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 초연해 금강산서 승려와 교유

광해군 폭정 피해 산속 은둔
폐위 사실 듣고도 복귀 안 해
벼슬 구하는 길 멀리한 채
승려들 시축에 많은 글 남겨

▲ 유몽인이 승려들과 교유했던 유점사의 1930년대 모습.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기를 살았던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은 문장가로 글씨에 남다른 재주를 드러냈다. 그의 자는 응문(應文), 호는 어우당(於于堂), 간재(艮齋), 묵호자(默好子)이다. 설화 문학의 대가로 야담을 집대성한 어우야담과 시문집 어우집(於于集)을 남겼다.

한때 성혼과 신호의 문하에서 수학했지만 경박하다는 책망을 듣고 쫓겨나 성혼과의 관계가 소원하였다. 1589년 중광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병조참의를 거쳐 황해감사, 도승지 등을 역임했다. 임진왜란 때에는 선조를 호종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1609년에는 성절사 겸 사은사로 임명되어 대명외교에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광해군 때, 대북세력들의 폐모론(廢母論)이 거론되자 이에 가담하지 않고 도봉산에 은거하며 난세를 피했다. 하지만 서인들의 정치적 모략으로 참형을 당했으니 천시(天時)를 얻는 것보다 득시(得時, 때를 얻음)가 중요하다는 옛 사람들의 말은 그의 삶에 적중한 말인 듯하다. 한때 정치적인 혼란이 극도로 치달았던 광해군 시절 산간에 은둔하거나 사찰을 주유하며 승려들과 교유하였던 그가 승려들의 시축에 많은 글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불연(佛緣)이 아니었을까.

아무튼 그가 일시 거처했던 사찰만도 한양 인근의 수종사(水鐘寺)를 비롯해 금강산 일대의 장안사(長安寺), 표훈사(表訓寺), 유점사, 삼장암(三藏菴), 건봉사(乾鳳寺) 및 천주산 영은사(靈隱寺), 자은사(慈恩寺), 열반산 기기암(涅槃山奇奇菴), 도봉산 묘봉암(道峰山妙峰菴), 천덕암(天德菴), 가운암(佳雲菴) 등으로 널리 분포되었고, 가야산팔만대장경전상량문(伽倻山八萬大藏經殿上樑文)을 썼던 것도 그가 불교와 친근했던 일면을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하지만 그가 어느 시기부터 승려들과 깊이 교유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그의 문집 어우집에 의하면 대략 1606년부터 금강산에 주유하면서 사찰을 순례하고, 승려들과 교유했던 흔적이 보인다. 특히 광해군 시절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몸을 피해 산간에 숨어든 후 여러 사찰을 전전하며 은둔하였기에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이 폐위된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도 그의 문집을 통해 확인된 것이다. 영은사의 승려 언기와 운계에게 써 준 유보개산 증영은사언기 운계양승서(遊寶盖山 贈靈隱寺彦機 雲桂兩僧序)는 그가 승려들과 교유했던 일면을 드러낸 것이란 점에서 중요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유몽인 저서 〈어우야담〉
언기와 운계는 시승(詩僧, 시에 능한 승려)이다. 1606년에 나와 언기가 묘향산 보현사에서 서로 만났으니 이때 언기는 송운대사에게 수학하고 있었다. 1618년에 운계는 내 송천정사에 객으로 있으며 나의 시를 얻은 자이다. 1623년 여름에 내가 보개산 영은암에서 두 승려를 만났는데 이들이 놀라서 내가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물었다. 내가 말하기를 지난해 가을 9월에 내가 금강산에 들어갔는데 (병으로) 생을 마칠 것 같았다. 10월이 지나 집안 식구가 한양에서 산사로 와서 위급한 병을 구완하였다. 다음해 4월이 지나 금강산에서 서쪽으로 간다고 한 것은 음식을 얻기 어려워서이다. 풍전에 도착하여 집안 식구를 서울로 돌려보내 사람 수를 줄이고 이 산으로 들어와 여장을 풀고 승사에 머물렀는데 곡식이 점점 줄었다. 행로에서 들으니 구 임금이 폐해졌다고 하는데도 내가 (이를) 듣고도 심히 놀라지 않았던 것은 일의 징후를 미리 보았기 때문이다. 또 새로 왕이 자리에 오르셔서 어지러운 정치를 혁파하고 어진 은혜를 베푼다는 소식을 듣고 백성처럼 기뻤지만 (그것을) 듣고도 놀라거나 하례하지 않았다. 배고픈 사람이 쉽게 먹는 것은 오히려 제왕이 한 것이다. 두 승려는 의심하여 묻기를 우리들은 산사람이다. 옛날부터 수년 동안 금강산에서 지냈는데 비록 한가한 선비일지라도 오히려 어려운데 하물며 재상이랴. 이미 산을 떠난다고 하면서 다시 이 산에서 무엇을 하는가. 지금 새 성인이 나라를 다스리시니 벼슬을 구하는 자가 저자로 돌아가야 하는데 또 어찌 중도에서 배회하는가. 말하기를 나는 늙고 망령된 사람이다. 산으로 들어가는 것은 세상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산을 좋아해서이다. 지금에 산을 떠나는 것은 벼슬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먹을 것이 부족해서이며, 이 산에 머무는 것은 산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곡식이 적어도 되기 때문이다. 물건은 오래되면 신령스럽고 사람은 늙으면 공허하다. 화를 6년 먼저 피한 것은 신령한 것이며 이익을 보고 빨리 쫓지 않는 것은 공허한 것이다. 지난해 선산에 머문 것은 고상하고 금년에 야산에 머무는 것은 속된 것이다. 진흙탕을 휘저어도 더럽지 않은 것은 깨끗한 것이다. 먹는 것을 따름은 비루한 것이다. 내 어느 곳에 있으랴. 그 오직 재주가 있고 없음과 어질고 어질지 못함과 지혜롭고 어리석음과 귀하고 천한 사이에 있는 것일 뿐. (彦機 雲桂 兩詩僧也 萬曆三十四年 余與機相遇於香山普賢寺 時機從松雲大師受學者也 萬曆四十六年 桂客我松泉精舍 得我詩者也 天啓三年夏 余入寶盖山靈隱庵 見兩僧 兩僧驚問我自何來 余曰 去年秋九月 余入金剛山 計終老也 越十月 家累自京師來山寺 救危病也 越明年四月 辭金剛西行 因艱食也 行到田 送家累還京 省人口也 路入玆山 解裝休僧舍 稍賤也 聞之行路 舊君廢 余聞之不甚驚者 已見於事之先也 又聞新王立 革亂政敷仁惠 民庶驩如也 聞之不驚賀者 飢者易爲食 猶以齊王也 兩僧疑而詰之曰 吾 山人也 自古過歲金剛 雖寒士猶難 宰相乎 旣曰離山 則復何爲於此山 當今新聖御國 求宦者如歸市 又何爲徘徊中路 曰 余老妄人也 向之入山 非輕世也 樂山也 今之去山 非爲官也 乏食也 留此山者 非愛山也 穀賤也 物久則神 人老則耗 避禍先六載 神也 見利不疾趨 耗也 前年處仙山 高也 今年投野山 俗也 泥而不滓 潔也 有食從之 陋也 吾何處之哉 其惟才不才賢不賢 智與愚貴與賤之間乎)

