(峰)에 연꽃이 피어서 이 세상을 두루 할 수 있는 바로 그런 멋진 도리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하고 있는 한마당이 있는데 왜, 왜 그걸 마음대로 못해? 안 그런감요? 왜 그걸 마음대로 못해요? 허이, 참 내. 올려놓는 것도 법, 내려놓는 것도 법인데, 자유스럽게 삽시다, 자유스럽게. 이 자유스럽게 사는 방법을 배우려면 마음공부밖에는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말없이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배우는 거고, 보지 않고 보는 능력을 배우는 거며, 듣지 않고 듣는 방법을 배우는 거며,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오는 방법을 배우는 거며, 지금 결정적인 문제를 결정하지 않으면서도 결정할 수 있는 그 능력을 배우는 공부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말을 너무 남용하면, 예를 들어서 말을 함이 없이 해야지 내가 그 도리도 모르고선, 함이 없이 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설법을 했지.’ ‘내가 이런 말을 이렇게 했지.’ 하는, ‘내가 했지.’ 하는 그 마음만 들어간다면 그것이 바로 남용하는 거라고요. 그리고 그것이 바로 미(迷)해지는 그런 마음이 될 수도 있고요. 그러니까 될 수 있으면 함이 없이 해야죠. 그 말이 안 나오고 하는 것은 아직 배추 무만 사다 놨지, 양념을 해서 맛있게 버무릴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되지 않아서 그래요. 댁이 지금 사다 놓은 무, 배추에다가 양념을 버무려서 요리를 만드는 방법을 지금 수련해야 되거든. 그러니까 그러한 이유로 그런 거라고요.

그래서 나를 깨달아 가지고도 무의 세계에서의 둘이 아닌 방법을 알기 위해서 또 놓고 공부한 거예요. 육조 스님도 그렇고, 다. 또 놓고 공부해 가지고 자꾸자꾸 보임(保任)을 해서 들어가죠. 그렇게 해 가지고 나중에는 부처님처럼 야, 요만한 것에는 나도 요만하게 응해서 한마음이 되어 주고, 또 조만하면 조만한 대로 한마음이 되어 응해 주고, 이렇게 할 수 있는, 바로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오면서 내가 돼 줄 수 있게 되죠. 크나 작으나 다 내가 돼 줄 수 있고 한마음이 돼 줄 수 있는 역할을 하는 게 바로 열반이라고 하거든요. 살아서 열반이 아니라면 죽는 것이 열반이 아니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살아서 죽어야 열반이죠. 허허허. 옛날에 어떤 큰스님이 말씀하셨듯이 “3년을 눈 뜨고 푹 쉬면 된다. 그러면 둘이 아닌, 차차 열반경지로 그냥 곧장 들어가는 길이 나오느니라.” 그러셨듯이 말입니다.

누가 낫게 해 주는 것인지
질문 경기도에 어떤 기도원이 있는데 현대 의학으로써 나을 수 없는 암이라든지 백혈병이라든지 다른 기타의 병들도 거기 기도원에 가면 낫게 해 준다고 합니다. 거기에서는 우리 마음에서 찾는 주인공이 낫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낫게 해 준다고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다 맡기면 예수님이 알아서 다 낫게 해 주신다고 하는데, 저희들이 주인공에 믿고 맡겨서 병고액난을 해결해 나가는 것과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믿고 낫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요? 누가 낫게 해 주는 것인지요?

답변 항상 그러면 바깥의 노예가 돼야 되지 않을까요? 항상 빌어야 하고, 항상 낫게 해 달라고 빌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불교에선 그렇질 않아요. 이 마음의 도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즉 깨달음을 얻으려 하는 사람들, 세세생생에 벗어나려 하는 사람들은 말입니다, 이 마음은 체가 없어서 너와 내가 말을 할 때, 벌써 이 전기가 전자와 전자가 한데 합해지는 순간이에요. 합해지는 순간이기 때문에, 둘이 아니기 때문에 한쪽에서 ‘네가 불이 들어오게 했다. 내가 불이 들어오게 했다.’ 이렇게 할 수가 없단 얘기죠. 알아듣겠어요? 양쪽 전자와 전자가 한데 합쳐야 불이 들어오죠. 그러니까 이쪽 놈이 했다고 할 수도 없고 저쪽 놈이 했다고 할 수도 없잖아요. 하하하. 그러니까 말을 하는 순간에 이 마음과 마음은 전기와 같이 탁 붙어서 불이 들어왔다 이겁니다. 그랬으니 어떤 놈이 낫게 해 줬다고 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네 마음, 내 마음이 둘이 아닌 데서 불이 번쩍 켜진 거죠.

