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과 현대미술 - ⑧ 에두아르도 칠리다

따피에스 영향받아 禪사상 심취
수행 통해 자신의 조형어법 완성
콘크리트·철 소재 大作들 만들어
사물의 시간·관계성 작품에 반영
“공간·시간 속의 자유로움” 추구

▲ 자신의 작품 사이에 서 있는 에두아르도 칠리다. 따피에스의 영향으로 선 사상에 심취한 칠리다는 콘크리트, 철을 이용한 대형 작품들을 만들었다.
도시의 빌딩숲 속에 세워져있는 거대한 조각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낯설음에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옆의 빌딩이나, 다른 건축물들과 밀접한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이 거대한 작품은 하지만 말없이 침묵하며 시간의 흐름을 보여준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변화해가는 이 조각은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는가?

에두아르도 칠리다(Eduardo Chillida, 1924~2002, 스페인)는 커다란 조각을 통하여 진정한 자유에 대한 물음을 던져주고 있다.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거대하게 제작된 크기의 조각 작품들은 건축물의 일부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자세히 보면 전혀 다른 형상을 하고 있으며, 또한 자신의 존재성을 드러내는 특정한 형태를 사용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비정형적인 도형의 집합 같기도 한 작품들은 주변의 건축물이나 자연의 형상들을 침범하지는 않는다. 어떠한 대상의 일부분을 확대시켜놓은 것 같은 작품들은 자신이 놓인 공간에 새로운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그 긴장감은 다시 새로운 인식의 전환을 가져다준다. 마치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이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관념적 틀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며 지금 다시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자극을 주는 것이다.

칠리다는 자신의 작품에 대하여 ‘공간, 시간 속의 자유로움’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공간은 한정적인 때가 많다. 때문에 자신의 삶의 방식도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일상의 익숙함에 길들여지며 자신의 경계를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공간에 갑자기 나타난 거대하며 거칠은 조각은 새로운 공간의 질서를 생성시키며 인식의 변화를 유도한다. 작가의 의도적인 설정으로 볼 수 있지만 사실 우리의 삶의 과정도 이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공간의 활용도를 높이기 위하여 건설되는 고층빌딩들 역시 누군가의 의도에 의하여 아니면 경제적인 이익을 위하여 주변과의 관계성이 무시되고 건축되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목도해왔다. 누구를 위한 것인지 혹은 이것이 옳은 일인지 생각하고 통찰할 수 있는 시간도 없이 나타나는 이러한 건축물들은 일상의 삶과 마음마저 변화시킨다.

마치 거대한 물줄기가 만들어 지면 주변의 작은 것들은 송두리째 커다란 물길에 휩싸여 사라지듯이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반복해서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시간의 빠른 흐름과 변화 속에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거대한 흐름 속으로 침몰되어 자신의 의도와 상관관계가 없는 상황 속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칠리다는 이러한 시대적인 흐름 속에서 자신의 의도를 가지고 다시 일상의 공간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공간 속에 설치된 콘크리트나, 철로 구성된 조각 작품들을 통하여 마음의 자유를 찾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보편적인 삶의 과정에서 환경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신 주변의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늘 상대하는 자연과 대상이라도 자세히 관찰해 보면 변화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릴 수가 있다. 반복되는 가운데 변화하는 이치를 알아가는 것이며 이러한 과정이 계속되면 어떠한 공간속에서도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마치 숲을 도시공간에 옮겨놓은 것 같이 나의 마음이 자유로우면 그 장소가 또는 환경이 어떠한들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칠리다는 시간성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작품들은 시간성을 통한 대상과의 관계성에서 사유의 자유로움을 추구한다고 하였다. 자신이 제작한 작품은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한다.

콘크리트를 사용한 작품들은 비바람을 맞으며 인고의 시간을 견디면 어느 순간 거칠던 부분들이 순화되어 부드럽게 되어 진다. 또한 철로 된 작품들 역시 시간의 흐름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아니면 적어도 수백 년은 형상을 유지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적으로 원래의 모습은 사라지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이것은 작가의 의도이기도 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 진정한 마음의 자유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마음의 자유는 어디에서 오는가’ 하고 질문을 던지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인식하거나 학습된 내용들을 말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역시 관념적일 것이다.

필자 역시 한때는 내가 아는 것이 진리이고 모두가 옳다고 착각하며 살았던 때가 있다. 어느 순간 내가 아는 것이 모두 가짜이고 내가 만들어 놓은 허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나니 과거보다는 많은 부분에서 자유로워짐을 느끼게 되었다.

칠리다는 진정한 자유를 찾아가는 수행자의 모습을 자신의 작품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다. 자신이 설정한 것이 영원한 것이 아니며 매순간 변화하고 있다는 인식을 통하여 자유로운 인식의 토대를 구축해 나아간 것이다.