1606년부터 1624년까지 금강산 묘향사에 주유했던 그는 승려 언기와 운계와 이미 오래 전부터 교유했으며, 1618년 그가 운계의 송천정사에 있을 때 찾아와 시를 구했던 사실도 드러난다. 그가 다시 이들을 만난 것은 금강산을 유람할 때이다. 아마 광해군의 폭정을 피해 산간을 유람할 때라 여겨진다. 이들은 모두 시에 밝았다. 그가 여행 도중 얼마나 어려운 여정을 거쳐야 했는지는 병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던 정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산천을 떠도는 동안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반정이 일어났던 사실도 그는 알지 못했다. 세상이 바뀐 일을 길에서 들었지만 이미 그는 세상의 일에 초연하여 세상에 나아가 벼슬을 구하는 일에 관심을 두지는 않았던 듯하다. 다시 금강산으로 들어 가고자했던 그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던 승려들은 그가 이미 높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으로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의중을 깊이 알 수 없었던 듯하다. 하지만 그의 뜻은 분명하고도 단호했다. 바로 산으로 들어가는 것은 세상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산을 좋아해서라는 것이다.

한편 그와 교유했던 유점사의 승려 영운이 글씨와 시문에서 능했다는 사실은 여유점사승영운서(與楡岾寺僧靈運書)에서 영운 승려는 유점사의 이름 있는 승려이다. 자못 민첩하고 지혜로우며 해서를 잘 쓴다. 내가 표훈사 사적에 그의 필적이 많기에 한 번 보고자 한 것이 오래되었는데 지금은 (유점사) 주지이다(靈運上人師 卽楡岾寺名僧也 頗敏慧善楷書 余於表訓寺事蹟多其筆迹 欲一識面者久矣 乃今爲住持)”라고 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그에게 유점사 승려 영운이 글을 청하며 김과 짚신, 한지를 예품으로 올렸던 일도 소상하게 밝혀졌다. 이를 통해 당시 승려들은 유학자에게 시를 청할 때에 짚신, 한지, 채소, , 혹은 차 같은 물품을 답례로 보냈는데 이는 대개 산간에서 구하기 손쉬운 물품이었다.