그러니 그거를 가지고 부처님께서 낫게 해 주셨다 이런 소리를 할 수 있게끔 되는 거지요. 그런데 왜 부처님이 낫게 해 주셨다고 안 하고 ‘당신네들이 할 수 있다. 당신네들이 낫게 했다.’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여러분이 한 열매가 열려서 익어서 만 가지 맛을 내게 할 수 있는 그런 여건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냥 자기가, 자기 자신이 아니었더라면 상대도 없었을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자기가 낫게 했지요. 안 그런가요? 업보도 자기가 짓는 거요, 선보도 자기가 짓는 거요, 바로 애고도 자기가 지어서 받는 것이요. 그러니까 자기가 무너뜨리는 것이니 자기가 하는 것이지요.

사랑도 모든 것을 주는 것이 사랑이지 받는 것이 사랑이 아니에요. 예를 들어서 부모가 자식을 생각을 할 때 때리든지 안 때리든지, 욕을 하든지 욕을 안 하든지 부모는 자식을 무조건 사랑을 해요. 그거를 자비라고 해요. 무조건 하는 것이 자비예요. 거기 이유가 붙어서 사랑을 한다, 뭘 한다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에요. 진짜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자비가 될 수 없다는 얘기예요. 그래서 여기서는 업보가 붙을 자리가 없다는 걸 강조하고 있지요. 병이 붙을 자리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지요.
여러분 자체가 없는데 병 붙을 자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없다는 그 자체는 너무 고정되게 있지 않고,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고, 걸어온 자체가 없고, 말한 자체가 없고, 이름을 부른 자체가 없어요. 자체가 없이 돌아가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말이에요. 그러고 돌아가니, 비유한다면 비행기 프로펠러가 돌아갈 때 아주 보이지도 않지요. 그런데 그렇게 돌아간다면 먼지 앉을 게 있나요? 우리도 그렇게 돌아가고 있는 거예요. 우리 의식이 그런 거를 몰라서 생각을 안 하고 그냥 사니까 그렇지, 이거 하나도 그렇게 돌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돌아가기 때문에 이런 것도 (물컵을 가리키시고) 지수화풍을 통해서 바로 우주개공이 여기에도 있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밖으로 “하나님이시여, 예수님이시여!” 하고 그렇게 하는 것은 바깥으로 끄달리는 것밖에는 안 됩니다. 바깥의 이름 하나를 가지고 붙들고 늘어지니까요. 그런다면 병은 더러 낫는다고 하지만 자기를 깨달을 수는 없어요. 자기를 깨달아서 자기가 벗어날 수는 없다 이 소리예요. 세세생생에 벗어날 수는 없는 겁니다. 이를테면 자기 영혼을 건질 수 없다는 거지요.

저항 없이 그냥 따라가야 하는지
질문 우리는 착한 행을 하면 복이 온다 해서 항상 착하고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내 뜻이나 나의 성품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방향으로 일이 거꾸로 돌아가는 경우를 자주 접하게 됩니다. 이때에도 인연법에 따라서, 이것이 인연이니 하고 나 스스로 나의 본성을 죽이고 저항 없이 그냥 따라가야만 하는 겁니까, 아니면 여기에 저항하면서 새로운 계획을 해야 되는 것입니까?

답변 하여튼 방향이 제대로 나가지 않는 것은 이렇게…, 맷돌축 있죠? 축을 갖다가 제대로 꽂지 않았으면 물건을 넣고 갈아도 제대로 갈려서 나오지가 않습니다. 딴 방향으로 나갑니다, 마구 그냥 쏟아집니다. 그와 같습니다. 똑바로 끼워야죠. (손가락을 하나 세워 보이시고) 아래 위가 똑바로 심봉이 끼워져야 제대로 일하며, 전자와 전자줄이 한데 제대로 이어져야 불이 들어옵니다.

그렇지만 맷돌축은 본래 그대로 끼워져 있는 거니까 그대로, 저 나무 뿌리가 있으니까 나무가 있듯이, 그대로 돼 있으니 그대로 철저하게 믿어라 이겁니다. 왜 자기 뿌리를 안 믿어요? 그렇다면 형상을 믿을 겁니까? 그래, 형상도 내 몸과 저 형상이 둘이 아니다, 부처님 형상이 내 형상과 둘이 아니요, 부처님 마음이 내 마음과 둘이 아니요, 또는 부처님의 생명이 내 생명과 둘이 아니니 그저 둥글게, 모나게 하지 말고 둥글게, 일정례(一頂禮)를 하더라도 둥글려서 일심(一心)으로 진실하게 일배를 올려도 올려라 이런 겁니다.