따피에스와도 많은 친분이 있었던 칠리다는 선(禪)사상에 심취하며 진정한 자유에 대한 사색을 하기 시작하였으며, 자신만의 조형어법으로 수행적 관점들을 형상화시켜 나아갔던 것이다. 당시 많은 조각가들이 추상조각에 심취하여 조각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나아가고 있을 때 그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조각 작품을 통한 인식의 전환에 관심을 가지고 작품을 제작하게 된 것이다.

▲ 스페인의 미술가 에두아르도 칠리다의 작품. 자연의 환경 속에 놓여지는 그의 작품들은 또 다른 자연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연 속의 조형물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관찰하는 것 자체가 칠리다의 작품이 가진 특징이다.
자연과 공간, 시간은 그의 작품의 중요한 요소이다. 자연의 환경 속에 놓여지는 그의 작품들은 또 다른 자연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진〉 참조.) 자연 속에 인공적인 자극이 가해짐으로써 본래의 자연의 모습들이 변형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에서는 자연의 또 다른 모습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거꾸로 매달려 있는 열매의 봉우리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작품은 철로 만든 조각 작품이다.

나무들이 많은 숲에 철의 작품은 녹슬어 가며 점차 나무의 줄기처럼 변화해 간다. 다시 자연 속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시간의 흐름이다. 시간은 그에게 또 다른 작품의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실내의 공간속에 놓여있는 작품들은 시간의 흐름에 반응하는 속도가 느리다. 때문에 인식하는 관점에 따라서는 거의 정지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이것 또한 변화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순간 인지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어쩌면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지 못하는 데서 관념적 사고가 축적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스스로가 관념적 사고에서 벗어나고자 기하학적 이미지를 조합하는 형상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기하학적 도형들은 보는 순간마다 전혀 다르게 인식되기 때문이다.

특히 해안가, 절벽, 공원, 도심 등 그의 작품이 설치된 공간은 보는 각도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보여 진다. 여기에 그의 천재성과 수행을 통한 인식의 자유로움을 찾을 수 있다. 어느 것도 같은 것은 없다는 보여주며 모든 것은 새롭게 변화한다는 것을 통하여 진정한 자유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하학적 도상들과 시간성을 통하여 지금 자신이 깨어있음을 보여주는 그의 작품들은 커다란 크기에서 자연의 위용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가 자연 속에 설치한 작품들은 그 크기가 대단하다. 해안가에 설치된 작품들은 마치 거친 파도와 싸우는 듯한 이미지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물거품의 순간을 포착해 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보이는 순간을 포착하는 것은 작가에게는 중요한 일이다.

그 찰나의 순간에 번뜩이는 모습은 순간 사라진다. 파도가 해안가에서 물거품을 만들어 내지만 물거품의 형상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다시 밀려오는 파도가 물거품을 만들어 내지만 이미 그 모습은 새로운 것이다. 때문에 작가는 그 한순간의 이미지를 포착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능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칠리다는 명상을 통한 고요함속에서 그 순간을 포착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자신의 내면의 본질적 자아를 관조하는 명상은 사고의 자유로움을 가져다주며 나아가서 창의성의 발현을 일으키는 중요한 방법 중의 하나이다.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기하학적 이미지들은 유사성을 보이는 것 보다는 서로 다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는 자신이 관조하는 인식의 범주가 확산되기 때문에 동일한 것보다는 다양성이 더욱 표출되는 것이다. 즉 매순간 변화하는 가운데 새로운 이미지를 포착하기 때문에 매번 다르게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커다란 조각을 하는 과정은 건축을 하는 것과 유사하다. 하지만 조각은 어떠한 공간성을 통한 삶의 편리함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닌 사유의 전환을 통한 인식의 자유로움을 가져다주는 역할을 우리에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칠리다의 작품이 보여주는 특성은 기하학적 도상과 시간성이다. 둘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성을 형성하며 창의적인 특성들을 보여주고 있다. 공간성을 떠난 자연 속에서의 시간성과 인공적인 건축물속에서의 시간성의 차이점을 부각시키며 인식의 틀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시간성 또한 그의 작품 속에서는 중요하게 작용하는데 이는 전적으로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서 그 순간 인식의 관점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즉, 관념적 사고에서 보면 그의 작품은 항상 같은 모습이다. 하지만 자유로운 인식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 작품은 한 번도 같은 적이 없는 것이다. 한번 흘러간 물은 다시 그 자리에 오지 않는다고 한다. 그의 작품을 보면서 시간성의 관점을 자신의 삶속에서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필자의 바람이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