글에 밝았던 유몽인은 은어를 통해 언어의 폐단과 불교의 교리를 나타낸 증건봉사승신은서(贈乾鳳寺僧信誾序)를 지었는데 이는 성불(成佛)의 의미를 의미심장하게 풀어낸 글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 글에 내가 금강산에 있을 때 보니 산중의 작은 암자에는 기이한 승려들이 많았는데 수십 년 동안 솔잎을 먹으며 오곡을 먹지 않는 승려들이 돈오로 법을 삼아 도를 깨친다. 내가 그 본질을 토론해보니 대개는 글자를 모르고 경문을 하나도 읽지 않았다. 이들과 말을 해보니 마음을 통철한 듯하다(余處金剛山 見山中小菴多異釋 餐松栢積數十年者 式以頓悟見道 稱余討其實 大率不識字 不讀一經文 與之語 心地洞然)”고 하여 당시 승려들의 수행의 일상을 드러냈다. 그의 해학적인 글 솜씨는 이렇게 이어진다.

옛날에 이 산중에 세 승려가 있었는데 각자 큰 보따리에 옷과 식량을 싸가지고 떠나며 서로 약속하기를 우리 세 사람이 은어()를 만들어 (은어에) 능한 자는 짐을 들지 않고 능하지 못한 자가 짐을 지고 가는 것이 어떤가 하였더니 모두 좋다고 하였다. 한 승려가 보따리를 버리고 벼 논두렁에 누워 말하기를 밤이 되었으니 나는 자려고 한다고 하였다.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우리나라의 말에 논두렁은 야()와 음이 같지 않은가라고 하자 (두 승려가) 그렇다고 하였다. 두 승려가 (말한 승려의) 보따리를 둘로 나눠지고 갔다. 어느 곳에 이르니 한 승려가 가시덤불 속으로 들어가 앉으며 말하기를 집안일에 매여 갈 수가 없다고 말하자 무슨 말인가라고 하니 우리나라 방언에 구극(拘棘)나무라다라는 말이지 가사에 매인다는 말은 아니다고 하니 (두 승려가) 맞다고 하였다. (다른) 승려가 세 보따리를 모두 지고 가며 말하기를 등에 두 칸의 집을 지고 가는데도 괴롭지 않다고 하였다. 무슨 뜻인가라고 하니 (보따리를 모두 지고 가는) 승려가 잠잠히 대답하지 않자 두 승려는 모두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에 모두 세 보따리를 지고 비탈진 언덕에 오르니 땀이 나 온 몸이 젖었다. 길에서 어떤 늙은 승려를 만났는데 승복이 해져 남루하였다. (노승이) 묻기를 세 승려는 동행을 하고 있는데 두 승려는 한가히 들에 누워 있고 그대만 홀로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것은 어째서인가. 승려가 (은어) 세 가지를 말하니 노승이 합장하며 말하기를 그대만 홀로 성불했구려. 우리나라 말에 들보라는 말은 보()와 같은 음이 아닌가. 두 칸의 집은 세 개의 들보로 얽어매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두 승려의 말은 천기를 파한 죽은 말이고 그대의 말은 천기를 온전한 살아 있는 말이다. (따라서) 그대만이 성불한 것이로다라고 하였다. (曰昔者 此山中有三僧 各用大褓衣糧而行 相與約曰 吾三人作語 能者解其負 負不能者其可 僉曰可 一僧舍褓 稻池之阡曰 夜也 吾將宿 曰 何耶 曰 東方之語 水田之阡 不與夜同音乎 曰 然 二僧二其褓 分而擔而去 至一處 一僧入棘林中 坐曰 拘家事不得去 曰 何也 曰 東方方語拘棘刺 不謂拘家事乎 曰 然 一僧合三褓而負而去曰 背負二間屋 其無困乎 曰 何耶 其僧而不答 兩僧俱不解也 於是 合負三褓上峻 流汗洽體 路遇一老釋 弊衲藍縷 問曰 三僧同行 兩僧閒中野 子獨行負重何耶 僧以三言告之 老僧合手而拜曰 子獨成佛也夫 東方之語 稱屋樑不與褓同音乎 二間之屋 不架三樑乎 兩僧之言 破天機死語也 子之不言 全天機活語也 子獨成佛也夫)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