그러니까 방향이 딴 데로 나가는 거는 잘못 끼웠기 때문입니다. 즉 말하자면 마음 내기 이전의, 내 마음의 선장을 올바로 투시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욕심대로 나가는 생각이 80%라면 ‘그렇게 하지 말아야지.’ 하는 건 3%밖에 안 되니까, 비중이 더 큰 데로 돌아가죠. 안 그렇습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하지 마시고 뿌리에서 그 싹을, 전체를 살리고 있으니까 ‘너밖에 할 수 없다.’하고 다 맡기고 심부름꾼으로만 사세요. 시자, 관리인! 사실 따지고 보면 관리인입니다, 심부름꾼이고! 따지고 보면 속의 생명들의 심부름꾼이기도 합니다. 또 이 사람 전체 몸뚱이의 심부름꾼이기도 합니다, 여러 생명들이. 그러니까 그것도 또한 둘이 아니죠.

그러니 마음쓰기에 달려 있으므로 이 몸뚱이 속의 모든 의식들이,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그렇게 아주 고정적으로 입력이 돼 있는 의식들이 마음 씀씀이에 의해서 바로 화(化)해서 달라진단 말입니다. 자기 마음을 따라 주게 해야 업보성, 인과성, 유전성, 영계성, 세균성 이 모두가 무너져서 내 마음 하나로 돌아가게끔 돼서 딴 데로 흩어지질 않습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부처님이 되지 못한 사람이지만 다 같이, 이름해서 부처죠. 나도 여러분과 똑같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이날까지…, 그래서 내가 그랬죠? 분수를 알아서, 내가 얼마만한 그릇이란 거를 알고 해라 이겁니다. 내가 내 그릇에 이만한 걸 담아도 손색이 없을까 하는 걸 미리 알아차려라 이겁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냥 분수도 모르고 요만한 그릇에다가 (컵을 가리키시며) 드럼통으로 하나를 갖다가 집어넣는다면 이게 담겨집니까? 그러니까 첫째 분수를 알고 진짜로 믿는다면, 그냥 믿는다 안 믿는다도 없이 진짜로 믿는다면…. 나는 내가 하려고 한 것에서 벗어난 예가 한 번도 없어요.

내가 예전에도 얘기했지요? 처음에 여기 왔던 해에 김장할 다라가 없어서 ‘다라가 없으니 어떡하나. 김치를 해서, 오는 사람들에게 모두 나눠 줘야 할 텐데….’ 하니까, 그 이튿날 어떻게 된 줄 아세요? 다라가 열 개가 들어왔어요. 왜냐? 그게 이심전심이죠. 이 모두가 이심전심으로 통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보이지 않는 내 마음 내기 이전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난처하게 생각 마시고요, ‘왜 나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번연히 알고도 이렇게 딴 데로 가나.’ 이러지 마시고 죽든지 살든지 진짜로 믿으세요. 아니, 더 잘 살려고 아무리 해 봐도 그렇다면 차라리 아예 ‘이젠 너 알아서 해!’ 하고, ‘나는 부지런히 뛰어줄게, 너 알아서 해!’ 하고 거기다가 맡겨 놓는 게 더 상책이 아닐까요? 더 살기가 편안하고요. 이거는 내가 한다, 내가 짊어지고 내가 산다, 내 거다, 내가 망했다 이런다면 어휴! 그거 사람이 한 생 사는 데 얼마나 비참하겠어요. 그러니까 아주 푹 쉬고 저 세 살 먹은 애, 다섯 살 먹은 애가, 학교에 다니는 애들도 그렇고, 자기 아버지 어머니를 믿고 그냥 학교 공부만 열심히 하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 보세요. 그리고 책이 없어도 ‘아, 아버지가 사 줄 테지.’ 하고 말이에요. 공책이 없다면 “공책이 없어, 아버지!” 그러면 사 주듯이, 이렇게 편리하게 사세요. 그러면 딴 방향으로 안 갈 겁니다.

상대방을 부처님으로 보려면
질문 어떻게 해야 상대방을 부처님으로 볼 수 있습니까? 내가 부처님이 되어야 상대도 부처님으로 보인다고 하는데 공부하는 과정에서 분별심이 없어지지 않고 잠재의식이 사라지지 않으니까 대인관계에서 큰 손해를 보고, 급기야 자기 인생을 망치는 경우도 간혹 있습니다. 여기서 한번 뛰어넘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침 주시기 바랍니다.

답변 우리는 지금 태어난 것이 시발점이 돼서 종교를 믿고 이렇게 가는데, 여기까지 (염주의 매듭 부분을 가리키시며) 와 가지고 여기를 한번 뛰어넘어서…, 이게 말하자면 생사에 관한 건입니다. 물질세계에서 이리로 와서 여기를 다시 뛰어넘으면 이제 피안의 세계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로 넘어간다 이런 소리와 같습니다. 이것이 살아서 열반이라고 하는 경계입니다. 죽어서 열반은 없어요. 그러니까 한번 내가 모든 거를 놔서 죽은 세상까지 돌아야, 살아 있는 세상과 죽어 있는 세상이 동시에 같이 있는데 거기를 찰나찰나 이렇게 한 바퀴 돌 줄 알아야, 모가 나지 않게 돌아갈 줄 알아야, 50%와 50%를 합쳐서 100%를 같이 굴릴 줄 알아야 이게 됩니다.

그래서 한 바퀴 돌아와야 그 둘이 아닌 도리를 확실히 알 수 있어요. 왜냐하면 내가 이 세상에 나와서 자식이 됐다가 부모가 됩니다. 부모가 됐다가 또 한 번 옷을 벗고 한 번 돌아요. 돌아서 다시 탄생을 해 보니까 딴 부모한테 또 태어났어요, 인연에 따라서. 그러니까 또 딴 부모의 자식이 되더란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딴 모습으로다가, 짐승의 모습을 가지고서 짐승의 자식이 돼서 또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돌고 돌다 보니까 내 자식 아닌 게 하나도 없고, 내 부모 아닌 게 하나도 없고, 내 형제 아닌 게 하나도 없더라. 공동묘지에 가 보니까 남녀노소도 없고 그대로 늙었더라.’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니까 그것 또한 깨쳐야 알겠죠.

그러니까 지금 이 줄과 염주알이 둘이 아니다, 뿌리와 싹이 둘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뿌리의 세계를 알아야 뿌리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나오면서 자꾸 화(化)해서 모습이 바뀌어서 나오는 거, 인연이 바뀌어서 나오는 거, 그런 거를 다 이렇게, 50%만 아는 게 아니라 100% 돌아가면서 알아야 ‘아! 모두가 둘이 아니로구나!’ 이렇게 진실하게 알지, 내가 직접적인 행을 해 보지도 않고,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고, 먹어 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둘이 아닌 줄 알겠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죽었다 깨어나고, 깨어났다가 죽고 이러는 도리를 확실히 알기 위해서, 우리가 지금 이 공부를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 도리를 알게 됩니다. 내 과거에 살던 나와 현실에 살던 자기와 둘이 아니게 상봉을 해야 진짜로 그런 도리를 공부할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알게 되는 겁니다. 스스로 알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스스로 너 나가 없이 자비를 베풀 수가 있고, 네 부모 내 부모 아님이 없이 자비를 베풀 수가 있고 마음을 낼 수가 있지, 어떻게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너 나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이고, 둘이 아니다!’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모습이 둘이 아니라는 게 아니라 그 마음이 둘이 아니다, 영혼이 둘이 아니다 이겁니다. 영혼이 둘이 아니라면 진짜로 자비를 베풀 수가 있는 겁니다. 그리고 모습은 따로따로 각각 있을지언정 한 줄에 꿰였다 이겁니다, 한 줄에. 이 염주알은 따로따로 있으나 한 줄에 꿰여 있으니까 ‘너 나가 둘이 아니구나.’ 이렇게 알려지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도 또한 발견을 해야 아시겠죠, 확실하게.

그러나 발견을 못했어도 ‘진짜로 뿌리의 세계는 그렇게 둘이 아니구나. 영과 영이 만 개가 한데 합쳐도 영은 영이고 바로 둘이 아니구나.’ 이런 걸 알게 될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모두 자비를 베풀고 사랑을 하고, 욕심을 부리지 않고, 남을 증오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고, 이렇게 항상 하신다면 자식의 업보도, 남편의 업보도, 아내의 업보도, 부모의 업보도 다 사라지게 돼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신도님들 중에 실천을 아주 잘하고 가시는 분들도 많은데, 그게 왜 그렇게 되는지는 모르면서도 실제로 체험하고 가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는지는 모르죠. 그러나 자기가 그만큼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는 거는 알고 있을 거예요. 컴퓨터에 입력하는 거와 비교를 해서 얘기해 드렸으니까요. 한 찰나에 없어지는 것은 그거와 같다 이겁니다. 입력이 돼서 나오는 데다가 다시 입력을 한다면 앞서의 입력은 없어진다는 사실을 그대로 얘기해 드렸으니까요.

내가 대답을 서투르게 해 드리더라도 여러분은 좀 지혜롭게, 너그럽고 둥글게, 이렇게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난 배우지 못해서 그런지 그 용어를 방편으로 빨리빨리 대치를 해서 얘길 할 줄 모르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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